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아,
이 글의 제목은 가이드(带路人)이다. 이 글은 내가 우리 생명의 은인인 너의 高阿姨(고아이)에게 중국어로 써서 바친 것이다.
이 글은 너도 꼭 알아야 하겠기에 내가 우리말로 번역하게 되었다.
네게 쓰는 문자라
호칭에서 본문과는 좀 다르다. 예를들면 딸을 너로, 처를 너엄마 등 호치미다2
1989년8월3일에서 1994년8월11일까지 5년간 우리는 미얀마와 태국에서 살았었지.
이 5년 동안은 우리가 한 식구로써
동지로써 생사를 같이하며 살아 왔던 비장한 세윌이었다.
1989년7월에 우리는 중국에서 정치적 탄압을 피하여 급급히 미얀마로 밀입국 하게 되었다.
그 나라에 우리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우리는 미얀마에서
도적, 사기꾼, 마약밀매범, 유격대
등등의 많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원수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와는 정
반대로 그들은 우리의 길을 안내한
가이드였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 생명의 은인인 고자난(高子鸾)이란 너의 고아이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잠언에 이런 말이 있단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 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외시니라
또 이런 격언도 있다.
-谋事在人 成事在天
(모사재인 성사재천)
사람이 아무리 꾀할지라도
하늘이 응답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두 말씀을 동남아에서 정말 깊이 체험 했다.
우리가 만났던 그 많은 사람들은
우리 생명의 은인인 너의 고아이와 더불어 우리 인생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하나하나의 체인과도 같이 우리와
긴밀히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그 중 어느 한 체인이 탈락했어도 오늘의 우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동남아에서의 5년은 그렇게 신비와 불가사의로 가득 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 가겠다.
가 이 드
1989년8월3일,
우리 네 식구는 깊은 밤을 타서 중국과 미얀마 국경선을 넘기
시작했다.
우리가 걷는 길은 논두렁이었다.
지세가 경사져서 논두렁은 좁고
높았다. 어디 가서나 살겠다고 갖고 나온 짐이 우리의 행군을 더욱 어렵게 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욕심은 살아 남아서 짐은 버리지 못했다.
가다가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논바닥에 떨어 잘 수도 있었다. 게다가 밤은 칠흙같이
어두워서 맹인처럼 더듬으며 기야 했다. 너들은 너무나 힘이 들어서 좀 쉬어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앉으면 다시 일어 못날 것 같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나는 행군을 강행 했다. 정말 한발작 한발작이 전투였다.
그렇게 우리가 지치고 곤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의 향연이
펼쳐졌다.거대한 개똥벌레의 무리가 우리의 머리 위에 별처럼 출현 했다
그 대자연의 별빛이 발아래 등불이 되어 우리의 가는 길을 인도 했다
때로는 개똥벌레가 너의 발등에 떨어졌다. 너는 따갑다며 발등의 불을 떨어뜨리려고 발을 굴렀다. 순 정신작용이었다.
그날 밤 개똥벌레의
빛이 없었다면 우리는 또 얼마나
헤메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드디어 畹町河(완팅허)에
이르렀다. 완팅허는 중국과 미얀마의 국경선이었다. 비록 강폭은 넓지 않았지만 경사가 심하여 물살이 매우 거셌다.
나는 수심을 탐지하기 위하여 먼저 강을 건너 보았다.
중간에 제일 깊은 곳은 허벅지까지 왔다.
나로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나는 돌아 와서 너를 입고 건너서
언덕배기에 내려 놓았다
- 내가 금방 건너올터니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울면 절대 안돼는 거 알지?
- 울지 않을께요. 아빠 빨리 건너 와요.
나는 너를 단단히 단속하고 다시 강을 건너 왔다. 이번에는 세 사람이 함께 건널 차례였다.
그런데 너 엄마는 아직 강에 들어 서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떨기 시작 했다.
너 엄마의 몸무게만 가벼워도
내가 업어 건널 수도 있었다.
그러나 너 엄마의 체중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너 엄마는 어릴 적에 부모를 따라 탈북하느라 두만강을 건넜던 이력도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너 엄마의 담력이 이렇게 작은 줄은 몰랐다.
어떻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강은 건너야 했다.
나와 너 오빠는 좌우에서 너 엄마의 팔을 으스러지게 붙잡고 강물에 들어 섰다. 너 엄마의 몸은 사시나무 떨듯 했다. 그 떨리이 고스란히 내 몸에 전달 됐다. 물이 깊어질 수록 너 엄마는 다리맥이 풀리면서 주저 앉을 것만 같았다.
- 여보, 힘 좀 내라고. 죽어도 강을 건너 가서 죽자고.
나는 너 엄마에게 힘을 실어 주려고 이렇게 외쳤다. 그러나
너 엄마는 별로 힘을 받지 못했다. 만일
그때 너 엄마가 우리의 손만놓으면 그대로 세찬 물결에 휩쓸려 내려
갔을 것이다.
나와 너 오빠는 젖먹던 힘까지 다 내어 너 엄마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물살에 떠 밀리며 간신히 미얀마의 땅을 밟게 되었다.
그런데 너를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물살에 너무 멀리 떠밀려
내려 왔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너는 겁을 집어 먹고 울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는 그
울음소리를 따라 너에게로 갈 수 있었다. 너는 우리를 보자 숨이 넘어 갈 정도로 흐느꼈다.
너 엄마는 와락 너를 끌어 안으며 모성애를 쏟아 부었다.
산에서 구성진 뻐꾸기 소리가 들려 왔다. 중국에서도 많이 듣던 뻐꾸기 소리라 너무나 귀에 익었다. 그 뻐꾸기 소리가 오늘따라 소리로 들리지 않고 우리를 영접하는 환영곡으로 들렸다.
근처에 농막이 한 채 있었다. 우리가
농막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세찬 소나기가 퍼부었다. 하늘이 우리를 위해 잘도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비가 국경을 넘을 때
쏟아졌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큰 고생을 했을지 모른다. 생각할 수록고마웠다. 너들은 너무나 지쳐서 바닥에 눞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누가 와서 안아가도 모를 정도였다
날이 희끄므레 밝아오자 비도 멎고
날씨도 개었다. 얼마간 후에 산 위에서 붉은 해가 얼굴을 삐죽이 내 밀었다. 우리가 미얀마에서 처음 맞는 태양이었다.
미얀마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 되었다.
오늘부터 우리는 조선 사람이 아니다.
동남아에 사는 날 동안 우리는 철저하게 화교로 살기로 작심 했다.
미얀마의 자연은 내가 여태 보아왔던 자연과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뻐꾸기,참새,까치,까마귀,잠자리,
나비, 꿀벌,개미 같은 것들은 북방에서 봤던거와 똑 같아서 전혀 낯설지 않았다.
산에 있는 식물은 빠나나와 야자수
같은 열대 활엽수 나무를 빼면 별로 신기한 것이 없었다.
논판의 벼는 한창 익어 가는 중이 있었다.나는 알찬 벼이삭을
보면서 소학교에 다닐적에 선생님으로 부터 들었던 얘기가
떠 올랐다. 그 선생님은 말하기를 인도나 동남아의 쌀알은 참새 알만치 크다고 했다. 그리고 밥은 숟가락으로 떠먹는 것이 이니고 손으로 집어먹는다고 했다.
학생들은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어떤 학생이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벼알이 그렇게 크면 볏줄기가
견딜 수 있습니까?
-그럼. 완전 가능하지. .그 곳의 벼줄기는 옥수수 줄기만치 긁다고.
학생들은 다시 한번 탄성을 질렀다.
선생님 말씀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모든 학생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시대는 선생은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하는 말씀이 아무리 허황되고 꿈같은 얘기라도 그대로 믿었다.
아무튼 그때 선생님의 꿈같은 얘기는 나에게 큰 자극제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크면 인도나 동남아에 한 번 꼭 가보겠다는
꿈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동남아에 와서 처음 보는 벼는 모양도 크기도 북방의 것과 빼닮아 있었다.
이국의 자연은 별로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미얀마는 나와는 아무 인연이 없는 나라였다. 이얀마에는 내가 아는 사람 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이 낯선 땅에서 사람을 찾아야했다.
나에게는 우리의 길을 안내해 줄 가이드가 절실 했다.
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농막을 나왔다.그러나 아직 이른 아침이라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도로변 산기슭에 아주 작은 초막이 한 채 있었다.호기심에 끌려 들어가 봤다.초막은 길손들을 위해 만들어진 암자였다. 작은 단에는 바나나와 과자같은 제물이 비치돼 있었다.
나는 또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 올랐다. 우리 학교 근처에는 벽돌로
지은 작은 암자가 있었다. 이 암자가
공산당 정권이 들어 서면서 수난을
겪었다. 공산당은 철저한 무신론
주의였다. 불교도 예수도 하늘도 땅도
믿지 않았다.그들이 선전하는
것은 계급투쟁이었다. 이런 교육아래 암자는 애들의 투쟁과 공격의 타깃이
되어 파괴되었다.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후 신은 중국에서 발 붙일 곳이 없었다. 특히
예수는 서양종교라 해서 완전히 국외로 추방했다.
그로부터 다신의 나라였던 중국은
철저하게 무신의 나라가 되었다.
나는 암자를 보니 옛날로 돌아운 듯 야릇한 니낌이 들었다.
마침 등에 광주리를
둘러 멘 한 중년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초약을 채집하려 나온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다행히 중국말을 좀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빠이(摆夷)족이었는데 이름은 징이라고 했다. 방싸이(邦塞)라는
곳에 사는 사람이었다.방씨이는 중국의 완팅(畹町)시와 마주하고
있는 곳이었다.
징군은 내가 미얀마에서 최초로
만난 친구였다. 그 친구를 알게 되므로써 미얀마는 이제 낯선 땅이
아니었다. 나는 징에게 말과 수화를 섞어서 미얀마
내지로 안내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징은 나의 뜻을 완전히 이해 했다. 징은 우리를 자기가 살고 있는 방싸이로 데리고 갔다.
꽤나 큰 동네였다. 동네의 가장 높은 언덕에는 금빛 찬란한 파고다가 자리잡고 있었다. 파고다의 건물마다에는 송곳 같은 첨탑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미얀마는 중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나라지만 중국인들 보다는 터를 넓게 잡고 살았다.
징은 우리를 어느 친구네 집으로
데리고 갔다. 텃밭은 넓었지만 온갖 잡풀과 엉겅퀴로 뒤덮여 있었다. 간혹 옥수수 줄기와 콩대가 보이긴 했으나 잡풀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다. 수확은 물건너 간 것 같았다.
심기만 하고 가꾸지는 않으니 제구실을 할 리가 없었다.
주거는 대나무로 간소하게 지은 집이었다. 대나무 벽에는 멋으로 붙여 놓은 그림들이 여러 장 있었다. 그런데 미얀마의 그림은 한 장도 없고 전부 중국에서 들어 온 그림들이었다.
살림살이라고는 먹고 사는데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는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 집은 형제들이 많은
집안이었다.그런데 모두다 마약
중독자였다.그들은 밤이 되자 자기들
방에서 마약을 피우며 징그러운
소리를 질러 댔다. 고양이 불알 앓는 소리랄까 듣기가 거북스러웠다.
이틑날 아침에 징이 왔다.그들은
의논을 하더니 우리의 가이드가 되겠다고 했다. 이 사람믈은 내가 미얀마에서 돈을 주고 고용한 첫
번째 가이드였다.
우리 일행은 경운기를 타고 무싸이
(穆塞또는木姐라고 함) 방향으로 달렸다.도로 양변은 산맥이었는데 푸르른 수림으로 덮여 있었다.
자연환경을 보면 어디에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한 반시간을 달렸다.한 무리의 부녀자와 여아들과 마주쳤다. 그녀들은 장자기를 가득 담은
광주리를 등에 메고 있었다. 길쭉하게 생긴 광주리는 처음 보는 것이어서 신기했다. 광주리 좌우는 넓은 띠로 연결 되어 있었다. 그 띠를 머리 정수리에 이면 짐광주리가
등쪽에 밀착 됐다.
일종의 미얀마식 지게였다.
부녀자들과 여아들은 무거운 짐에 눌려서 허리를 깊이 구부리고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어른들은 그렇다 치고 여아들이 불쌍했다.
우리는 한 시간 쯤 달려 무씨이에
도착했다. 변두리에는 검문소가 있었다. 검문소에 표기된 미얀마 글자가 신기했다. 미얀마 문자는 마치 스프링을 집아 당겨 만든 것 같았다, 그런 이색적인 글자를 보니 내가 정말 외국에 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꼼짝없이 검문에 걸렸다.
내가 검문에 걸리자 징은 슬금슬금 발뺌을 했다. 연루가 될까봐 두려웠던 모양이다. 마침 단아한 동포 여성을 만났다. 내가 미얀마에서 처음으로 만난 동포였다. 그녀는 나의 사연을 듣고 동포애를 발휘하여 곧바로 검사관을 찾았다. 그녀가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둘러 댔는지는 몰라도 덕분에 우리는 검문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잠시 만났던 여인이 우리에게 큰 일을 했던 것이다.
징 일행은 우리를 우단(가명)
이라는 집에 맡기고 수속을 하러 간다며 나갔다. 그 집은 네 식구가 살았는데 남자는 역시 중독자였다.
그리하여 생계는 여자가 날품을 팔아
유지하고 있었다.살림살이란 낡은
이불과 솥과 그릇 몇 개가 전부였다.
벽거울이라고 하나 있었지만 그마저도 금이 간 거울이었다.
가이드들은 오후 세시 쯤에 왔다. 그렇게 기대했는데 아무 성괴도 없었다.
그들은 계속 여기 저기에 다니면서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다 허사였다.
그들은 우리를 멍유라는 곳에 데리고
왔다.멍유는 4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촌락이었다.그들은 여기에서
수속을 밟는다고 했으나 뻥이었다.
해가 질 무렵 그들은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급히 귀가 길에 올랐다.
내가 고용한 첫 번째 가이드들은 돈만
먹어 치우고 유유히 사라졌다.
우리는 노숙자 처지가 될 뻔 했다.
다행히 멍유에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여관이 한 집 있었다. 우리는 사정 얘기를 하고 그 여관집에 머물게
되었다.
멍유는 교요충지었다.방싸이(邦塞)에서 무싸이(穆塞), 그리고 라쑤(腊戍)에서 무싸이穆塞)를 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멍유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동네에는 물이 매우 귀했다. 온 동네에 우물 한 개도 없을 정도로 물이 귀했다. 먹는 물은 먼 냇가에 가서 길어다 먹었다.
생활용수는 모두 빗물을 받아 썼다. 집집마다 빗물받이 용 물통이 몇개 있었다.
물이 귀하므로 세수는 빗물 한 바가지로ㄱ여러 사람이 같이 했다.
여관집 주인은 양아이(杨艾)라는
70대 노인이었다. 마르고 키가 큰 편이었다. 그역시 중독자였다. 자기
말로는 마약을 60여년이나 피웠다고
과시 했다.
당시 미얀마는 전국이 계엄 상태였다.
계엄군은 무작위로 여관을 수색
했다. 그러나 염려할 것은 없었다.
군 내에도 여관에서 심어 놓은 첩자들이 있었다. 여관에서는 그들에게서 제때에 정보를 제공받아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군인들이 수색하는 날이면 남자들은
여관 뒷편에 있는 옥수수 밭으로
피신 했다. 양씨와 머슴들은 그 곳에서 마약을 피웠다. 양씨는 머슴을 두명이나 두고 있었다. 한명은 잡부이고 다른 한명은 양씨의 담배 시중을 드는 머슴이었다.
마약을 피우기 전에 몇가지 준비 과정이 있었다.
양씨는 먼저 요대기 위에 모로 누웠다. 그러면 머슴이 장죽의 물부리를 양씨의 입에 물렸다.
이어서 시가와 마약을 섞어 대통을 채웠다. 그리고 성냥을 켜서 불을 붙였다. 담배는 들숨과 날숨으로 피우지만 마약은 들숨으로만 피웠다. 양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부리로 마약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들숨만으로 피우니 입 밖으로 나오는 연기는 한점도 없었다. 피우는 사람과
머슴의 손발이 아주 척척 맞았다.
양씨는그렇게 두 세번을 피워야만
비로소 중독이 된다는 것이었다.
중독이 되면 말로는 혀용할 수 없는 황홀경에 빠진다고 한다.
그러나 마약 기운이 사라지면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 따른다고 했다.
고통을 최소화 하려면 적시에 마약을
피워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마약은 한번 주독되면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했다. 양씨는 하루에
세 차례나 피우는데 한번에 적어도
두 세통은 피워야 해결이 된다고 했다.
양씨는 나더러 한 대 맛보라고 했지만
나는 거절 했다.
- 세상에 태어나서 빠이펀(白粉마약의대명사)도 안 피우면 무슨 재미로 사는거요.
白粉은 흰 가루라는 뜻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마약의 은어였다.
양씨는 마약을 거부하는 나를 그렇게 폄하 했다. 그러나 나는 매일 마약에
절어 사는 그들의 인생이
벌레 같이 보였다.
머슴의 품삯은 양씨가 피우고 남은
담뱃재였다. 담뱃재는 중국에서 생산된 진통제를 가루내어 시가를 혼합하면 토종 마약이 되었다. 물론 중독성은 미흡하지만 그것도 중독은 되는 모양이었다.
양씨의 부인은 양씨보다 훨씬 젊고 예쁘장 했다. 그녀도 한동안 마약에 빠졌다고 했다.
그가 우리 집사람에게 고백한
마약담은 가이 충격적이었다. 마약에
중독되면 오르가즘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짜릿함을 느낀다고 했다. 그녀는 그래도 가정을 위하여 마약의 유혹에서 벗어 났다고 했다.그만하면
이성적인 여성이었다.
며칠 간 여관에 살면서 나는 여관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양씨는 여관이라는 간판을 내 걸고
실은 마약 밀거래를 하고 있었다.
밤중이면 여관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대개 마약거래상들이었다.그들은 여관에
머무는 동안 마약거래는 물론 도박을 놀고 마약을 흡입 했다.
나는 양씨에게 벌써부터 가이드를 부탁했었다.
하루는 양씨가 가이드를 구했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나를 찾아 왔다.
- 老文,(문씨)가이드를 구했소. 가이드는 방싸이에 사는 내 사위요. 그 사위가 대륙인을 내지로 호송하고 어제 집에 왔다오. 우리 사위는 대륙에서 온 사람들의 가이드 역할을 많이 했소. 그 사위가 내지로 안내한 사람은 수없이 많다오.
양씨 자기의 사위를 대단하게 치켜 세웠다. 진위여부를 떠나 이제 다시 한번 도전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8월11일 날에 徐世友라는 사람이
흥정을 하기 위해 나를 찾아 왔다.
한 눈에 봐도 중독자였다. 나이는 젊었지만 몸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빼빼 마르고 얼굴은
노랗고 눈은 우묵하게 들어 가 있었다. 전형적인 마약 중독자의 모습이었다.
三分像人 七分像鬼라는 말이 있다.
삼할은 사람 같고 칠할은 귀신 같다는 말이다 . 다시 말하면 30퍼센트는 사람 같고 70퍼센트는 귀신 같다는 말이다. 서씨가 그랬다.
서씨는 사람보다 귀신을 더 많이 닮아있었다. 전형적인 마약 중독자의 모델이었다. 거다가 깐작대고 잔꾀만 부리니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이것 저것 따질 여유가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위기를 곀으며 산다. 만약 피해갈 수 없는 위기라면 담대하게 결단을 내려야 한다. 결단 후에는 하늘의 뜻에 맡기고 차분하게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오던 다 받아들이는 이량도 필요하다. 모험의 길은 순탄치 않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나의 운명을 서씨에게 맡기기로
하고 그의 요구조건을 다 들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 杨艾와 徐世友는 우리의
두 번째 가이드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에 우리는 경운기를 타고
무싸이로 갔다. 가이드는 서씨외에
빠이족 남자, 그렇게 두명이었다. 빠이족 남자는 기골이 장대 했다.
허리에는 묵중한 미얀마 식 칼을 차고 있었다.
미얀마 식 칼은 칼끝은
뾰족하지 않고 一자형이었다. 그들은 이런 도구를 도끼와 칼, 겸용으로 사용 했다. 미얀마 남자들은 야외에 나갈 때면 이런 칼을 꼭 허리에 차고 다녔다. 한참을 걸어서 우리 일행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보기에 좀 으슥한 곳에 이르러 잠시 쉬어가게 되었다. 두 사람은 마약 생각이 났던지 아니면 무슨 음모를 꾸미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숲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숲에서 나왔다. 서씨는 심각한 얼굴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이제 여기서 좀만 더 가면 검문소가
나은다구요.당신들은 미얀마 말을
모르니까 잡힐 수 있다구요.
그러니까 돈은 잠시 나에게 맡기세요.
검문소를 통과하면 다시 돌려 드릴께요.
본래 비용은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
지불키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단호히 거절 했다.
이에 서씨는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시오. 장인어른이 하도 부탁하기에 마지 못해 맡은거요. 나는 당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이러는
건데 나를 믿지 못한다니 정말 실망스럽소.그렇게 나를 믿지 못한다면 당신들 끼리 가세요.
우리는 집으로 돌아 가겠소.
서씨의 이 한마디는 우리를 공포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그가 정말 우리를 버려두고 간다면 우리는 광야에 방치된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돈이란 내 돈이라도 남의 지갑에 들어가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서씨의 요구를 받아 들였다. 우리는
논둑길로 한참을 걸어서 우리는 어느
큰 강변에 도착 했다.강물은 매우 혼탁 했다. 강넘어 먼 곳에는 높은 공장 굴뚝이 보였다. 나는 서씨에게 저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 ㅇㅇ라는 곳인데 우리는 저 곳에 가서 택시를 타고 내지로 이동할거요.
나는 내지로 간다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렜다.
강나루에는 나룻배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씨의 지시에 따라
먼저 배에 올랐다. 그런데 서씨는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강둑에서 뒹굴며 죽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자기는 배가 너무 아파서 다음 배편으로 건너겠다며 먼저 건너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사공이 장대로 강바닥을 짚으며 배를
움직였다. 그러자 서씨 일행은 오던
길로 줄행랑을 쳤다.
우리는 깜쪽같이 사기를 당했던 것이다. 강을 건너서 알아보니 우리는
거의 중국 땅에 와 있었다. 강변에서
좀만 더 가면 미얀마와 중국의 국경선
이라고 했다.
멀리에 보이는 굴둑은 루이리(瑞丽)라고 했다. 루이리는 우리가 미얀마를 건너 오기 전에 사흘
동안이나 머물었던 곳이기도 했다.
알고 보니 우리는 8일 동안 쳇바퀴 돌듯 제자리를 맴돌았던 것이다.
서씨는 우리를
중국에 보내기만 하면 돈은 거저
먹는 것으로 생각 했던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는 동포의식이라는 것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남을 등쳐 먹는 사기꾼들이었다. 대륙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 그들로부더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었다.
그래도 마음씨 착한 사공 덕분에
우리는 다시 강을 건너 올 수 있었다.
나와 아들은 서씨를 찾겠다고 무싸이
까지 뛰어 왔다. 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하소연 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은 의미심장 했다.
-찾지 마세요.그래도 그 사람들이 당신들을 해치지 않았으니 괜찮은
겁니다.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살아
남은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글쎄 우리는 요행히 살아 남기는 했지만 살아 갈 길은 막막 했다.
우리에게는 살아 가는데 필요한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어둠이 깔릴 무렵 우리는 방캄이라는 곳에 와서 가족과 재회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나아갈 곳도 물러 설 곳도 없었다,
车到山前必有路란 말이 있다.
뜻은 이렇다.
수레가 잘 굴러가다가 산에 막힌 것이다, 수레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막다른 골목에도 길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것이다. 참 신기하면서도 오묘 했다.
살길은 없었지만 그때그때 생각지도 않던 살길이 열렸다.
방캄의 한 빠이족 젊은이가 우리를 수용 했다. 인물 체격도 좋고 중후하고 성실한 사내였다. 우리는 돈없이 살 수 없는 세상에서 돈 한 푼도 없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었다.
그 곳 빠이족들은 피부색과 생김새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는 중국인, 한국인,일본인 같이 생긴 사람들도 많고 많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미얀마에서 만난
사람들은 빠이족들이었다. 빠이족은
掸族샨족. 泰타이, 傣따이, 佬族라오족,阿洪族아훙족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傣족이라
불렀다. 본래 빠이족의 뿌리는 중국이었다.
그들은 중국의 云贵고원에서 역사상 몇 번이나 자기들의 독립왕국을 세우기도 했던 민족이었다. 후에
왕국이 타 민족에 의해 멸망하자 그들은 미얀마, 태국,인도,라오스 등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겨 왔던 것이다.
미얀마는 백 개 이상의 민족이 살고 있었다. 국가 체제는 연방제였다. 우리가 지금 까지 몸 담았던 곳은 빠이족이 자치권을 갖고 있는 싼방이었다. 싼방은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하여 오래전부터 미얀마
정부군과 맞서 싸웠다. 그들은 인민군이란 독립군도 보유하고 있었다. 인민군의 전술은 유격전이었다. 그들의 신출귀몰하는
유격 전술은 미얀마 정부에게는 큰 골칫꺼리였다. 정부군과 인민군과의
유혈 충돌은 끊임없이 발생 했다.
다음날 아침에 우리 부부는 강나루에 맡겨 놓은 짐을 찾으러 갔다.
우리의 가방은 초막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가방을 마구 뒤져놓아서 엉망진창이었다. 너 엄가 속상해서 넋두리를 했다.처의 불만은 큰 화를 자초했다. 초막에는 캐주얼
차림을 한 두 명의 젊은이가 있었다.
그 중 한명이 갑자기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어 우리를 겨누었다.
그리고 한 사람은 톱니식 수갑으로 나와 너 엄마의 손목을 연결시켰다.
말로만 듣던 인민군을 그렇게 처음
만나 본 것이다.
완팅허를 건널 때는 죽을까봐 그렇게 떨던 너 엄마가 이니었던가.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너 엄마는는 총구 앞에서 순직이라도 할 자세로 담대하게 하나님을 부르짖었다. 수갑을 차고도 손을 치켜 들고 하나님을 불렀다.
톱니식 수갑은 손목을 움직이면 조여드는 특성이 있어서 손목에
가해지는 압박이 컸다.그들은 마을에 가서 성이 陈이라는 동포 여인을 불러 왔다. 젊고 정이 많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등에 아이를 업고 왔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녀는 방캄에서 빠이족 남자와 사는 유일한 중국인이었다. 어려운 고비에 동포를
만나니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였다. 그녀는 따뜻한 동포애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도록 통역을 했다.
아울러 그녀 특유의 친화력으로 군인들을을 감화시켰다.
덕분에 처는 즉석에서 수갑을 벗고
마을로 돌아 갈 수 있었다. 나는 상급
기관에서 조사받아야 했기에 초막에서 초조하게 상급자를 기다려야 했다.나는 몹시 불안 했다.
왜냐면 중국이 코 앞이라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나는 중국으로 압송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상급자가 드디어 왔다.
상급자는 군복차림의 중년이었다. 그가 입은 복장은 중국인민해방군의 군복과 똑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자가 나를 접수하러 온 중국군인인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 상급자는 중국말을 몇마디 할 줄 알았지만 소통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상급자가 중국말을 모르는 것을 보니 중국에서 나를 접수하러 온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무엇이 그 상급자를 감동시켰는지 모르겠다. 상급자는 부하들에게 수갑을 풀어주라고 명령 했다. 좋은 상급자를 만나 쉽게 문제가 풀려서
나는 마을로 돌아 오게되었다.
방캄은 학교, 은행, 우체국, 병원 등 공공시설이 갖추어진 한 개 읍이었다.
방캄은 곡창지대였다. 평야가 비교적 넓고 땅이 비옥하여 사람 살기가 좋은 곳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벼농사를 지었다.
방캄은 인민군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저녁 무렵에 그 상급자가 부하 세명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통역은 역시 그 동포 여성이었다.
상급자의 내방 목적은 내가 사기 당한 전 과정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상급자가 묻는대로 사건의 시말을 솔직하게 진술 했다. 인민군에 측에서는 서씨의 신상정보를 다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다짐까지 했다.
- 범인은 우리가 꼭 잡아 오겠습니다.
그리고 사기당한 돈도 우리가 책임지고 찾아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해결돌 때까지 안심하고 기다려 주기 바랍니다.
생각지도 않던 좋은 소식에 나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 나는 그 상급자가 너무 고마워서 돈을 찾으면 반반씩 나누겠다고 했다. 나의 말을 들은 상급자는 굉장히 만족스러워했다.
나는 멍유에 있을 때 이미 안녕,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세 단어를
미얀마어로 익혀 두었다. 그때 외워 두었던 말을 나는 처음으로 써 먹게 되었다. 나는 자리를 뜨는 상급자에게
제수디마레라고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상급자는 잘 알아 듣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몰랐다.
상급자 일행이 간 후 진여인과 동포애를 나누면서 많은 얘기를 주고 받았다.
- 나는 같은 중국인이라고 믿었는데
이렇게 속을 줄은 몰랐소.
- 아저씨, 중국인이라고 다 믿으면 큰일 나요. 양씨와 서씨는 다 사기꾼이라고요.
- 두사람은 제부와 처남 관계라고 했는데 정말인가요?
- 아니에요. 다 거짓말이라고요.
- 그래요. 그건 그렇고 좋은상급자와 착한 통역을 만나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오.
- 인민군에서는 아저씨네를 돕고 싶어서 돕는 게 아니라고요. 양씨가 돈이 많다는 것을 잘 이니까 그들의 돈을 뜯어 내기 위해 아저씨를 이용하는 거에요. 인민군은 피해자는 보호하지만 가해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아요. 아저씨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인민군 관활지역에 와서 사기 행각을 버린 것은 인민군에 대한 이미지 훼손이 될수 있는거라고요. 인민군은 이것을 명분으로 양씨 같은 돈있는 사람들을 협박하여 거액의 돈을 뜯어내는 거예요. 이렇게 한 번 걸리면 어떤 부자도 인민군의 요구대로 다 들어 줄 수밖에 없는 거라고요.
- 이렇게 많은 정보를 알려 줘서 정말 고맙소.
- 고맙긴요. 같은 중국인들끼리 서로 돕고 사는거지요. 하지만 같은 중국인이라고 다 믿으면 큰 낭패를 볼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돼요.
미얀마의 시골집들은 대부분 대나무 집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주인집은 2층 목조건물이었다. 아래 층은 축사로 사용하고 2층은 주거로 사용했다. 방은 여러 개가 있었는데 주인은 그 중 한 칸을 우리에게 내어 주었다. 그리고 매끼 식사도 꼬박꼬박 챙겨 주었다. 돈 한 푼 안내고 귀빈대접을 받는 것 같아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매끼마다 먹는 주식은 쌀밥이 아니면 찹쌀밥이었다. 부식은 국에다 반찬이 두세가지였다. 음식을 먹는 방법은 우리와는 전혀 달랐다. 식탁에는 아예 수저가 없었다. 그러므로 손이 수저를 대체했다.
나는 소학교 때 그 선생님이 동남아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밥을 집어 먹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알고보니 그 선생의 말씀도 다는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는 방법은 먼저 손으로 주먹밥을 길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주먹박밥을 적당하게 떼내어 국물에 찍어 먹거나 반찬을 얹어 먹었다. 너무나 생경한 식사문화라 처음에는 밥먹는 것이 언아나 서글펐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내 적응이 되었다.
특히 너들의 적응력은 놀라울 정도라 빨랐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인민군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우리의 마음은 동요가 일기 시작 했다. 특히 성질이 급한 너 엄마의 인내는 이미 데드라인에 와 있었다. 처의 얼굴을 보니 무언가 메가톤급 사건이 터질 거 같은 느낌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어는날 너 엄마는 지금까지 가슴에 묻어 두었던 폭탄을 터뜨리고 말았다. 눈에는 내가 남편이 아니라 철처지 원수로 보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한 가족으로 또 동지로써 잘 싸웠던 너 엄마가
완전히 히스테리로 변했다.
- 이 원수같은 놈아, 오려면 혼자 오는거지 왜 식구들을 다 데리고 와서 이런 개고생을 시켜. 이 나쁜 놈아. 이 원수야.
너 엄마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몌 통곡 했다.
- 내가 네놈을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겠다.
- 여보, 갑자기 왜 이래.
- 머라구. 몰라서 묻는거야. 그 아가리를 찢어놓고 말테다.
이 원수야. 내가 분해서 못살겠다.
네놈을 갈아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겠다.
이렇게 너 엄마는 모든 폭언을 총동원하여 나의 인격을 여지없이 깔아 뭉갰다. 눈동자는 분노의 불길로 이글거렸다.
주변에 딴탄한 집기라도 있으면 집어서 나를 살해할 기세였다. 그러나 방에 그런 집기는 없었다, 유일하게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슬리퍼 뿐이었다, 너 엄마는 마침내 슬리퍼를 집어들고 나를 무차별하게 난타 했다.
애들이
- 엄마, 그러지 마.
라고 애걸해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미얀마는 아직도 남존여비 사상이 대단한 나라였다.
여자는 남자에게 절대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남편이 아무리 못났어도 심지어 마약 중독자라도 이혼은 하지 않았다 그런 나라에서 처가 보인 패륜적인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점잖고 무던해 보이던 남자주인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던지 마침내 행동에 나섰다 그는 씩씩 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올가미를 거머쥐고 올라 왔다. 그리고 성난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너 엄마의 목에 올가미를 걸려고 했다. 올가미가 너 엄마의 목에 걸리기만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기일발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죽으면 정말 개죽음이었다. 어디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그리고 죽인 사람은 죄가 될 것도 없었다. 지역의 특성상 방캄은 그런 곳이었다. 나와 애들이 주을 힘을 다해 살기등등한 주인을 저지했다. 너 엄마는 미친 중에도 위협을 느꼈는지 발광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너 엄마가 너들을 못살게 굴었다.
- 가자. 우리 중국에 돌아가자. 저놈 믿고 따라다니다간 우리 다 죽는다. 가자 중국에 돌아 가자.
애들은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고 벌써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너들은 당연히 엄마를 따라주지 않았다.
너 엄마는 너들을 중국으로 가자고 잡아 끌고 너들은 엄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죽기내기로 발버둥쳤다. 그리고 나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이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너 엄마는 혼자서 중국에 간다고 떠났다.
- 엄마, 가지 마. 엄마, 돌아와요. 엄마 돌아와서 같이 살아요.
애들이 그렇게 애처롭게 부르짖었지만 처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만감이 교차 했다,
나는 중국을 떠날 때 너 엄마가 따라주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떠나려고 결심했던 사람이다. 내가 가족에 대해 무책임해서가 아니다. 당시 사정상 내가 가정을 위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있으므로 가정에 큰 회근이 될 수 있었다. 그처럼 당시 나의 상황은 급박 했다. 이같은 나를 남편이라고 따라 준 너 엄마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그리고 부부로써 동지로써 수갑을 차고도 하나님을 부르짖던 너 엄마가 아니었던가. 그랬던 너 엄마가 순식간에 딴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과 허무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르다는 말이 있듯이 마음 心자는 쓰기는 쉽지만 마음은 알 수가 없다더니 정말 실감이 나는 말이었다.
너 엄마가 중국으로 갔으니 나의 어깨는 배로 무거워졌다. 이제 나는 너들의 아빠이고 엄마로써 일인이역을 감당해야 했다. 나는 어떤 고난이 있을지라도 너들을 포기하지않고 잘 키우리라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다.
현실은 암울했다.그러나 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너 엄마가 중국으로 떠난 후 나마음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나는 너 엄마가 정말 중국에 간줄 알고 더 이상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저녁무렵에 너 엄마가 돌아 왔다. 애들을 먹이겠다고 과자까지 시들고 왔다. 낮에는 그렇게 질풍노도와도 같던 얼굴이 호수처럼 잔잔 해 있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일단 때가오면 다 풀리게 되어 있지만 사람은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해 이런 저런 우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갈구하던 때가 드디어
왔다.
8월14일 날, 한 청년이 나를 데리러 왔다. 인민군 본부에 돈을 수령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인민군 본부는 우리가 건넜던 강 건너 편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이 뱃길은 우리가 처음 탔던 그 뱃길이 아니고 아래로 많이 내려와 있었다. 강물은 이쪽 강가로 치우쳐 흘렀다. 배가 나룻터에 와 닿을 무렵 시체 한 구가 떠 내려 왔다. 시신은 부풀어 올라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 났다. 그러나 사공과 안내인은 무덤덤 했다. 그들로써는 자주 목격하는 일이라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민군 본부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를 맞는 담당자는 바로 그 상급자였다, 이번까지 세번째 만남이라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먼저 디까오라(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그는 밍글라바(환영)라 화답하며 커피도 권하면서 친절을 베풀었다.
잠시 후 여직원이 서류를 들고 나왔다. 나는 여직원의 요청에 따라 서류에 서명을 했다, 상급자는 여직원에게서 건네 받은 돈 봉투를 나에게 주며 확인해 보라고 했다.
나는
- 제수디마레
- 제수디마레
라며 연거푸 감사 했다.
인민군도 이렇게 신뢰를 지키는 조직이라는 것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사건처리가 지연된 것은 서씨가 구금 중에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씨는 추적 중인 인민군의 쏜 총에 맞아 생포 됐다는 것이었다. 서씨는 무릎과 대퇴구의 부상이 심각하여 평생 장애인으로 살 것이라고 했다.
돈에 눈이 멀어 평생 나쁜 짓만 일삼아 온 결과는 그렇게 처참했다.
인민군은 우리의 길을 직접 안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상 우리에게 세 번 째 가이드 역할을 한 것이다. 폭풍우가 지나면 쾌청한 날이 오듯이 나쁜 일이 오히려 좋은 일이 되었던 것이다.
이튿날 우리는 방캄을 떠나게 되었다.
나는 주인집에 고마움의 표시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사례비를 드렸다.
시골 사람들의 인심은 후하고 정은 순수 했다. 우리가 간다는 소문을 들은 이웃 사람들이 몰려와 연거푸 따오마젠긍쟈레를 여거푸 외치며 우리를 전송했다. 주인집 남자의 여동생은 소학교 교사였는데 나더러 가면 꼭 편지를 하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문자도 다르고 이름도 주소도 모르니 편지는 아직 쓰지 못하고 빚으로 남아 있다.
너의 엄마
를 용서해 준 그 주인이 아직도 너무 고맙다. 우리가 오늘을 누리는 것도 그 분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방캄은 내가 경유했던 곳 중에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이다.
우리는 다시 무싸이로 나왔다. 무싸이 시내에 우리가 아는 집이라면 우단네 집 뿐이었다.
그 집에 찾아가서 여주인께 사연을 얘기했더니 우리를 기꺼히 받아 주었다. 우리는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겸 시장에 나갔다.
눈에 들어온 모든 광경이 신기 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아 우리는 대충 눈요기만 했다.
시장에서 파는 도시락이나 음식 포장에는 스티로폼이나 비닐 같은 것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포장으로 사용하는 것은 활엽수 잎이었다, 그 중에서도 바나나 잎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우리는 바나나 잎으로 포장된 먹거리를 사들고 주인집에 왔다. 그런데 내가 중국에서 갖고 나온 모든 서류가 사라진 것이다. 누군가가 돈으로 착각하고 훔쳐간 것이었다. 나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사례하겠으니 돌려 달라고 사정했다. 잠시 후 그녀의 남편이 돌아 왔다. 그녀는 남편을 나무라며 빨리 돌려주라고 몰아붙였다. 이 일로 인하여 부부지간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돌발 사건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또 한번의 변곡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과의 만남은 잠시였지만 그들은 우리의 네번째 가이드 역할을 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집 뒷편에는 우리의 동포가 살고 있었다, 그 동포는 앞집에 무슨 일이 있는가 구경 나왔다가 우연히 우리를 만난 것이다. 그는 30대 초반이었는데 이름은 马金亮이며 회민이었다. 어렸을 때 중국에서 건너 왔다고 했는데 중국어에 능통했다. 마씨는 우리에 대한 동정심이 생겼다. 그는 오갈데 없는 우리를 자기네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마씨는 우리의 다섯번 째 가이드가 된 것이다. 마씨네 집도 역시 대나무 집이었다. 다 그랬듯이 마씨도 가난하게 살았다. 그래도 집이 넓어 두 집 식구가 살기에는 충분했다. 마씨네는 모두 세 식구였다. 처는 빠이족이었고 슬하에 다섯살 난 딸이 있었다. 이 부부는 마음씨가 착했다. 마씨는 마약은 물론
담배도 입에 대지 않았다. 우리는 두 내외의 보살핌 속에서 오랜만에 안정된 삶을 누리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시내 변두리였다. 동네 가장자리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실개천을 내려가는 데는 비탈길이 있었는데 동네 모든 사람들이 이 비탈길을 이용했다. 실개천 변에는 작은 샘이 하나 있었다. 샘은 보잘 것 없었지만 이 동네의 유일한 생수원이었다. 샘물이 너무 더디게 솟아오르므로 한 바가지를 뜨면 한창 기다렸다가 다시 떴다. 샘에는 물을 길러 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북방인의 안목으로 보면 숨 막히게 답답한 일이었다.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조급해하거나 짜증내거나 불평하는 일이 없었다. 모든 것을 순리대로 받아들였다.
비탈길 바로 아래 쪽은 여자들의 노천 샤워장이었다. 여자들은 롱지(미얀마치마)로 젖무덤을 약간 가리고 샤워를 했다. 그녀들은 바가지로 물을 떠서 몸에다 쉼없이 물을 끼얹었다. 옆에서 누가 훔쳐보건말건 의식하지 않았다. 그곳은 자연적으로 여자들의 전용 샤워장이 되었다. 남자들은 먼 구석진 곳을 찾아서 샤워를 했다. 남자들을 그렇게 여자들에 의해 코너로 몰리면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미얀마에서는 외출을 하려면 주민 등록증에 해당하는 마방딩을 소지해야 했다. 하루는 내가 마방딩을 회제로 마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 돈만 있으면 마방딩을 만들 수 있소?
내가 마씨에게 물었다.
*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지요. 하지만 목돈이 있어야 합니다.
- 확실하게 돈은 얼마면 가능하오?
*제가 솔직하게 말할께요. 우리집 사람의 둘째 삼촌이 정부 공직자거든요.그분께 부탁하면 훨씬 싸게 만들 수 있어요.
마씨가 제시한 액수는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액수였다. 나는 마씨가 제시한 액수를 그에게 넘겼다.
그리고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마방딩이 내려오는 날을 기다렸다.
마씨는 마방딩 문제는 잘 풀리고 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다음 수순은 내지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마씨 부부는 우리를 데리고 시장에 나갔다. 이 기회에 나는 미얀마인들의 생활상을 심층있게 꿰뚫어 볼수 있었다. 시장은 쇼빙객들로 붐볐다. 공산품 대부분은 made in china로 넘쳤다. 그걸 보면서 미얀마는 중국의 경제 식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광경이 신비하고 흥미로웠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풍요롭지는 않았으나 여유롭고 느리고 평화로웠다. 세계인은 중국인을 만만디라고 부른다. 이제 만만디는 세계공용어가 되었다. 그런데 미얀마에 와보니 미얀마 사람들이야말로 만만디였다. 미얀마 사람들은 세월의 오고감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무사태평하게 살았다.
빨간색 가사를 입고 탁발을 다니는 매발의 스님들도 나에게는 진풍경이었다.
여자들은 두 뺨과 턱, 콧잔등에 노란 분가루를 바르고 다녔다. 그 분가루는 다나카란 나무를 돌판에 갈아서 만든 것이라 해서 다니카라고 했다.
다나카는 선크림처럼 자외선 차단 효과도 있고 피부 미용에도 좋다고 했다. .듣고보니 다나카는 천연 고급 화장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은 소끕장난질 같았다. 그렇게 소꿉놀이처럼 일하면서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북방에서는 살림집 한채를 짓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미얀마에서는 하루면 족했다. 대나무집은 그렇게 짓기가 쉬웠다. 일년 내내 더운 날씨가 미얀마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은 신기한 일들로 넘쳤다. 쌀은 한 공기씩 팔았고 시가는 한 가치씩도 팔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자 마씨가 설명을 해 주었다.
- 미얀마 사람들은 다 건달이라고요.
배가 고프면 쌀을 한공기 사다 해먹고 담배 생각이 나면 한 가치 사서 피우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그날그날 그럭저럭 살아가는 겁니다. 오늘 하루 살면 됐지 내일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내일은 내일 가서 살면 됩니다. 사는 게 이처럼 서글푸지만 긂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미얀마인 행세를 하기 위하여 복장부터 바꿔야 했다. 미얀마인들이 입는 복장은 단순 했다. 남녀가 천편일률적으로 롱지를 입었다. 롱지란 큰 자루같이 생긴 미얀마식 치마였다. 남자들이 입는 롱지는 피소라 했고 보통 체크무늬였다. 여자들이 입는 롱지는 타메인이라 했는데 화려 한 꽃무늬였다. 롱지는 입기도 간편 했다. 먼저 몸통을 롱지에 집어넣고 양손으로 각각 양쪽 끝을 잡아서 배꼽쪽으로 끌어 온다. 그리고 앙쪽을 교차시켜 배꼽 안쪽으로 밀어 넣으면 되는 것이었다.
미얀마인들은 집을 나서면 네모난 백을 어깨에 걸치고 다녔다. 모양은 작은 자루 같았다. 위는 지퍼도 없이 완전 개방형이었다. 백은 수공으로 짠 것도 있었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것도 있었다. 신발은 엄지 발가락과 두번째 발가락 사이에 끼어 신는 슬리퍼였다. 이런 슬리퍼는 일본 수입품이 많았다,
우리 네 식구는 복장을 한 세트씩 구입하여 입었다. 난생 처음 입어보는 치마라 좀 쑥스러웠다. 그러나 롱지를 입어보니 바지보다 훨씬 시원 했다. 나는 이 사람들이 치마를 입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씨 부부는 우리의 매니저나 된 것 같았다. 그들은 우리가 입은 복장을 세세히 훑어보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특히 내가 제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대륙 사람이지 미얀마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바탕 웃기도 했다. 그날 리허셜은 그렇게 끝냈다.
9월6일 날, 우리는 고대했던 마방딩을 손에 쥐게되었다. 이튿날 우리는 소형 버스를 타고 라슈로 향했다. 버스는 트럭을 리모델링한 것이었다. 위에 뚜껑은 햇빛과 비를 막기 위해 돛천(조크)를 얹었고 삼면을 개방되어 있었다. 우리는 무싸이 검문소를 무난히 통과 했다, 시작은 괜찮았다, 멍유를 통과할 때는 감회가 깊었다.
달리는 차안에서 보는 미얀마의 자연은 아름다웠다. 산은 온통 열대림으로 우거져 있었다. 미얀마에는 공장이 없어 지연은 오염되지 않았다. 산에는 티크나무가 그렇게 많다고 했다. 티크나무는 가볍고 썩지 않아 배를 만드는데 많이 사용한다고 했다. 그 좋은 티크나무를 일본에세서 많이 수입해 간다고 했다.
내가 놀란 것은 미얀마에서는 산꼭대기에도 벼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북방에서는 벼농사를 짓자면 관개수로와 배수로가 필수지만 미얀마에서는 그런 시설이 전혀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미얀마의 날씨는 우기와 건기 두 계절로 나뉘었다. 여름 우기에는 하루에도 비가 몇차례씩 내렸다. 그러므로 관개시설이 없이도 얼마던지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천수답이었다.
우리가 달리는 길은 콘크리트 도로 였다. 이 도로는 1940녀도에 일본이 동남아를 침럑하기 위하여 건설된 것이라고 했다. 도로는 제대로 보수가 되지않아 곳곳이 패이고 엉망진창이었다. 버스는 만취객처럼 비틀거리며 힘겹게 이동했다. 나는 아무리 흔들려도 괜찮은데 너엄마는 차멀미를 심하게 했다. 중앙정부에서는 매년 도로 보수비를 내려 보내지만 지방관리들의 횡령으로 도로보수는 시늉만하고 만다는 것이었다. 몇시간을 달려서 우리는 라슈 변두리에 이르렀다.
변두리에는 크지는 않지만 수심이 깊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 강은 라슈시의 천연 해자역할을 했다. 이 강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들어 갈수도 나올 수도 없었다. 강에는 다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이 다리는 라슈와 라슈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량이었다. 다리를 거너면 바로 검문소였다. 검문소에 도착하면 모든 차량이 멈추고 모든 사람이 차에서 내려와 일제히 검문을 받아야 했다. 검문 대상은 주로 중국인이었다. 현지 중국인들은 경제적인 기반은 있었지만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았다.
검사관들은 중국인들어게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끈질기게 추궁하여 돈을 뜯어 냈다.
나는 완전 미얀마 옷차림이었지만 검사괸들은 내가 대륙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대뜸 알아챘다. 이로 인해 버스기사와 마씨 그리고 나의 마방딩까지 모두 압류 당했다. 검사관들은 버스기사와 마씨를 외국인을 불법 입국시킨 범죄자로 취급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이민국 관원들과 힘든 담판을 벌여야 했다.
라슈의 가옥에는 대륙에서 불법 입국한 중국인들은 물론 그들과 연루된 현지 중국인들이 많이 수감되어 있다고 했다. 이런 사람들은 한번 수감되면 기한이 없다고 했다.
이민국에서는 두 사람에게 합의금을 제시 했다. 그러면서 감옥과 벌과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협박 했다. 두 사람은 그곳 상황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 당연히 합의금을 선택 했다. 두 사람은 당장 그만한 합의금을 낼 돈이 없었다. 다행인 것은 이민국에서 사흘간의 유예기간을 주었다. 이민국 관원이 마씨 부부와 우리 가정을 이민국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사를 마친 후 시내 모 여관에 투숙케 했다. 이 좋지 않은 일이 우리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민국 관원은 우리에게 여섯번 째 가이드 역할을을 한 것이다.
이튿날 아침에 마씨 부부는 우리를 시내의 어느 빠이족 집에 맡겼다. 그들은 저녁에 데리러 오겠다 약속하고 가버렸다.
이 빠이족 집은 매우 부유했다. 식구 중에 남자는 없고 여자만 셋이었다. 주인은 50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얼굴이 동그랗고 눈도 동그랏고 입도 동그랬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굉장히 깔끔하고 야무져 보였다. 방은 어떻게 청소를 했는지 반질반질 했다.
그녀는 두 딸이 있었는데 터울차가 컸다. 미얀마의 사내들은 5,6세가 되면 출가하여 동자승으로 2년간의 수련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여자애들도 원하면 수련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 열 두어살 쯤 되어 보이는 이집 막내 딸은 엄마의 강권으로 출가하여 파고다에서 수련 중이었다. 그러나 파고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며칠 전에 몰래 파고다를 빠져 나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직도 빡빡머리 그대로였다. 얼핏보면 사내아이 같았다. 이 집은 독실한 불교 가정으로 보였다. 금빛 찬란한 불상은 온 거실을 압도하고 있었다. 알고보니 이 집은 모녀 무당집이었다.
점을 보러 온 사람들은 먼저 불상에 기도하고 보시를 했다. 그리고 주인에게 점을 보았다.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았다. 밤이 되어 손님이 끊기면 보시함의 돈을 모두 안방으로 옮겼다.
불상은 이 집에 돈을 벌어주는 우상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이중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저녁에 온다던 마씨 부부는 오지 않았다. 다행히 주인께서 불심을 발휘하여 하루 밤을 묵게 했다. 덕분에 밖에는 나 앉지 않게 되었다.
이튿날은 9월8일 날이었다. 주인은 새벽에 파고다에 간다고 나서면서 우리에게게 용돈과 바나나잎 도시락을 주었다, 그러면서 오늘은 꼭 떠나라는 것이었다. 만약 누가 고밞하면 큰일 난다고 했다. 우리는 전 날 묵었던 여관을 찾았다. 여관 주인의 말에 의하면 마씨부부는 그날 저녁으로 집에 갔다고 했다. 우리가 맡겨 두었던 짐은 누가 다 가져가고 옷만 몇벌 남아 있었다.우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주인 집에 돌아 왔다, 오후 늦게 주인이 돌아 왔다. 그녀는 우리가 아직 나가지 않은 것을 보고 화를 참지 못했다. 그러면서 당장 나가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이 기막힌 사건이 우리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와 그녀의 딸은 우리의 일곱번 째 가이드 역할을 한 것이다.
앞에 무슨 불행한 일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이 집을 나가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더니 하늘이 뚫린 듯 장대비가 쏟아졌다. 라슈는 도시 배수시설이 허술해서 도로는 삽시간에 강물이 되어 출렁거렸다. 우리에게 최대의 위기였다. 앞이 캄캄했다. 사람은 절망의 수렁에 빠지면 신을 찾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거 없이 손에 손을 맞잡고 거실 바닥에 꿇어 앉았다.
-하나님아버지, 새들도 둥지가 있고 개미들도 살 굴이 있습니다. 이 비오는 날에 쫓겨나면 우리는 어디가서 살랍니까. 하나님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십시요.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그렇게 눈물의 기도를 마치고 머리를 들었다. 우리 옆에는 30대의 여인이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아하고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유난히 큰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뜨거운 동포애로 맞이 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 사람을 구해주지 않으면 내가 죄받고 저주받을 것이란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고 한다. 그 정도로 내 표정이 절박 했던 모양이다. 주인은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 왜 쓸데없이 와서 남의 일에 비치는 거요.
*그렇게 화만내지 마시고 제말 좀 들어 보세요. 저는 오고 싶어 온 사람이 아니에요. 집에 막내 딸이 나를 찾아와서 이러이러한 중국인이 있다고 해서 제가 오게된 거에요.
내막은 이러 했다.
우리가 눈물의 기도를 드릴 때 그 딸애의 마음속에 불심이 심어진 것이다. 그 딸애가 보기에 우리가 너무 불항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마음에도 자기 엄마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비가 멎은 다음에 가라해도 되는데 비올 때 나가라면 이 사람들은 어디 가서 살겠는가고 걱정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생각 끝에 우리 앞에 나타난 중국인 여인을 찾아 갔던 것이다. 주인은 딸이 쓸데없는 일을 저질렀다고 욕하며 화풀이를 했다.
동포 여인은 난감했지만 평정심과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 아주머니, 집에 딸이 좋은 일을 했는데 잘못된게 없잖아요. 이제 안심하세요.
이 사람들은 중국인이니까 제가 데리고 갈께요.
그리고 우리에게 말했다.
- 일어나서 우리 집으로 갑시다. 오늘 부터 우리 집에서 같이 삽시다.
이렇게 우리는 가장 큰 위기에서 생명의 은인을 만나게 되었다.
미얀마에는 소나기가 자주 내렸다. 소나기가 지나가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날씨가 쾌청했다. 그렇게 퍼 붓던 소나기가 멎고 구름 한 점없는 새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가로수와 화초는 빗물에 갖 샤워를 하고 나온 듯 싱그러웠다. 눈부시게 찬란한 태양이 우리를 따뜻하게 감쌌다.
이 여인의 이름은 高子鸾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절망 중에 만난 생명의 은인이다. 그녀와의 만남은 나에게는 분만의 사건이었다. 산부의 고통은 분만 때 극에 이른다고 한다. 아울러 분만과 더불어 산부의 기쁨도 최고에 이른다고 한다. 분만은 고통과 기쁨의 조우이며 아울러 고통과 기쁨의 분기점이다. 생명탄생의 서곡은 고통과 기쁨의 정점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녀와의 만남은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만남이었다.
정말 신기하고 오묘 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우리를 안내했던 가이드들은 마치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연출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어떻게 그렇게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우리를 고여인께 인계했는지 놀라울 뿐이다.
부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시가 생각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놀라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것이니라
마음은 미래를 바라보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리면 그리움이 되리니
과거의 모든 것은
심지어 고통스러웠던 것까지
내게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아편의 원료인 罂粟花앵속화를 양귀비라고 한지는 알 수가 없다. 양귀비는 노래와 춤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고 절세 미인이었다. 양귀비는 본래 당현종 아들의 비였다. 말하자면 현종의 며느리였다. 현종은 처음 양귀비를 보는 순간에 애정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며느리인 杨玉環을 귀비로 세웠다.그로부터 당나라는 추락하기 시작하여 멸망에 이른 것이다. 마약은 사람을 죽이기도하고 살리기도 한다.
마약은 양귀비와 같이 매럭적이고 또 마력적이다. 내가 추측컨대 한국인들이 아편을 양귀비라 함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杨艾 ,徐世佑와 같은 사람은 나를 해치려 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나는 미얀마에서 최초로 만났던 징에게 감사한다.
양씨와 서씨에게 감사한다.
인민군에게 감사한다.
우단 부부에게 감사한다
马金亮부부에게 감사 한다.
무당과 그 딸에게 감사 한다.
이들은 나를 위해 다리를 놓았던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이 가설한 다리를 건너 너 고아이의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미얀마는 불교 국가다. 불교는 인과보은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인과는 돌고 돌면서 상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三世因果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선을 행하고 덕을 쌓으면 후손들이 복을 받는다고 믿는다. 나는 불교도가 아니므로 윗대가 쌓은 덕에 내가 복을 받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신의 은총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왜냐면 신의 은총을 받기에는 내가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겪었던 엄청난 일들을 불가해한 필연이었다고 생각 한다.
너 고아이는 내 생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아울러 내 길을 안내 했던 가이드들도 내 생애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들이다. 왜냐면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이런 말로 비정한 인간관계를 꼬집는다.
이런 사람들은 아마 나쁜 사람들의 은혜를 입어 보지 못한 것 같다.
나쁜 사람들의 은혜를 많이 입어 본 나로서는 당연히 거꾸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은혜는 돌에다 새기고
원수는 물에다 쓰라고 말이다
1989년9월8일 날에 보였던 고여인의 숭고한 형상이 아직도 내 앞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일어나서 우리 집으로 갑시다.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함께 삽시다.고 말했던 너 고아이의 음성이 나의 귓전에 쟁쟁하게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