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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40대 중반 직장인이고, 고엔카 위빠사나를 몇 차례 수료하며 명상을 접했습니다. 고엔카 스타일로 앉아서 알아차림을 하다보니 몸이 심하게 뒤틀려있고 불균형한 게 느껴지고 괴로워서 깊게 들어가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후로는 1년 반 정도 하타 요가를 하면서 알아차림을 했는데 균형이 조금 잡히고 몸도 편해지고 알아차림도 좀 더 일상에서 이어갈 수 있다고 느껴집니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몸이나 척추의 불균형 지나친 굳음 이런 것을 풀어주는 것이 수행에 중요한 것 아닌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불교 수행에선 이런 것에 대해 별로 언급을 안 하는 것 같아서요) 또 저처럼 이런 동작 자체를 알아차림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는 것이 올바른 방향인가 궁금합니다.(신념법이나 수념법으로 요가 아사나 수행이 포섭되는가)
이런 의문이 든 가장 큰 이유는 저의 개인적인 신체적 불균형 때문이지만 두번째 이유는 명상 센터의 오랜 명상을 하신 지도자 분의 척추가 눈에 띌 정도로 옆으로 휘어져있거나 앞으로 굽어져 있는 것을 보고 앉아서만 알아차림 하는 것에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리하자면
1. 불교에선 수행을 하는데 있어 몸의 불균형을 바로잡거나 몸을 어느정도 정리하는데
재가자들에게 크게 언급을 안하는 느낌인데 왜 그럴까
2. 몸의 불균형을 바로잡거나 정리하는 것 자체에 알아차림을 하는 하타 요가같은
방식도 불교의 수행법에 부합하는가(신념법? 수념법?)
답변입니다.
말미에서 질문을 두 가지로 정리하시긴 했지만, 앞의 내용 중의 질문도 포함하여 인용하면서 답하겠습니다.
질문: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몸이나 척추의 불균형 지나친 굳음 이런 것을 풀어주는 것이 수행에 중요한 것 아닌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불교 수행에선 이런 것에 대해 별로 언급을 안 하는 것 같아서요) [= 1. 불교에선 수행을 하는데 있어 몸의 불균형을 바로잡거나 몸을 어느정도 정리하는데 재가자들에게 크게 언급을 안하는 느낌인데 왜 그럴까]
답변: 불교의 좌선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몸이나 척추의 불균형 지나친 굳음 이런 것을 풀어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선원의 스님들 중에는 요가를 하는 분도 계시고, 개인적으로 다양한 준비운동을 한 후에 좌복 위에 앉아서 가부좌 틀고 수행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요가나 조깅, 체조 등으로 몸의 균형을 회복한 후 좌선 수행에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 수행의 목적은 '호흡을 보거나, 좌복 위에 앉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 인생과 우주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의문'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굳이 방석 위에 앉거나 호흡을 관찰하지 않더라도, 항상 이런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면서(止와 觀,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병행)' 살아갈 경우, 불교 수행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의자 위에 앉든, 이불 위에 눕든 이런 종교적, 철학적 의문들을, 불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불교 수행입니다. 이런 종교적, 철학적 추구가 순수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재물욕이나 음욕, 분노나 질투와 같은 동물적 감성에서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는 선(禪) 수행의 삶과 계율을 지키는 윤리적 삶을 병행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처음에는 시체를 보게 하셨습니다. "나도 반드시 저렇게 된다."는 점을 자각하여, 정신이 번쩍 들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스님들의 '집단 자살 사건'을 겪으시고(<사분율> 도입부 참조), 호흡을 관찰하는 온건한 방식으로 수행을 시작하라고 권하시게 된 것입니다.
질문: 또 저처럼 이런 동작 자체를 알아차림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는 것이 올바른 방향인가 궁금합니다.(신념법이나 수념법으로 요가 아사나 수행이 포섭되는가) [= 2. 몸의 불균형을 바로잡거나 정리하는 것 자체에 알아차림을 하는 하타 요가같은 방식도 불교의 수행법에 부합하는가(신념법? 수념법?)]
답변: 요가 수행을 할 때는 신체 동작(āsana, 좌법 )마다 자신의 몸에서 힘을 주고 있는 부위에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신념법(身念法)이나 수념법(受念法) 수행은 요가의 신체 집중과 그 목적이 다릅니다.
종교로서의 요가 수행은 아래와 같은 8단계의 과정으로 정리됩니다. (출처: 경주 동국대 '인도 사상과 문화' 강의 노트)
통제되지 않은 욕망과 감정에서 일어나는 산란심을 제거
1. 제계(制戒, yama) - '불살생, 진실, 불투도, 불음(不淫), 무소유'의 윤리를 준수한다.
2. 내제(內制, niyama) - 내외의 청정, 만족, 고행, 학습, 최고신에의 전념
신체로부터 발생하는 교란을 제거
3. 좌법(坐法, āsana) - 몸을 안정시켜서 부동의 상태로 만든다. (12좌법, 84좌법)
4. 조식(調息, prāṇāyāma) - 흡기와 호기의 흐름을 무화한다.
5. 제감(制感, pratyāhāra) - 마음을 감각 대상과 단절시킨다.
동일한 대상에 대해 행한다 - 총제(總制, saṃyama)
6. 응념(凝念, dhāraṇā) - 지속적으로 한 대상(배꼽, 심장, 코끝 등)에 마음을 집중하려는 노력
7. 선정(禪定, dhyāna) - 응념 시 선택한 대상을 계속 주시하는 상태
8. 삼매(三昧, samādhi) - 선정의 대상만 남고 자신은 사라지는 상태
이를 8지요가라고 부릅니다. 질문에서 말씀하신 '하타 요가'의 '동작'은 이 가운데 '3. 좌법(坐法, āsana)'에 해당합니다. 요가 수행에서는 '집중력'을 훈련하여 궁극적으로 '8. 삼매(三昧, samādhi)'에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질문에서 거론하신 '신념법'과 '수념법'은 불교의 사념처(四念處) 수행에 속하는 것으로 그 목적이 요가와 다릅니다. 불교가 요가 등 다른 종교와 차별되는 점은 '사성제(四聖諦)'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성도(成道)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싯다르타 태자는 보리수 아래 앉아서 수행하다가, 새벽에 '고, 집, 멸, 도'의 사성제를 발견함으로써 누진통이 열리면서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불교가 불교인 이유는 '사성제'에 있습니다. 사성제 전체를 통찰해야 지적인 깨달음인 견도(見道)에 올라서 수다원의 성자(聖者)가 됩니다.
질문에서 거론하신 '신념법'과 '수념법'은 사념처(四念處) 가운데 '신념처'와 '수념처' 수행에 해당하는데, 사념처 수행은 '고, 집, 멸, 도'의 사성제 가운데 '고성제' 한 가지에 대한 통찰일 뿐입니다. 설일체유부의 교학에 의하면 사념처 수행은 '별상념주(= 별상념처)'에서 시작하여 '총상념주(= 총상념처)'로 완성하며, 사념처 수행이 완성되면 '난(煖), 정(頂), 인(忍), 세제일법(世第一法)'의 사선근(四善根) 수행에 들어가서 사성제의 고, 집, 멸, 도 낱낱에 대해 분석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선근 수행이 완성되면 드디어 고, 집, 멸, 도 사성제를 직관하는 견도(見道)에 오르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습니다.
질문에서 사념처 가운데 '신념법'과 '수념법'을 거론하셨는데, 먼저 사념처에 대한 '별상념주' 수행은 '신, 수, 심, 법'에 대해서 차례대로 '부정, 고, 무상, 무아'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신체(身)은 더럽고(不淨), 모든 느낌(受)은 궁극적으로 고통(苦)스러운 것이며, 마음(心)은 매 찰나 변하며(無常)하고, 오온 등의 낱낱의 법(法)들은 실체가 없다(無我)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질문에서 거론하신 신념법 수행의 목적은 "나와 이성의 몸이 더럽다는 것을 자각하여 몸에 대해서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시체가 되어 냄새가 진동하고 썩어 없어질(屍觀, 시관) 고기덩어리의 몸이며, 지금도 배 속에는 더러운 똥과 오줌이 가득하고, 해골과 뼈가 살덩이를 받치고 있는(백골관) 더럽고, 흉칙한 것이 몸이라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 '신념법'의 목적입니다.
또, 질문에서 거론하신 수념법 수행의 목적은 모든 느낌(수[受])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라는 점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우리의 삶에는 고통(고)도 있고, 즐거움(락)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착각입니다. 고통은 그대로 고통이지만, 즐거움 역시 궁극적으로 고통이라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 '수념처' 수행의 목적입니다. 저녁에 잠에 들 때, 이불을 깔고 가장 안락한 자세를 잡아도 30분 정도 지나면 몸이 배기고 불편해서 그 자세 그대로 고통이 됩니다. 그래서 자세를 바꾸면 다시 안락해집니다. 그러나 30분 지나면 ...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은 모든 안락은, 그것에 그대로 안주할 경우 반드시 고통으로 변합니다. 이런 통찰이 깊어지면 수념처 수행이 완성됩니다.
심념처 수행은 우리의 마음이 한 곳에 머물지 못하며 항상 요동한다는 점(무상)을 자각하는 것이고, 법념처 수행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을 이루는 구성요소로서의 법들이 모두 실체가 없다(무아)는 점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사념처 수행이 초기불전의 가르침이긴 하지만, 법념처 수행의 경우 많이 부족합니다. "색, 수, 상, 행, 식의 낱낱 법에 실체가 없다."는 생각을 떠올리거나 말로 외친다고 해서 '법 무아'의 통찰이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대승의 반야경이 출현하여 법공 사상을 천명하고, 용수의 <중론>을 통해 어째서 낱낱의 '법'에 실체가 없는지, 논리적으로 구명하는 것입니다. 법념처 수행의 목적인 법무아를 완전히 체득하려면, 초기불전이나 아비달마 교학보다 중관학의 가르침에 의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총상념주' 수행은 이들 '신, 수, 심, 법'의 4가지 대상을 한 몫에 묶어서 '무상, 고, 공, 무아'라고 통찰하는 것입니다.
질문에서는 사념처 수행 가운데 '신념법'과 '수념법'만 물으셨지만, 불교 수행론 전체에서 이들 수행이 차지하는 위치와 이들 수행의 목적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사념처 수행 전체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렸고, 사념처 수행 역시 완벽한 게 아니라, 사성제 통찰 가운데 1/4인 고성제 하나에 대한 통찰일 뿐이라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성제 수행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고성제에 대한 통찰인 사념처 수행에 덧붙여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 각각에 대해서도 4가지 방식으로 통찰해야 하는데, 이를 모두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서 보듯이 사념처 수행은 사성제 가운데 고성제에 대한 통찰(노란 색 바탕)에 해당하며, 사념처 수행이 완료된 후에도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에 대한 분석적 통찰을 계속해야 해야 사성제에 대한 통찰이 완성됩니다. 그리고 질문에서 말씀하신 신념법(붉은 글씨)과 수념법(파란 글씨)은 사념처의 4가지 수행 가운데 일부입니다.
어쨌든 불교의 신념법과 수념법은 사성제를 직관하기 위한 준비 수행에 들어가며, 신념법의 목적은 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수념법의 목적은 즐거운 느낌이라고 해도 궁극적으로 고통으로 변하기에 모든 신체적 느낌은 고통이라는 점을 자각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냥 몸을 알고(신념), 느낌을 알기(수념)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위에서 간략히 언급했듯이, '하타 요가'의 '동작'의 '3. 좌법(坐法, āsana)' 수행에서 몸과 느낌에 집중하는 것은, 그 목적이 궁극적으로 요가적 삼매에 이르기 위해서 '집중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질문에서 "이런 동작 자체를 알아차림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는 것이 올바른 방향인가"라고 물으셨는데,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불교의 신념법은 몸이 더러운 것임을 알아서 몸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리는 것이고, 수념법은 쾌락을 포함한 모든 느낌이 고통임을 알아서 더 이상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요가 수행과 그 목적이 다르다고 보겠습니다.
물론 요가 수행의 집중을 통해, '일상 생활 속의 심리적 어려움 정도'는 쉽게 극복되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불교 수행의 경우, 그 목적이 '일상의 행복한 생활'이 아니라, '다시는 생명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 열반'이라는 점에서 요가 수행과 그 목적을 달리 합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상세하고 정성스러운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궁금하던 것이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저에게 알맞고 적절한 길을 찾아 계속 나아가 보겠습니다.
무한한 자비심이 아니면 이렇게 폭넓고도
깊이 있는 가르침을 하실 수 있으실까요.
요가의 언저리도 못가보았지만 척추가 살짝 비틀어진 관계로 질문을 읽고, 교수님의 답변을 읽다가...
'보리도차제론'의 상사도 수행자이십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이 판 치는 세상에서 경전에 의거한 가르침을 다시 볼 수 없음이 안타깝네요.
그 분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