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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열심히 사는 가운데, 병으로 인해 시골로 내려가 요양하던 사람이, 문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로 인해 출입에 커다란 불편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 나무로 인해 집으로 출입하는 데 매우 불편합니다. 저 나무를 치워 주옵소서”라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날마다 집 앞에 있는 나무를 힘껏 밀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루 이틀, 한달 두달 나무를 힘껏 미는 가운데 1년이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꿈쩍도 안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짜증이 잔뜩 섞인 소리로, “하나님께서 나무를 힘껏 밀라고 해서 지난 1년 동안,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눈이 오든 힘껏 밀었는데 어찌, 나무가 치워지지 않았습니까?”라며, 불만불평이 가득찬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즉시, 거울 앞으로 가서 네 모습을 보아라”고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던 사람은 깜짝 놀랐습니다. 1년 전, 병으로 인해 허약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근육이 빵빵하고 건강한 몸으로 변화되었던 겁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기침도 언제부턴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자신은 단지, 나무가 치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순종했는데, 자신이 소망했던 결과는 아니지만, 그 보다 훨씬 좋고, 근원적인 것이 해결되었던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진자리에서나 마른자리에서나 한결같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칭찬한 내용입니다. 로마 옥에 있는 사도 바울의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빌립보 교인들은, 자신들 중 한 사람을 대표로 선출해서 사도 바울에게 보냈는데, 그가 바로 “에바브로디도”였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에게 와서 열심으로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인들은 걱정했습니다. 또, 자신으로 인해 빌립보 교인들이 걱정한다는 소식을 들은 에바브로디도 역시, 빌립보 교인들에게 염려를 끼쳤다는 것으로 인해 근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의 병을 치료하셔서, 그가 건강을 회복하자 사도바울은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냈습니다. 이때, 편지 한 통을 써서 보냈는데, 그것이 본문이 기록된 “빌립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를 원하여, 그 모델이 될 세 사람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 자신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였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과 디모데는, 오늘날 목회자와 같은 직분자였지만, 에바브로디도는 평신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 열심으로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도 본문의 에바브로디도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위해 충성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5절을 보시면,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가 맡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마련한 물질을 사도 바울에게 전하며, 사도 바울의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이 있는 곳으로 파송하면서, 끝까지 바울 곁에 머물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에바브로디도가 도중에 빌립보로 돌아왔습니다. 뜻밖에 돌아온 그를 보면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의아하게 여겼을 겁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맡은 일에 충성하지 않았기에, 사도 바울이 못마땅하게 여겨서 그를 돌려보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이와 같은 그릇된 생각을 하지 않도록, 본문에서, 에바브로디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칭찬했습니다. 그 칭찬의 첫째는, 그를 “나의 형제”라고 부른 것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과 함께 신앙을 공유하던 자였습니다. 둘째는, 그를 “함께 수고하고”라고 했습니다. “함께 수고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쉬네르곤”입니다. 이는, “동역자”라는 의미입니다. 동역자는 복음 증거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동역자”라고 칭한 겁니다. 이것은 에바브로디도가 사도 바울을 도와, 로마에서 복음 전도를 위해 수고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이어, 그를 “함께 군사된 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본래 “전우”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대적자들과 계속해서 싸우는 일꾼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에바브로디도가 사도 바울과 함께 고난당했음을 알려줍니다. 여러분, 평소에는 주변 성도들과 목회자와 절친하게 지내다가도,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꽁무니를 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목회자와 함께, 그리고 주변 성도들과 함께, 교회의 어려운 문제와 싸워 승리하는 성도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셋째는, 사도 바울이 그를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명을 받고 보냄을 받은 일꾼 즉, “섬기는 자”라는 겁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로부터 바울의 필요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보냄을 받은 자로 그 사명을 충실하게 완수 한 자입니다. 그러기에, 에바브로디도는 성도된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귀감이 됩니다. 그는 교회사에서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성도로서의 자기 임무에 충실함으로, 사도 바울의 사역과 복음 전파에 크게 공헌을 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된 우리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하여, 하나님께 칭찬듣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그의 형제, 그의 동역자, 그의 전우라고 부르면서 그를 높였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의 사자로 바울 곁에서, 바울의 여러 가지 필요들을 잘 도왔음을 인정하며 칭찬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는 각자가 다르고, 그 분량 역시, 다섯이 아닐 수도 있고, 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저, 한 달란트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각자가 맡은 일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달란트의 개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받은 달란트에 대한 충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에 대한 충성과 그를 향한 우리의 달음질과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며, 예수님께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7절을 보시면,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근심을 허락지 않으십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심각한 병에 걸린 겁니다. 이로 인해,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디도를 걱정했습니다. 또, 에바브로디도가 병으로 인해 죽게 되었기에, 사도 바울이 그를 돌려보낸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를 죽을병에서 고쳐주셨다는 겁니다. 이로 인해, 본문의 후반부를 보시면,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하나님의 긍휼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뿐만 아니라, 자기도 긍휼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것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든 것에 대해, 사도 바울이 심히 근심했고 또, 빌립보 교인 역시 심히 근심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를 치료하심으로,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의 근심이 사라진 겁니다. 이것이, 성도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치유과정에 대해, 사도 바울은 어찌,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치유과정보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과 에바브로디도에 베푸신 긍휼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주의 사역에 헌신하는 종들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에바브로디도의 치유로 말미암아 깊이 깨달았음을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감당치 못할 근심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근심 걱정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애 3: 33을 보시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된 우리가 근심 걱정 염려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을 때, 근심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나 에바브로디도, 빌립보 교인들 모두가 각각 자기 일에 충실하며, 또한 주변 성도들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의 몸보다 교회를 먼저 걱정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이 병든 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질까봐, 하나님의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할까봐 매우 걱정 근심했습니다. 이렇게, 에바브로디도는 자신보다,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더욱 사랑한 자였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의 삶 자체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성도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비 기독교인이 우리를 보고 살아계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계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 모두가 본문의 에바브로디도처럼, 귀한 신앙을 가지고 신앙에 있어서 모범되어,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에 충실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9 - 30절을 보시면,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에게 에바브로디도는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두 가지 방법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했습니다. 첫째는, “주 안에서”입니다. 그들은 주를 대하는 심정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했습니다. 또,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에바브로디도를 탓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는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했습니다. 둘째는,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하게 여겨야 했습니다. 비록, 그들로부터 사도 바울에게 보냄을 받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사명을 충성으로 완수한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하게 대우해야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이 있는 로마에서, 빌립보 교인들을 대신해서, 사도 바울의 옥바라지와 섬김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 충성했습니다. 그러기에, 빌립보 교인들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며, 그를 존귀히 여겨야 했습니다. 그럼, 본문 29절 후반부의 “이와 같은 자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바로 그 앞에 나오는 “에바브로디도”를 말합니다. 지금껏 본문을 통해 살펴본 에바브로디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로, 에바브로디도는 그가 맡은 일에 충성한 자였습니다. 둘째로, 에바브로디도는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자였습니다. 셋째로, 빌립보 교회가 존귀히 여겨야 할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도 본문의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작든 크든, 그 분량이나 인지도를 따지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존귀한 자라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