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첫사랑의 하늘 아래서
고은하 세실리아 수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버스에서 내려 발이 땅에 닫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폭우에 신발과 옷 끝이 젖기 시작한다.
드디어 이승훈 베드로 성지에 갈 수 있다며 손꼽아 기다려온 설렘이 우산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다.
‘인천교구 순교자 현양대회’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다.
뻥 뚫린 하늘을 향해 행사장의 중앙 좌석들은 일찌감치 텅 빈 마음으로 쏟아지는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고 있고,
건물 기둥 아래로 옹기종기 모여든 사람들만이 장단 없는 아우성으로 웅성거린다.
굵은 비는 짙은 구름을 내 세워 그칠 기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주기도가 장대비를 벗 삼아 방울방울 노래가 되어 하늘에 울려 퍼지며 행사는 시작되었다.
소리만큼은 빗소리에 양보하지 않으리라는 우리들의 순교 의지와 결의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우렁찬 목소리가 하나 되어 더 구슬피 묵주기도를 외쳐 부른다.
매괴의 고리가 한 올 한 올 엮여 다발이 되고 하늘에 올려질 때마다
지치지 않는 기도의 노랫소리에 먹구름이 잠시 넋을 잃은 걸까.
하늘의 자리를 뜨지 않은 먹구름이건만,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묵주기도의 끝자락에 비가 멎는 것이 아닌가.
미사가 시작되고, 주교님께서 사제단과 입당하시고
“여러분의 묵주기도에 비가 멎었습니다.”라는 주교님의 첫 말씀이 울려 퍼지자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터져 나오는 기쁨의 함성과 박수를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로 올려드렸다.
그 하늘이 폭염주의보가 된 어느 오후.
복잡한 마음을 달래러 무작정 나선 길은 다시 이승훈 베드로 성지였다.
인적 드문 길 위에 살인 더위라는 죄명답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각오라도 하라는 듯
땀과 끈적임으로 나를 무장시키고,
묘를 향해 올라가는 십자가의 길은 만만치 않은 인생길을 다시금 하나하나 새겨주었다.
각 처에 저마다 작가의 섬세한 손길로 표현된 예수님의 수난이 더 애잔하게 마음에 파고드는 시간.
도착한 묘에는 참수로 생을 마감한 이승훈 베드로의 넋이 진토되어 있었다.
넘어지고 일어서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이 아파하고 힘들었을까.
‘헛살았구나’ 싶은 절망이 마음을 짓누르는 날.
참수의 길을 선택했던 이승훈 베드로의 용기가,
십자가의 길에 서 수없이 넘어졌을 주님께서 신음 속에 다시 일어 서시는 소리가
오늘 나를 울리며 다시 걷게 하신다.
순교자 현양대회 날 장대비가 미사 시작과 함께 그쳤을 때, 내가 감동에 차서 말했었다.
“하느님께서는 인천교구를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이렇게 비가 멈추다니….”
“하느님께서 인천교구를 많이 사랑하셨다면 비가 오지 않았어야죠.”
단호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뒤통수를 칠 때 나는 소리 없이 두 손을 모으며 내 마음을 띄웠다.
“그랬다면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감동과 기쁨의 환호성은 미지근했을 거예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듯
한국교회의 선구자로 뽑아 교회의 모퉁잇돌로 세우시며
첫 세례를 베푸신 이승훈 베드로.
국내에서 우리 수도회의 첫걸음이 시작된 곳,
인천교구는 하느님의 첫사랑으로 빛나고 있다.
이곳에서 소임을 할 수 있음이 내겐 얼마나 큰 감동인지.
참수 날의 하늘이 천상의 문이 되어 열리고 오늘의 하늘이 되어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한결같이 흐르고 흘러 눈부시게 빛나 오늘에 이른 하늘이 순교의 넋을 기리고 있었다.
그와 같은 하늘 아래로 나를 부르신 하느님.
인생의 장맛비도 폭염도 맛깔스럽게 지나갈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대 상 : 고은하 세실리아 수녀(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답동 주교좌 성당 소임)
연중 제31주일 주보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