문 : 깨달은 상태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나요?
답 : 예부터 산스크리트어 식 명칭들을 사용해서 서술되어 온,
사마디(삼매 혹은 선정)의 각기 다른 수준들이 있습니다.
우선 초월적인 상태이긴 하나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가 있는 동안만 지속되는 사마디가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뜬 후에도 명상의 상태가 지속되는 좀 더 강력한 사마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이러나 주위를 돌아다니고 간단한 일을 하는 동안에도 지속되는
훨씬 더 진전된 상태의 사마디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들은 뇌파도가 보통의 의식 상태를 나타내는 베타 파보다 훨씬 더 느린 '알파'파로 기록됩니다.
그렇게 훨씬 더 진전된 상태는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앎이며 그로 인해 세속으로 돌아와서
카르마나 그 이전의 결정, 선택, 동의에 의해 결정된 대로 제 기능을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그렇게 세속으로 돌아온 이에게는 '현자'라는 이름이 붙으며
그는 치료자이자 스승이자 깨달음에 관한 정보의 원천으로서의 역할을 할수 있습니다.
깨달은 현자의 뇌파도는 평사시 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을 아주 어렵게 만드는 느린 세타 파에의해 지배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어느 때고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지속됩니다.
마치 말없는 동의나 앎의 일부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선택의 가능성은 항시 열려 있습니다.
그에게는 삶을 지속해 나가야 할 하등의 의무가 없습니다.
문 : 그렇다면 세속적인 삶은 어떻게 재개도나요?
답 :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세상에서 충분히 활동하룻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교류 방식들을 다시 익히고
인간사에 다시 친숙해지면서 적절한 조정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취근의 역사를 따라 잡아야 했습니다.
그런 일은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보고 신문 기사의 제목들을 읽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인류의 의식의 전체적인 장 속에는
마치 자체의 본질에 의해서 투명하게 드러나는 듯한 지속적인 대화가 존재합니다.
그 대화를 인지(認知)할 경우 그것은 자신이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선택지들을 동반한 여러 가지 측면들을 제공해 줍니다.
문 : 그런 상태에서 지속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답 : 참나의 앎과 현존이 항상 존재합니다.
남아 있는 인성은 사람들이 평범하지 않은 어떤 면모에 주목하거나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황을 피하고 온전해 뵈는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에 적절히 부응해 줍니다.
이런 평범함은 스스로의 뜻으로 익히는 것이긴 하나 에너지의 소모와 형상에 대한 주의를 요구합니다.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상호 작용하는 일은 하루 중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것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므로 아주 피곤한 일처럼 여겨질 수 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모든 요구와 바람에 일일이 다 응해 줄 수가 없으므로
웬만한 바람 정도가 아니라 '절실한 요구들'에 부응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아까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현자는 일종의 매개체로서의 역할만 지속하며,
그 매개체가 지향하는목적이 무엇인지는 참나를 통해서 표현되는 신의 뜻에 의해 드러납니다.
그는 무의식중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에 대한 목격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몸은 살아 있는 인형처럼 계속 작용하며 사람처럼 행도합니다.
그 몸이 요구하는 바는 우주와의 상호 작용에 의해 자동적으로 충족됩니다.
문: '아쉽거나 유검스러운 점' 같은 것은 없나요?
답 : 그런 건 없습니다만, 세상 상람들의 기대와 바람을 충족시켜 줄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는 자각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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