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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
- 설교 : 김강산 목사 (은혜와평강교회)
소제의 예물 드리는 법
소제의 예물은 곡물로 드리는 예물이다. 첫 째 예물의 종류는 고운 가루로 드리는 소제하고 그 다음 고운 가루를 요리해서 드리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고운 가루로 드린 소제는 고운 가루에다가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하여 아론 자손 제사장에게 가져오면 된다.
그 다음 고운 가루를 요리해서 드리는 소제가 있다. 요리하는 방법에 따라서 화덕에 구워서 드리는 소제가 있고 그 다음에 번철에 부친 것으로 드리는 소제가 있고 솥에 삶은 것으로 드리는 소제가 있다. 요리하는 방법을 따라서는 화덕에 구운것 번철에 부친것 그 다음에 솥에 삶은 것이다.
첫 째 화덕에 구운것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난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으로 드린다. 번철에 부친것은 고운 가루에다가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다 기름을 부어드린다. 솥에 삶은 것으로 드릴때는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서 만들고 그 위에 유향을 부어 드릴것인데 그 말은 빠져있다.
여기 약간씩 차이가 나는 것은 약간씩 차이 나는 데서 전체를 표현할려는 것이지 제사드리는 방법이 달라서 차이나게 기록된것은 아니다.
가령 누룩을 넣지 말라 그 말은 화덕에 구운것도 누룩을 넣으면 안되고 다 안되는데 이것을 여기저기 제사에서 끼워둬서 전체를 알 수 있도록 된 것이지 제사드리는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다음 드리는 순서다. 그러니까 제일 앞에 있는 것이 소제의 종류 그것과 대등한 자리에 있는 것이 드리는 순서다. 소제의 예물의 종류에서 조금 작게 나누어서 고운 가루로 드리는 것과 고운 가루를 요리해서 드리는 것 두 경우로 나누는데 요리하는 방법을 따라서는 화덕에 구운것 번철에 부친것 솥에 삶은 것 그렇게 드린다 그 말이다.
소제의 종류가 큰 단락이고 그 단락에 일치되는 것이 드리는 순서다. 그리고 그 밑으로 내려오면 소제물의 몫이 있지요. 그리고 더 내려오면 소제물에서 금지된 것 그 다음에 소제물에서 빼지 못할 것 첫 이삭의 소제 이것이 같은 계열에 있어야 좋다.
그리고 소제 예물의 종류에 따라서 이제 더 작은 단락으로 나누면 고운 가루로 드리는 경우와 고운 가루를 요리해서 드리는 경우가 있는데 고운 가루로 요리해서 드리는 경우를 또 나누면 화덕에 구운것 번철에 부친것 솥에 삶은 것 이렇게 된다 그 말이다.
1. 소제 예물의 종류
1) 고운 가루로 드리는 소제
2) 고운 가루를 요리해서 드리는 소제
(1) 화덕이 구운 것
(2) 번철에 부친 것
(3) 솥에 삶은 것
2. 드리는 순서
3. 소제물의 몫
4. 소제물에서 금지된 것
5. 소제물에서 빼지 못할 것
6. 첫 이삭의 소제. 그 다음에 해석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 하면서도 가능하면 성경이 기록된 순서를 따라서 하는 것이 제일 좋다. 가령 화목제를 보면 먹는 문제가 강조인데도 3장에 보면 먹는 문제는 일체 언급이 안되어 있고 먹는 문제는 7장으로 옮겨가서 기록이 되어있다. 그러면 7장에 있는 것을 3장으로 끌어와서 해석을 하면 3장을 기록한 목표가 없어져버린다.
그러니까 소제물에서도 본문에 기록된 순서대로 하면 좋다 그 말이다. 왜 그러나면 6번 첫 이삭의 소제를 앞으로 옮겨버릴 수 있지 않겠어요? 소제물의 종류이니까.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다. 그 말이다. 이 본문이 기록한 순서대로 놓고 해석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 말이다.
2번 드리는 순서다. 아론 자손 제사장은 기름 가루 한 줌과 모든 유향을 기념물로 단의에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로 드린다. 그리고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의 몫이며 이것은 소제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다.3번 소제물의 몫과 겹치는 감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드리는 순서에다가 함께 넣었다. 왜냐하면 본문이 그런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넣었다. 그래서 기름가루 한 줌과 모든 가루는 기념물로 단위에 불살라 하나님앞에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 몫이다.
3번 소제물의 몫이다.
2번과 겹치겠지요. 기념할 것을 취하여 단위에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고 기념할 것은 여호와의 몫인데 전체로 태워드리는 것이다. 남은 것은 아론 자손의 몫이고 소제중에서 지극히 거룩하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 소제물에서 금지 된것은 무엇이냐? 소제물의 종류를 말하고 제일 뒤에 이것은 붙어 있는데 금지된것은 누룩을 넣지 말라 그리고 누룩이나 꿀은 초생물 6번에 있는 첫 이삭처럼 초생물로는 하나님앞에 드리지만 향기로운 냄새를 위해서는 드리지 말아라 그렇게 되어있다.
그 다음 소제물에 빼지 못할 것이 있는데 소금을 치라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이스라엘 자손의 소제물에 빼지 못할 것이다 모든 예물에 소금을 치라 그렇게 되어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소제물에 소금을 쳐야한다. 이 소금은 언약의 소금이다 그러면 될것인데 성경 본문은 소금을 쳐라 언약의 소금을 빼지 말아라 모든 예물에 소금을 치라 이런 식으로 되어있다.
처음에는 소제물에 대해서 소금을 치라 해놓고는 나중에는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말로 결론 되어 있다.
첫 이삭의 소제는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을 드린다.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한다. 제사장은 찧은 곡식 한줌쯤 기름 얼마 그리고 모든 유향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린다. 그렇게 되어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누가 먹어라 그런 말은 없지만 일부 기념물만 하나님 앞에 드린다.
일단은 그 본문이 기록된 순서대로 문학적인 구조를 따라서 보고 그 내용이 그 문장 자체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일단 봐야 한다. 그리고 나서 이것이 옛 언약 역사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고 그 다음에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는 어떤 의미로 교회에 주어진 것인지를 선언하면 성경이 그리스도의 책으로 해석이 되는것이다.
소제의 예물을 고운 가로로 드린다.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해서 드린다. 고운 기름가루로 만든 음식의 일부를 기념으로 여기서 만든 음식 그랬는데 한꺼번에 포함된 말이다. 가루로 드리든지 만들든지 음식 일부를 기념으로 여호와께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고 유향은 전체로 불살라 드린다. 남은 것은 아론 자손 제사장의 몫이며 지극히 거룩하다. 제사장의 소제는 전체로 여호와께 화제로 불살라 드린다. 제사장의 소제 문제는 여기서는 안 나온다. 그래도 설명하기 위해서 이것을 가져 온것이다.
예물을 먹는 문제에서 제사장의 예물이 나오는데 여기서 설명하기 위해서 끌어 온것이다. 이것이 본문에 기록된 내용이다. 본문을 요약하면 이 말이다. 그러면 이것이 그 당시 구원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고운 가루는 극 상품 곡식이다. 그리고 기름은 생명의 충만함을 말한다. 기름진 것 그리고 여기서는 기름을 붓도록 했고 유향은 다 살라서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하라 다 사르는데 유향의 핵심이 있다.
그러니 유향은 향기로움을 나타낸다. 예물 자체를 태워도 향기롭지만 거기다 유향을 더해서 태우니가 그 향기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제물에서는 향기로움 그것이 강조가 되는 것이다. 향기로움을 강조한다. 유향 전체를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 드리는 것이 소제 예물의 특징이다. 다 태워서 드린다는 말로 태워서 향기롭게 한다는 것이 특징이지만 거기다 유향은 전부를 태워라 다른 예물은 한움큼 기념물을 태우는데 유향은 전부를 태루라 그랬다. 기념물을 태워도 향기가 되는데 유향, 향내나는 것 전체를 태우는 것은 그 향기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소제물의 특징은 무엇이냐. 유향을 전체로 태워서 향기롭게 해라 하는 것이 강조점이다. 유향과 제사장의 소제는 전체를 여호와께 화제로 드린다. 번제에서는 피를 단에 뿌리고 여호와의 식물인 모든 기름은 화제로 드려 향내나게 하였다. 그러면 다른 제사하고 비교를 해보면 이 앞에 배운 번제를 보니까 번제는 전체를 태워 드렸다.
그리고 화목제 같은것을 보면 기름을 다 태워 드린다. 번제물은 전체를 다 태워 드린다가 강조가 있었고 화목제는 기름은 태워 드린다. 그것이 화목제의 강조점이다. 그런데 소제물에서는 기념물을 태우고 유향을 전부 태워 드린다는 것이 강조점이다.
그러면 여기 전부 태워드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번제를 보니까 온 몸을 다 태워 드린다. 화목제를 보면 기름은 다 태워 드린다. 그러니까 전부 태워 드린다는 것은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유향을 전체로 태워 드린다. 물론 기념물을 태워 드린 것도 그런 의미로 유향을 전체로 태워 드린다는 것하고 일치가 된다. 왜 그 기념물과 함께 그 유향 전체를 태워 드리니까 기념물을 한 움큼이어도 전체를 태우는 유향과 같은 의미가 있다. 그 말이다.
그러면 번제를 보면 피는 단에 뿌리고 또 여호와의 식물 여호와께서 먹을 수 있는 기름은 하나님 앞에 전체를 태워서 향내가 나도록 했다. 전체를 사르는 소제의 유향은 번제의 기름에 해당되고 몸을 전체를 사르는 거기에 해당이 된다. 번제의 생명의 온전한 헌신을 강조하고 소제는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삶을 강조한다. 번제는 전 몸을 태워 드렸다. 전체를 태워 드렸다. 그것은 전체를 태워드린다는 온젆나 헌신에 강조가 있다.
그런데 소제는 전체를 드린다는 것이 강조가 아니라 향내를 나게 한다는 것이 강조다. 그런데 향내는 무엇이냐? 이것은 곡물 제사를 향내나게 했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의 농군 하나님의 일꾼이다. 모든 농토는 하나님의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 소작농식이다. 그러니가 그들은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삶을 강조한 것이 소제의 예물이다. 그러니까 그냥 영해 할려고 하지 말고 비교해 보면서 그 당시 가나안 땅의 삶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도록 복주시고 땅을 경계로 나누어서 기업으로 주셨고 그리고 그들에서 먹을 수 있는 식물로 소나 양들을 주셨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을 자기 백성에게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중에 극상품을 집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하나님의 상에서 드리고 먹도록 하셨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 밖에서 먹는 것은 부정에 쌓여서 먹었고 죽음에 쌓여서 먹었다. 왜 먹을 일부 정한 것뿐이고 전부 부정하다. 그 일정한 것만 먹으면 정하고 하나님이 부정하다고 한것을 먹으면 그들은 부정한 자로 진 밖으로 나가야 된다. 왜 먹는 것과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이 일치하니까 나가야 된다.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것도 스스로 죽어버리면 부정하기 때문에 왜 죄의 권세가 있고 죽음의 권세가 있다.
그것은 죽어있는 이방인은 먹어도 되지만 하나님과 생명읭 교제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먹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소로 가지고 들어왔는데 성소에는 보니까 성소 밖에서 주는 식물보다는 더 고급이다. 극상품에다 완전히 기름범벅을 한 곡물요리 튀김요리다. 그리고 하나님은 동물을 잡아도 기름만 잡수신다. 건강법으로는 최고로 나쁜 것만 잡수신 것이다. 건강법으로 해석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주는데 이것이 번제에서는 식물로 준것이 아니고 화목제에서도 먹으라는 말은 아직 안나온다.
예물 먹는데서 화목제의 먹으라는 말이 강조도지 3장에서 아직 안 나온다. 그러데 2장에서는 이 나머지 것이 아론 자손 제사장의 지극히 거룩한 음식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는 어떤 의미로 지극히 거룩한 음식이냐. 하나님이 향내를 맡으셨다는 의미로 지극히 거룩한 것이다. 다른 예물을 그렇게 향내 맡지 안했다. 성소밖의 예물을 하나님 앞에 향내하는 예물이 아니다. 그런데 기름에다가 요리해서 하나님의 단에서 불에 태워드리면 그 정결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 흠향하시고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주는데 그것이 지극히 거룩한 음식이다. 하나님이 향내 맡으신 지극히 거룩한 음식이다.
문맥을 따라서 해석을 해야한다.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향내를 맡으셨다는 의미로 하나님이 향내 맡은 음식으로 지극히 거룩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불로 정화해서 향내로 맡은 음식을 아론 자손 제사장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으로 덧입은 아론 자손 제사장에게 주면 그것이 제사장의 식물이다. 아론 자손 제사장은 그것으로 먹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소 밖의 생명과 성소안의 생명은 비교 할 수가 없다. 성소 밖에 있는 생명은 죽음에 쌓였고 부정에 쌓여 있고 일부 밖에 먹지를 못하는데 여기서는 기름지고 극상품을 먹고 그것도 불로 정화되면 하나님이 향내 맡으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음식을 제사장이 먹으니 성소 밖에서 주는 음식과는 전혀 다르다. 이것이 구약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방식이다. 그러면 백성은 제사장처럼 그것을 먹지 못한다. 아직은 대표인 제사장이 먹는데 누구 아론 자손 제사장 이 아론은 ㅊ에서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임명한 사람이고 그 후손들이 먹는다. 그 은혜가 대대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후손에게 상속되는 것이다.
이 아론은 ㅊ에 보면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으로 덧 입고 있는 자다. 성소에 속한 사람이다.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번제는 전체를 태워 드리니까 헌신이 강조고 소제는 향내나는 예물을 드리거든요. 그들은 수고한 열매를 가지고 와서 드린다. 사람이 수고하지 않으면 땅은 가시와 엉컹키를 낼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들의 향내하는 삶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열매 그런 삶을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여호와께 드리고 남은 것은 아론 자손 제사장의 양식이며 지극히 거룩하다. 지극히 거룩함은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음식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다. 이것은 도덕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거룩해서 아무리 단어 풀이 해서도 안된다.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맡으셨다는 의미로 거룩이다. 이것이 제사장에게 주신 양식 곧 생명이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의 극상품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것중에 일부를 나머지를 제사장에게 주어서 이제는 성소 밖에 있는 생명하고는 다른 지극히 생명으로 제사장을 기른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을 통해서 먹으면서 그 완성을 소망하는 교제다. 아직은 백성에게 주어지지 안했다.
누룩을 소제물에 넣지 못한다. 누루과 꿀을 초생물로는 들여도 향기로운 냄새로는 드릴 수 없다고 했다. 누룩과 꿀을 문장에서 같은 값은 가진다. 누룩과 꿀 같은 자리에 있다. 그러니까 거의 같은 계열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 말이다. 그렇게 했을 때 누룩을 죄로 해석하냐 그러면 꿀을 어떻게 하겠어요. 정욕의 단 것 이렇게 해석한다 그 말이지요. 말하자면 누룩을 죄로 해석하면 죄의 확산성 죄가 퍼지잖아요.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꿀은 그 정욕의 단 것 이렇게 해석을 할것이다. 그런데 레위기에서는 지금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소에 계신 하나님이 내 상에 들어와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는 먹는 교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지를 안해요.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과 종교적인 관계를 먹는 식사에서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을 그냥 윤리적으로 막 풀어서 우리에게 적용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누룩을 식사 음식법으로 무엇이냐? 안식의 떡이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때 무교병 고난의 떡을 먹었거든요. 그전에 안식의 떡은 무엇이냐? 바로의 종으로서 안식이었지 하나님의 종으로 안식이 아니었다. 바로의 종으로 살았을 때는 바로의 가마 솥에서 누룩 섞은 부풀을 떡을 편안하게 먹었다. 그 때는 바로의 종 죄의 종으로 살았을 때다. 그것은 참 안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ㅇ을 바로에게서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을 때 그들은 급히 도망 치느라고 고난의 떡을 먹었다.
무교병을 먹는 것이 새 생명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양식이다. 그 때부터 무교병은 죄와 상관이 없는 거룩한 새 덩어리가 되라 하는 윤리적인 의미를 거기서부터 가지는 것이지 직접 윤리를 표상하는 상징법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누룩을 넣지 말고 꿀을 드리지 말아라. 마치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천막에 사신 것은 왜 하나님이 천막에 사셨는가. ㅇ에게 아직 안식을 주지 못했다. 하나님이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않했고 ㅇ이 천막에 사니 하나님도 천막에 사신 것이다. ㅇ에게 가나안 땅의 안식을 주셨을 때 하나님도 요동하지 않는 집은 지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동거하시고 동행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아직 하나님의 상에도 누룩과 꿀을 아직 드려지지 못한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첫것 첫 품목으로는 드릴 수 있어도 향내를 위해서는 드리지 말아라.
소제물과 모든 예물에 소금을 반드시 치라 그렇게 되어있다. 소금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소금을 빼지 말라는 말이 소제물에서 강조된다. 다른 예물에서는 소금을 치라는 말이 나오고 소제물에서 소금 치라는 말이 나오고 제일 끝에서 모든 예물에 소금을 치라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소제물에만 소금을 치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 문장 표현을 보면 소제물에 소금을 빼지 말라 너희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너희 모든 소제물에서 빼지 말라. 모든 예물에 소금을 치라 이렇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다른 예물에도 소금을 칠것인데 다른 예물에 소금을 치라는 말이 안 나오고 이 소제물에서 소금을 치라는 말이 집중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그런데 문명히 소금을 치라고 했으니 소제물을 넘어선 다른 예물에 소금을 치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다른 데서는 그 말이 직접 언급이 안되어 있다. 그러니까 소제물과 소금과는 중요한 관계가 즉 강조되는 관계가 있겠다 그 말이다. 마치 유향 전체를 사르는 것이 소제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처럼 소금을 치라는 말이 하나님 앞에 향내하는 소제물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 소제물에서 소금을 치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는 식이다.
그러면 소제는 기름지고 향기로운 음식의 교제가 강조점이다. 왜 기름 요리를 드리고 향을 드리니까. 기름지고 향기로운 음식의 교제 그리고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성소에서 주셨다. 이것이 소제물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소금은 불변하는 언약의 친교와 맛있는 식탁의 교제를 말한다. 그러니까 이 소금은 어떤 것이겠어요? 소제물 자체의 강조점이 하나님 앞에 기름진 요리를 드리고 향내나는 예물을 드리고 내가 흠향한 이 예물을 제사장 너도 먹어라. 이것이 지극히 거룩한 것이다. 이렇게 했다. 이것은 여러 사람이 먹었다는 것은 아니다. 제사장에게 주었다. 이것은 기쁜 친교가 강조점이다. 그런데 거기다 소금을 치라 그 말은 무슨 짜야 됩니다 하는 도덕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향내나는 음식의 교제 그것과 관계된 의미로 소금이다. 그런데 이것은 언약의 소금이라고 그랬다. 그러면 이 언약은 무엇이겠어요.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향내나는 예물을 맡으신 친교로서 언약이겠지요. 일단 그 근접 문맥에서 잡아야 되지 다른 데서 의미를 가져오면 안된다. 그렇게해서 하나님께서 아주 깊은 친교 기름지고 향내나는 음식을 주는데 그 교제는 아주 맛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안되니까. 언약의 소금이라고 그랬다. 이 언약의 소금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불변하는 약속으로 계속 강조되는 것이다. 일단 여기서는 깊은 친교의 언약이다. 맛있는 친교 기름진 식품 향내나는 식품 그런 의미로 반드시 소금을 치라. 그런데도 아직 누룩과 꿀을 치지를 말아라. 여호와께 향내로는 드리지 못한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 앞에 드리지 못할 것이 없다. 생명이 완성되었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음식을 잡수시는데 있어서 마치 백성이 광야에서 유리하면 마치 하나님이 유리하시는 것처럼 옛 날에 임금들이 백성이 굶으면 자기도 반찬 세가지로 먹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무리 성소에서 극 상품을 잡수셔서 백성에게 안식이 주어지지 않았으면 자기도 안식의 떡을 잡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기록이 되어있다.
여기서 여러분이 알고 있는 종교적인 지식을 끌어 들이면 안된다. 일단 그 문맥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해석을 해야한다.
그러면 이것이 예수 안에서는 어떻게 완성이 되는 것인가? 이것이 드디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차례이다. 그러나 첫 째 문장 구조를 따른 해석 그리고 이것이 그 당시 구원역사에서 의미 이런 것을 빼버리고 그냥 믿는 신자들에게 적용해서는 그것은 본문의 의미가 안된다. 구원역사적인 의미도 안된다. 그러나 아무리 문학적인 구조를 따라서 정확하게 보고 문법적으로 해석해도 그렇게만 풀면 구원역사의 책이 안되고 또 아무리 구원역사에서 그 시대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해석을 해도 예수 안에서 완성된 의미를 선언 못하면 ㅇ의 떡 먹는 이야기지 구원의 축제도 되지도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 해석이 실은 신약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 상에서 먹는 이 말씀을 통해서 먹을 수 있는 복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것이 제자들은 알지 못하는 자신의 양식이다. 예수는 무엇으로 사셨는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자기의 삶이다. 예수께서 죽으실 때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것이 예수의 생명이다.
이처럼 항상 아버지의 뜻을 즐겨 행하시니까 아버지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 그렇게 요한복음에도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그가 아무리 죽음에 던져저도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시는 친교는 끊어지지 않는다. 참 생명의 교제는 끊어지지를 않는다. 그것이 예수께서 사는 삶의 비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 굶으면서 사마리아 여인하고 무슨 말씀하시는고 배고프지요 그랬을 때 나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내 양식이다. 그는 죽음에 처했을 때도 그의 참 생명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부활을 바라보는 신앙이다. 그것이 그의 생명 자체다.
그러니까 항상 아버지께서 그를 기뻐하신다. 그렇게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상에서 먹는 교회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향내하는 제사를 드리는 삶을 산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이렇게 하는가. 단순히 예수의 본을 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앞서 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일을 한다. 제사장이 앞서 가므로 백성이 항상 뒤 따라 간다. 단순한 도덕적인 본이 아니라 그에게 이루어진 것이 우리에게 이루지도록 그가 앞서 가셨다.
만일에 그가 하늘 보좌에 앉지 못했으면 우리들도 고난으로 승리하지를 못한다. 이제 교회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분으로 오셔서 그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제사를 드렸다. 그의 모든 삶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것이 하나님께 향내나는 제사요 그것이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가 우리의 대표자로 그 일을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들에게 주신 생명이다. 그 생명에는 죽음에 그림자가 없다. 아버지와 아들로서 영원히 교제하는 생명이니까. 그가 그렇게 해서 우리의 대표로 보좌에 앉으셨다. 그가 우리의 대표자다. 그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는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제사를 드릴 수 있다. 왜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생명으로 변화됐으니까. 왜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은 땅에 있는 곡물이나 극상품 좋은 가루가 아니고 땅에 있는 기름짐이 아니라 땅에 있는 향내가 아니라 땅에 성소에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늘보좌에서 기뻐하시는 그런 교제의 생명으로 내 살과 피를 머고 마셔라 그렇게 주셨다. 거기에는 참 안식이 있어서 누룩과 꿀을 빼라는 그런 말은 없고 그것은 참다운 소금이 있어서 하나님앞에 영원한 생명의 교제다. 그것은 참으로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참다운 친교다. 아들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 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것이 신약 교회가 누리는 생명의 교제요 헌신의 삶이다. 우리는 그런 의미로 먹고 마시는 모든 삶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향내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의 삶으로 살지 않으면 향내가 될 수가 없다. 구약 때는 아무리 그렇게 먹어도 땅에 있는 성소의 향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안에서 먹고 마시는 우리의 모든 삶에서 우리는 참다운 안식의 떡을 먹고 참다운 하늘의 즐거움 그런 것으로 받는 것이다. 왜 지극히 거룩한 양식 예수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교제를 누리니까. 그것이 믿는 신자의 삶이요 삶의 열매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 되지 그런 믿음으로 살지를 않고 헌금한다고 헌신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생명의 교제를 교회안에 주셨다. 그래야 구약의 말씀이 휘장으로 가리운 교제가 아니라 예수안에서 하늘에 속한 교제를 주시는 하나님의 책으로 교회에 선포되고 교회가 그 복을 받는다. 그러니까 제일 뒤에 것을 빼지 말고 이야기를 해야한다.
도덕적인 거룩은 하나님과 관계의 새로움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만일에 모세 시대 같으면 아무리 거룩하게 살아도 모세의 거룩으로 밖에 못산다. 그러니까 뜻을 이룬다고 해서 막 도덕법으로 절대법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약혼 사람은 약혼관계로 밖에 못 살고 결혼한 사람은 결혼한 관계로 산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관계로 흠향하셨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산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주의 상에 앉아서 먹고 마시는 복이 무엇인지 우리가 그 믿음의 질서로 우리의 모든 삶에서 먹고 마셔야 되고 그 관계로 하나님 앞에 주의 살과 피 즉 그의 몸에 참여하는 생명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드리는 소제물이다.
이런 봉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를 그렇게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이스라엘로 지으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 이것저것 봉사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질문
항상 모세 제도가 설립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변화되고 안 변화되고 문제가 아니라 처음에 언약을 설립한 것이 토대다. 그러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젖과 꿀이 흐르도록 복을 주셨다. 하나님도 안식의 장막에 사신다. 그러면 하나님도 누룩과 꿀을 잡수셔야 맞겠지요. 그런 식으로 하자면 정당한 질문이다. 그렇게 해서 율법이 바꿔져야 되겠지요. 그런데 항상 모세 제도가 토대다. 나중에 보면 등대도 열개 떡상도 열개 굉장히 풍성하다. 그런데도 아무리 풍성해도 항상 휘장 밖에 풍성이다. 그리고 구약 때는 완전한 생명이 성취가 안된다. 그러니까 모세 제도가 토대가 놓아졌으면 그 다음에 꿀을 드려라 그런 말은 없다. ㅇ은 풍성히 먹는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는 드리지 못한다. 그렇게 했을 때는 그냥 완성 됐으니까 꿀도 드려도 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모세제도가 진행이 되어도 항상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서 처음 설립했던 그 토대가 근본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진정 율법의 변혁, 완전한 변화는 예수 오셔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꿀을 설명하느라고 가나안 땅의 안식을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꿀을 설명할 방법이 없거든요. 그래서 ㅇ의 큰 안식은 젖고 꿀이 흐름, 포도나무 아래에서 눈이 붉도록 마시고 이가 희도록 우유를 마시고 이렇게 되면 그들의 안식이고 풍성이다. 그런데 우유드리라는 말도 없다. 그리고 포도주는 드리 붓는 것이 아니고 한잔씩 놓는 것이다. 그런데 항상 토대는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설립하신 것이 토대다. 그런데 아직 꿀은 나온적이 없다. 처음 꿀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꿀의 의미를 해석할 방법이 없잖아요. 그렇게 했을 때 구원역사에서 꿀은 즐거움 기쁨 가나안 땅의 양식 아무리 곤비한 자라도 꿀을 찍어서 먹으면 힘이 소생하고 이렇게 묘사되어있다.
그런데 누룩과 꿀을 넣지 말라고 했을 때 이것은 무슨 의미냐? 했을 때 음식과 관계된 의미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윤리적인 해석을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아직 드려지지 않는 것은 무엇이냐. 모세가 언약 체결을 할 초기에 언약체결한 언약적인 관계에서 아직은 주어지지 않는 관계다. 그런 관계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 경우를 아까처럼 확대 해석해서 그러면 돌집을 지으면 돋?집 필요 없거든요. 이런 식으로 하면 이미 모세 때 다윗 때 바로 성소 제도가 바꿔져버려야 된다. 그런데 어느 곳은 돌집을 짓고 또 떡상 등대도 열개나 놓으면서 이것은 안바꿔지고 빼냐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근본적인 문제는 생명적인 친교에 강조가 있다. 생명의 친교 그 관계는 구약 때는 여전히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된것이다.
그러면 가나안 땅의 안식을 얻었을 때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은 항상 무교병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했들 때도 유월절 어린 양께서 죽으셨으니라 항상 유월절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신다. 왜 그것이 이스라엘을 태동시킨 이스라엘이 처음 새로운 창조와 같은 처음이다. 이 처음이 항상 언약의 토대를 놓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논리적으로 확대해석하면 고약해져 버리고 언약적인 관계 설정이 어떻게 되었는가로 틀을 잡으면 아무리 모세 시대가 변해도 아직 생명의 제한은 이 말로 계속 설명을 할 수가 있다.
논리로는 딱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 항상 처음 언약 관계를 설정했던 그 관계가 근본 토대를 이루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는 생명의 친교가 근본 토대다. 소제에서는 그렇게 해서 ㅇ의 모든 생명의 교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완성이 아니다.
여기서는 죄 문제하고 관계있는 것은 아니다. 식탁 교제문제와 관계가 있다. 지금 같으면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실때 떡에다가 팥고물도 치고 맛있게 먹어도 좋다. 지금은 먹지 말라는 것이 없거든. 지금은 모세 제도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먹고 마시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구성 되지를 않해요. 구약 때는 먹고 마시는 것이 나라 구성 요소였다. 지금은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신약 교회가 누룩 섞은 카스테라를 먹을 것이냐 이것으로 그전에 논쟁이 심했다. 마치 이조 때 제사 논쟁처럼 그것은 신약 교회에서 전혀 의미 없는 것이다. 오히려 잔치의 즐거움으로 포도주와 함께 잔치의 즐거움을 누려야 하니까 그 떡에다가 콩도 넣어서 맛있게 먹어야 좋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다 아무리 좋은 것을 넣어도 구약 때 후장 밖에서 먹었을 때는 죽음에 가리워서 먹고 있는 것이고 지금은 부활하신 예수의 상에서 먹는 것은 완전한 빛 완전한 생명 가운데서 먹고 마심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 흠향하신 것을 제사장 양식으로 주셨다. 너도 이것으로 살아라. 그것은 가나안 땅의 양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이다. 그것이 성소의 생명의 교제인데 이 교제의 일을 그 아들안에서 완성 시킨 것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