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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후에 조심하라! / 조상호 목사
단일종목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스포츠 경기는 월드컵 축구경기입니다.
매년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 축구대회 때는 전세계의 축구 팬들 뿐 아니라, 축구를 모르는 사람들도 열광을 합니다. 전세계의 많게는 1/3, 적게는 1/4정도의 사람들이 직. 간접으로 월드컵을 본다고 합니다. 월드컵 경기가 있는 기간에는 남미, 북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전 세계 사람들이 월드컵을 TV로 시청합니다. 그런데 이 월드컵 축구경기에 따른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 가장 최근 경기였던 1998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월드컵 축구경기는 축구 전문가들 뿐 아니라, 전세계의 축구 팬들에게 엄청난 쇼크를 안긴 대회였습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강력한 우승 후보는 브라질이었습니다. 수년 동안 세계 랭킹 1위를 빼앗겨 본 적이 없는 브라질은 화려한 개인기를 자랑하는 세계 제일의 일류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브라질 팀에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몸값을 받고 있는 선수인 호나우도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선수가 영국이나 독일, 스페인, 이태리, 등지의 유명한 프로 축구팀에서 활약하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박사들은 월드컵 축구대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브라질의 우승 확률은(제가 기억하기로는) 1/8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브라질 팀의 우승을 예상하였습니다. 예상대로 브라질은 경기 때마다 승승장구하며 보는 관중들을 즐겁게 하는 시원한 게임을 펼쳤습니다. 물론 1차 예선에서 브라질은 노르웨이에 1대2로 패하기는 했지만, 그 게임은 이미 예선 통과가 확실시되었기 때문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게임이었습니다. 브라질은 모로코와 스코틀랜드를 차례로 이기면서 1차 예선을 여유 있게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16강전에서 칠레, 8강전에서 덴마크, 4강전에서 우리 나라를 5대0으로 이긴 오렌지 군단이라고 불리우는 네덜란드를 차례차례 이기고 결승에 올랐습니다. 이제 예상한 대로 브라질이 우승컵을 품에 안을 것이 확실시되었습니다. 더 많은 도박사들이 브라질 우승을 예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결승전이 시작되자,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브라질은 마지막 결승전에서,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프랑스에게 3대0으로 대패한 것입니다.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수십억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기력하게 패배한 것입니다. 세계 축구팬들은 경악했습니다. 이렇게까지 브라질 축구가 몰락할 줄 몰랐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브라질은 예선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정작 결승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신 것입니다.
저는 이 월드컵 축구 결승전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출발을 했고, 아무리 훌륭한 시작을 했다 할지라도, 마지막에 좋은 결론이 내려지지 아니하면 성공적인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끝맺음을 잘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다름 아닌 바로 마무리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비전의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넜습니다. 다리를 놓지도 않고 배를 타지도 않고 요단강을 쉽게 건넜습니다. 또한 우리가 지난 시간 살펴본 대로 그들은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금성철벽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난공불락 요새라고 생각되던 여리고도 그들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승리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패배라는 말은 상상조차 하지 않은 단어였습니다. 그들은 천하무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성 전투에서 뜻밖에 패배한 것입니다.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육 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와서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
이스라엘은 3,000여명의 특공대를 보내어 아이성을 공략하려 했지만, 아이성을 정복하기는커녕 도리어 36명이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 병사들이 도망쳐 온 것입니다.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않은 패배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까지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까지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는데, 아이같이 작은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승리 후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두에서도 프랑스 월드컵축구 결승전을 소개했지만, 그 월드컵에 우리 한국팀도 출전했습니다. 그런데 하모 선수는(제가 기억하기로는) 멕시코와의 예선 첫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취골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습니다. 골을 넣은 이 선수는 월드컵대회에서 골 넣었다는 흥분 때문에 골을 넣은 지 1분도 채되지 않은 상태에서 멕시코 선수를 뒤에서 백 태클을 해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그 경기에서 퇴장을 당하게 되었고, 한국팀은 10명의 선수가 경기를 하다보니 힘이 딸려 멕시코에 3대1로 패배하였던 것입니다. 저도 TV를 통해서 그 경기를 보았지만, 얼마나 억울하던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골 넣은 뒤에 문제가 발생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스포츠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구선수가 앞 타석에서 홈런을 치고 나면 다음 타석에서는 삼진 아웃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방망이를 잡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스윙이 커져 버려 결국 삼진 아웃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패배했을 때보다 승리했을 때, 조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위기를 넘기고 삶이 편안할 때,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것이 잘 풀릴 때, 앞길에 장애를 극복하고 앞으로 달려나갈 때, 조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어제 <제3회 새벽이슬의 소리>를 은혜가운데 마쳤습니다.
약 한달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준비하여, 결국 수많은 영혼들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전하여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린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얼마나 은혜가 되던지요? 제일 앞에 앉아서 청년들의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흐르던지 참느라고 혼났습니다. 그런데 바로 제 옆에 앉아 계시던 크라이스트처치 AOG 교회의 부목사님이신 피터 크린목사님도 눈물을 참고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모든 진행이 끝나고 나서도 사모님과 함께 4번씩이나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은혜가 넘친 새벽이슬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제3회 새벽이슬의 소리>를 마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승리가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어제의 승리는 어제의 승리입니다. 어제의 성공은 어제의 성공입니다. 어제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과 승리를 맛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함께 참여한 지체들을 격려하되 조심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승리를 계속해서 거두었습니다만, 그들은 어이없게도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게임도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아이성 전투에서 그들은 박살이 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패배한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승리의 자만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 난공불락의 성으로 불리우던 여리고성을 손쉽게 무너뜨린 후, 자만심에 빠져버렸습니다.
5장 1절을 보십시오.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위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소문이 가나안에 있는 모든 나라에 퍼졌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마음속에 무서운 존재로 각인 되었습니다.
감히 이스라엘을 대적할 마음조차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 본문 1절의 바로 앞에 있는 6장 2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여리고 함락사건은 비전의 사람, 여호수아를 가나안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존재가 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여호수아의 명성이 근동에 있는 많은 나라들에게 퍼졌습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서서히 자만심이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 2절과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편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일러 가로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 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원래 아이성은 8장 25절에 의하면 인구 12,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성입니다. 아이성에 살고 있는 남녀노소를 다 합친 숫자가 12,000명이기 때문에, 전쟁에 나갈 숫자는 3~4,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60만명의 군사력에 비해, 아이성은 정말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약한 성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전에 공략한 여리고 성에 비하면 아이 성은 정말 아이 같은 조그마한 성이기에 수고롭게 많은 군사들이 갈 것이 아니라, 2~3,000명 정도만 올라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했습니다. 지금 그들의 태도에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그들에게는 심각함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요단강을 건널 때와 여리고성을 공략할 때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미리미리 준비했습니다.
또 그들은 언약궤를 중심으로 전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요단을 건널 때처럼, 여리고를 공략할 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났다’, ’아이성 앞에서 기도했다‘,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아갔다‘ 등의 기록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가 난공불락의 요새 여리고성도 무너뜨렸는데, 이까짓 아이성 쯤이야.“
여러분! 질문하겠습니다.
여리고성을 누구 힘으로 무너뜨렸습니까?
그들의 무기로, 그들의 능력으로 여리고를 무너뜨렸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용인의 한 정신병원에 1년에 몇번씩 설교를 하러 가셨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중간에서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 병원에서 예배가 허락된 사람들은 비교적 증상이 심하지 않은 환자들인데, 한 사람이 막 웃기 시작하니까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를 쿡쿡 찌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얘는 미쳤어요. 미쳤어.” 미친 사람이 미친 사람보고 미쳤다고 하는 것을 보고 그 목사님도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참지 못하고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다가 결국 마구 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 목사님을 보고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도 미쳤다. 저 사람도 미쳤어.”
여러분! 정신병자의 특징을 아십니까?
그들은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르시는 분들은 정신병원에 잠시 들려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자신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렸고, 그들 앞에 놓여있는 아이성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결국 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아이성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이성에서의 패배를 보면서 자만심의 무서움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고전10:12)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공을 체험했을 때, 조심하십시오. 일이 잘 풀리고 있을 때, 승리했을 때, 조심하십시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호수아 6장 18절을 통해서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후에 여리고 성에서 얻은 전리품은 아무 것도 손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한 사람, 아간이라는 사람이 문제였습니다.
7장 21절에 의하면 그는 여리고성 안에 있던 아름다운 외투를 보는 순간, 자기 부인이 생각이 났던지, 자기의 딸이 생각이 났던지 모르지만, 탐욕이 생겨 아무도 모르게 그 외투를 숨겨버렸습니다. 또 은 금을 보자 눈이 뒤집어졌습니다. 그래서 그것들 또한 아무도 모르게 땅 속에 감추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신 경고를 그는 따르지 아니하고 불순종한 것입니다. 결국 아간 한 사람이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에 심각한 해를 끼친 것입니다.
지난 5월7일자 신문에 <앵무새 한 마리가 동료들에 욕설 교육>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영국 북부의 한 앵무새 보호소가 욕 잘하는 앵무새 수놈 한 마리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합니다. 주인이 시간이 없어 돌볼 수 없다는 이유로 2개월 전에 시드니라는 이름의 앵무새를 맡겼는데, 시드니라는 앵무새 한 마리가 다른 30마리의 앵무새들에게 쌍스런 욕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욕 잘하는 시드니의 영향을 받은 다른 앵무새들도 입만 열면 욕을 하다보니, 그곳이 앵무새 보호소 인지, 욕 경연장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앵무새 보호소의 분위기가 나빠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드니가 새들에게 뿐 아니라, 개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합니다. 시드니라는 앵무새는 그 보호소 안에 있는 개에게 “Come here! Come here!"라고 소리치고는, ”sit on the sofa! sit don the sofa!"라고 말하면서 개에게 자꾸만 소파위로 뛰어올라가라고 부추긴다고 합니다. 결국 앵무새 한 마리 때문에 전체 앵무새 보호소가 엉망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체 공동체가 피해를 봅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를 조종하는 기장 한 사람이 잘못하여 다른 나라 국경을 넘어 들어가면, 승객 전체가 고통을 당하고 국가간의 외교문제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대표이사 한 사람이 경영을 잘못하여 회사를 부도나게 하면, 수천, 수만명의 직원들이 직장을 잃게 되고 그들에게 딸린 가족들은 엄청난 고생을 합니다.
대통령 한 사람이 나라를 잘못 다스리면, 온 국민들을 고통 가운데 처하게 합니다.
테러리스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전체 뉴욕시민이, 아니 전 미국 국민이, 더 나아가 전세계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간이라는 한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전체 이스라엘 공동체가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운명 공동체입니다.
구약성경 요나서를 보면 바로 그러한 내용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가 바다 한 가운데에서 대풍을 만났습니다. 배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선장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에 있는 모든 물건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래도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이 배가 문제를 당했습니까?
요나 때문입니다.
요나 한 사람 때문에 이 배가 어려움에 처한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결국 불순종한 요나 한 사람 때문에 배에 있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한 것입니다. 한 사람 때문에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어려움에 처하게 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바로 아간이라는 한 사람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이 이처럼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6절과 27절을 보면,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 말씀이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한 사람의 중요성, 한 지체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지체가 즐거워할 수 있고, 나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지체가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남이 못되면 고소해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우 한 사람의 기쁨은 우리 모두의 기쁨입니다. 한 형제의 축복은 우리 모두의 축복입니다. 반대로 한 친구의 고통은 우리 모두의 고통입니다. 옆에 있는 한 형제의 아픔은 우리 모두의 아픔입니다. 교우 한 사람의 범죄는 우리 교회의 범죄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쓰러지면 여러분 한 사람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나 혼자만이 아닌, 전체 공동체에 유익을 주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나만이 아닌, 나의 가족만이 아닌, 주위에 있는 이웃들에게 유익을 주고, 교회에 유익을 주고, 민족에 유익을 주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공을 체험했습니까?
조심하십시오.
응답을 받으셨습니까?
잘 풀리고 있습니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자녀가 성실하게 잘 성장하고 있습니까?
어떠한 승리를 맛보았습니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자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계속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비전의 땅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는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간은 공동체에 해를 끼친 사람이었습니다만, 여호수아는 달랐습니다. 공동체에 유익을 끼쳤습니다. 그는 아이성 사람들에게 패배하여 완전히 낙심 가운데 빠져있는 민족을 위해 중보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 성 전투에서 아이성 사람들에게 박살이 나서 쫓겨 돌아올 때에 여호수아는 머리에 티끌을 얹고 해가 저물도록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패하게 하십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를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가나안 사람들에게 멸망시키려고 합니까? 차라리 요단강을 건너오기 전에 죽여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요단강을 건너와서 이렇게 패하였으니 다른 이방 족속들이 뭐라고 조롱하겠습니까? 주여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서 대성통곡하면서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통곡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성을 재차 공격하여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문제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처럼 문제를 부여잡고 중보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남의 잘잘못을 가리는 정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죄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16절부터 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방법으로 제비 뽑아, 범죄한 아간을 색출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정죄가 필요하지 않고 여호수아처럼 모든 공동체의 아픔을 가슴에 품는 통곡의 중보 기도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하7:14)에서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며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즉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우리의 문제에 빠진 공동체를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친구의 문제, 교회의 문제, 한인사회의 문제, 민족의 문제 앞에서 여호수아의 통곡의 중보 기도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이제는 악한 길에서 나와 주의 얼굴을 구할 때, 주님께서 들으시고 우리를,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우리 민족과 나라를 고쳐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