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2,18-25; 마르 7,24-30
+ 오소서 성령님
하느님께서 피조물 하나하나를 창조하시면서 보시니 “좋았다”고 하였는데, 오늘 ‘좋지 않다’고 하신 것이 처음 등장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협력자를 만들어 주시는데, ‘협력자’로 번역된 말은 ‘에제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아자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인데요, ‘아자르’는 ‘돕다’라는 뜻도 있지만, ‘구하다’ ‘구조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인간은 서로를 돕는 존재이지만, 서로를 외로움에서 구해주기 위해 파견된 존재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 위에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십니다. 여기서 ‘갈빗대’라고 번역된 말은 그냥 ‘옆구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신체의 어느 특정한 기관에서가 아니라, 또 신체의 위나 아래가 아니라 옆에서, 동등한 관계로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여기서 남자와 여자는 히브리어로 ‘이쉬’와 ‘이샤’인데요, 다른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단어를 쓴 것은 남자와 여자의 동등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뼈’와 ‘살’이 함께 나오는 경우가 구약성경에 몇 차례(창세 29,14; 판관 9,2; 2사무 5,1; 19,13) 등장하는데, 주목할 구절은 사무엘기 하권 5장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몰려가서 “우리는 당신의 골육입니다.”(5,1)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직역하면 “우리는 당신의 뼈요, 당신의 살입니다.”인데요, 이 말은 모든 지파가 다 혈육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충성에 대한 서약으로서,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과 연관하여 보면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라는 아담의 말은,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 앞에서 계약에 의해 맺어지는, 성실한 관계라는 의미입니다. 혼인 서약 때 신랑과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서약합니다. “나는 당신을 아내로/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뼈’는 강함을, ‘살’은 약함을 의미한다면,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라는 말은, ‘내가 강할 때이건, 약할 때이건’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겠다는 약속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제1독서는 아담과 하와가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맺고 있는데, 여기서 알몸은 약함을 의미합니다. 서로의 약함을 감추지 않았고, 서로 그것을 인정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티로’ 지역으로 가십니다. 티로는 오늘날 레바논에 속해 있는데요, 유다인들에게 적대적인 지역이었습니다. 여기서 이교도인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자, 그 여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여기서 ‘빵’이라는 단어, 그리고 ‘먹는다’라는 단어에 집중해 봅니다. 앞서 마르코 복음 6장은 세례자 요한을 처형하는 비극으로 끝을 맺는 헤로데의 생일잔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눔의 자리여야 할 잔치가 살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뒤이어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심으로써 참된 잔치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이어서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예수님의 논쟁이 이어졌고,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한 음식이 유다인을, 부정한 음식이 이방인을 상징하던 당시의 통념을 무너뜨린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빵’을 주제로 한 이방 여인과의 대화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실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베푸셨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이방인들에게도 베푸시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을 유일하게 ‘주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만의 주님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주님이심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느 기적보다 중요한 장면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이방 여인과의 언쟁에서 지신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유다인 남자가 이방 여인과 종교적 논쟁을 하면서 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 주십니다.
자신의 약점을 가리기 위해 온갖 폭력적인 수단까지 동원하고 있는 시대를 목격하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사람에게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동등한 관계에서 마음을 열고 대화하며, 상대방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동의해 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