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식일학교 장년교과 보충교재(예언의 신 인용구들/Ellen G. White Notes)
(1) 이 자료는 대총회 안교부가 매기마다 안교 장년교과와 함께 매일의 공부 내용과 연결하여 새로운 통찰력과 신선한 관점을 얻도록 돕기 위해 출판하는 보충교재 [Ellen G. White Notes for the Sabbath School Lessons]-예언의 신 인용구들을 한글판으로 바꾼 것입니다. (아직 한글번역본이 없는 예언의 신 인용구는 게시자가 번역함)
(2) [활용방법] 매일의 교과를 공부한 후, 그날에 해당하는 부분을 연결하여 묵상하면 큰 유익이 됩니다.
<2024년 3기 – 마가복음>
제6과 속을 드러내 보이심 (Inside Out)
<8월 3일/안, 서론>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유대 나라의 소년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랍비들이 만든 규례로 둘러싸여 있었다. 생애의 가장 사소한 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동을 제한하는 엄격한 규정이 세워져 있었다. 청소년들은 회당 교사들의 지도하에 정통적인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준수해야 할 무수한 규칙들을 배웠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그분은 유년 시절부터 랍비의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행동하셨다. 그분은 늘 구약 성경을 연구하셨으며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라는 말씀이 언제나 그분의 입술에 있었다.
백성의 형편이 점점 공개 되자 그분은 사회의 규칙과 하나님의 율법이 언제나 상충됨을 아셨다. 사람들은 말씀에서 떠나 그들 자신이 만든 이론을 높였다. 그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유전적 의식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예배는 한낱 의식의 반복에 불과했다. 그 예배가 가르치고자 의도한 거룩한 진리는 예배자들에게 숨겨지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믿음 없이 드리는 예배에서 그들이 아무런 평안도 얻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다. 그들은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그들에게 임하게 될 심령의 자유를 몰랐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 오셨으므로 그분은 사람의 규칙과 하나님의 법도를 혼합시키는 것을 용인할 수 없으셨다. (소망, 84)
◎ 먼저는 군중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부정케 하는 것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더욱 충분히 설명하셨다. 깨끗함과 더러움은 심령과 관계가 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악한 행실, 악한 말, 악한 생각, 하나님의 율법을 어김이요 사람이 만든 외적인 의식을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저희의 거짓 가르침이 폭로되자 정탐꾼들이 분노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 그들은 예수께서 성난 관원들을 달래시기를 바라면서 그분께 말하였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그분께서는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랍비들이 그토록 중히 여기는 관습과 유전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지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백성에 대한 저희의 권위가 아무리 클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시험을 견뎌 낼 수 없었다. 하나님의 계명을 대체한 인간의 어떠한 창안도 무가치하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소망, 397~398)
◎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교훈으로 대체하는 일은 그쳐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조상의 유전에 기초를 둔 것이나 다름없는 제도와 관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단순히 인간의 권위에만 기초를 둔 이와 같은 제도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도를 대신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유전에 집착하고 관습을 존중하며 그들의 오류를 보여 주려고 하는 자들을 증오한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의 믿음에 주의를 환기시키라는 분부를 받고 있는 이때 우리는 그리스도 시대에 나타났던 것과 똑같은 증오심을 본다. (소망, 398)
<8월 4일/일, 하나님의 계명인가 사람의 전통인가> 예언의 신 보충자료
◎ 결례 의식은 아주 엄중하게 실시한 규칙 가운데 하나였다. 먹기 전에 지켜야 할 의식을 무시하면 가증한 죄로 간주되어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범죄자를 죽이는 것이 하나의 미덕처럼 인정되었다.
정결에 대한 규칙은 무수히 많았다. 사람이 평생 배워도 다 배우지 못할 정도였다. 랍비의 요구를 지키려고 힘쓰는 자들의 생애는 의식적인 부정에 대한 긴 투쟁이요, 씻음과 정결의 끝없는 반복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지도 않으신 쓸데없는 구별과 규칙에 정신을 빼앗기는 반면 그들의 관심은 그분의 율법의 대원칙에서 떠나가 버렸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이 씻는 의식을 지키지 않았는데, 정탐꾼들은 이 소홀함을 비난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아니하고 제자들을 비난하면서 그분께 나왔다. 그들은 군중이 있는 곳에서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소망, 395-396)
◎ 제사장들과 랍비들이 외관적으로 하나님께 열성을 보인 것은 자기 재산의 확대를 위한 저희의 욕망을 은폐하려는 가면이었다. 백성은 그들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우지도 않으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까지도 인습적인 편견과 랍비들의 권위에 의해 그들에게 지워진 그 멍에를 완전히 벗어 버리지는 못하였다. 이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본심을 폭로하심으로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갈망하는 모든 사람을 유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힘쓰셨다.
교활한 정탐꾼들을 향하여 그분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바리새주의의 전체 제도에 대한 규탄이었다. 그분께서는 랍비들이 하나님의 명령보다 그들의 율법을 더 높임으로 자신들을 하나님보다 높이고 있다고 선언하셨다.
예루살렘에서 온 대표자들은 분노로 충만하여졌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을 범하는 자라고 비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저들의 유전에 반대하며 율법의 옹호자로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시하신 율법의 대강령은 사람들이 지어낸 쓸데없는 규칙들과 현저히 대조되었다. (소망, 397)
◎ 인간의 권위, 교회의 관습 혹은 조상들의 유전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하신 말씀에 내포된 경고에 유의하도록 하자. (소망, 398)
<8월 5일/월, 깨끗한 손인가 깨끗한 마음인가>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사탄의 지배하에서 그분의 백성을 구속하시는 것보다 그리스도께서 더 바라시는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밖에서 오는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함을 받기 전에 먼저 안에서 역사하는 그의 권세에서 구원함을 받아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세속적인 것과 이기심과 조급함과 그리스도와 같지 않은 품성에서 깨끗함을 받도록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신다. 그 깊은 환난의 물결이 우리를 덮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가 더러운 죄악에서 깨끗이 씻음을 받고자 하는 깊은 열망을 갖도록 하시며 그 시험을 통하여 더욱 순결하고 더욱 거룩한 기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시련의 풀무에 들어갈 때 이기심으로 어두워진 심령을 가지고 들어가는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어려운 시험을 참고 견딘다면 그 시험에서 나올 때는 신의 성품을 반사하게 될 것이다. 환난을 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때 여호와께서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6)라고 하신 말씀이 성취된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의 기도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의 백성이 시험과 시련 중에서 낙심하고 끈기 있게 기도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실물, 174-175)
◎ 우리 마음의 투쟁과 우리 본성의 연약함을 이해하시는 우리 구주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신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온유와 충성과 자비는 그리스도인 품성의 요소들이다. 이 귀한 은혜들은 성령의 열매요, 그리스도인의 면류관이요 방패이다. 이러한 은혜가 다스리는 가정에서는 아들들은 “어려서부터 자란 풀 같”고, 딸들은 “궁전의 모양대로 다듬은 모퉁잇돌 같”다. 이러한 하늘의 성취는 상황이나 인간의 불완전한 판단 의지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품성을 함양하는 것보다 더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으며, 가장 고귀한 열망은 더 높은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없다. (영문 시조, 1886년 9월 9일)
◎ 예수께서는 지식과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다. 그분이 유대인들을 비난한 것은 그들의 형식주의와 위선을 정죄한 것이다. 형식주의에 대한 그분의 신랄한 책망과 질책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동일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예배를 영적인 예배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헛된 예배가 될 것이다. 종교의식에는 진실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단순히 허식이고 공허한 혐오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사장들과 종교 교사들의 형식주의와 위선을 질책하셨지만,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고난당하는 사람들, 낙담한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교훈은 얼마나 관대하고 부드러웠는가? 제사장들과 관원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살아 있는 초장을 파괴하고 생명수의 샘을 더럽혔다. 그들은 거짓 교훈으로 이해력을 혼란스럽게 하고 분명한 것을 흐리게 했다. 그들은 마음의 완고함과 더러움과 교만과 이기심으로 하나님을 그릇 대표하였다. (Sabbath-School Worker, 1894년 12월 1일)
<8월 6일/화, 개를 위한 부스러기> 예언의 신 보충자료
◎ 그 여인은 더욱 큰 열성으로 자기의 사정을 역설하고 그리스도의 발아래 부복하여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부르짖었다. 겉으로 보기에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무정한 편견을 따라 여전히 여인의 탄원을 거절하시는 듯이 대답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백성이 받을 복을 이스라엘과는 다른 외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신 것이나 다름 없었다. 열성이 부족한 간구자였다면 이 대답을 듣고 전적으로 낙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은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의 표면상의 거절 그 이면에 숨길 수 없는 긍휼하심을 그 여인은 보았다. … 그와 같이 이스라엘에게많은 축복이 주어졌다면 그 여인이 받을 축복 또한 있지 않겠는가? 그 여자는 개처럼 취급되었다. 그러므로 그분의 풍성하심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겠다는 개의 주장을 왜 못하겠는가? …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말씀의 빛을 받지 못하던 불행하고 멸시를 받는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을 만나셨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감화에 즉시로 굴복하고 자기가 구하는 은총을 주실 그분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었다. 그 여자는 만일 한 마리의 개가 되는 특권을 얻을 수 있다면 개로 취급되는 것을 기꺼이 감수할 것이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민족적, 신앙적 편견이나 교만이 없었으므로 즉시 예수님을 구주로 그리고 자기가 구하는 것을 모두 하실 수 있는 분으로 시인하였다. (소망, 401)
◎ 구주께서 흡족해하신다. 그분은 그분께 대한 그녀의 신앙을 시험하셨다. 그 여인을 취급하신 일을 통해 그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버림을 받은 자로 여겼던 그 여인이 더 이상 외인이 아니요 하나님 집의 자녀가 됨을 보이셨다. 자녀로서 하늘 아버지의 선물을 받는 것은 그 여인의 특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인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제자들을 위한 교훈을 마치신다. 긍휼과 사랑의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면서 예수께서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그 시각부터 그 여인의 딸은 완쾌되었다. 사귀가 다시는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 여인은 자신의 구주를 시인하면서 떠나갔으며 자신의 기도가 가납되었음을 기뻐하였다. (소망, 401~402)
◎ 구주께서는 수로보니게의 여인에게 측은한 동정을 나타내셨다. 주께서 그 여인의 딱한 사정을 보시고 그를 민망히 여기셨다. 그분은 당장 그 여인에게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보증의 말씀을 해주고 싶으셨으나 제자들에게 한 가지 교훈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잠깐 동안 그의 아픈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호소를 소홀히 여기시는 것처럼 보이셨다. 그 여인의 믿음이 나타나자 그분은 그녀에게 칭찬의 말씀을 해주시고 그녀가 요청한 귀한 축복을 주셔서 돌려보내셨다. 제자들은 이 교훈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이 끈기있는 기도의 결과를 보여 주기 위하여 그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었다. (실물, 175)
<8월 7일/수, 굳은 혀> 예언의 신 보충자료
◎ 거라사의 사귀 들린 자가 고침을 받은 것은 데가볼리 지방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이곳 사람들이 돼지 떼가 죽게 된 것에 놀라 그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예수께 강권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께서 뒤에 남기신 사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다. 그분께서 다시 그 지방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 주위에 모여들었고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관습대로 말씀으로만 그 사람을 고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그의 혀에 손을 대며 하늘을 우러러보고 진리를 향하여 열지 않는 귀와 구주를 시인하기를 거절하는 혀를 생각하고 탄식하셨다. “열리라”라는 말씀에 그 사람의 말하는 기능이 회복되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그는 자신이 고침 받은 이야기를 널리 공개하였다. (소망, 404)
◎ 택함을 받은 그리스도의 종들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들의 지도자를 증거해야 한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구주의 간절한 소망이 그들의 모든 활동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처음 말씀하신,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라는 은혜의 초청이 인간 목소리로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한다. 교회는 “오라”라고 말해야 한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힘은 그리스도 편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신속하게 성취되어 가는 하나님 말씀의 예언을 세상이 주시하도록 이끄는 강력한 노력에 연합해야 한다. 불신과 강신술이 세상에서 강한 요새를 확보하고 있다. 큰 빛을 받은 자들이 오늘날 냉랭하고 불성실해서야 되겠는가? (9증언, 43)
◎ 하나님을 섬기고자 마음을 굳게 정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증거할 기회를 발견할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고자 결심한 자를 어떤 난관도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도와 말씀 연구로 얻은 능력으로 그는 덕을 구하고 악을 버릴 것이다.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신자는 기꺼이 멸시와 조소에 용감하게 맞설 것이다. 그분의 말씀이 진리인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환경에 족한 도우심과 은혜를 약속하신다. 그분의 영원하신 팔이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그분께 향하는 영혼을 감쌀 것이다. 그분의 보호 아래 우리는 안전히 쉬면서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약속을 성취시키실 것이다.
구주께서는 그분의 모본으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오셨다. 이러한 목적을 항상 염두에 두면,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물들지 않고 설 수 있다. 그의 지위나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는 의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 참된 신앙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 (행적, 467)
<8월 8일/목, 나쁜 떡을 주의하라>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예수님에게서 표적을 바라던 자들은 그들의 마음을 불신으로 강퍅하게 하였으므로 그분의 품성에서 하나님을 닮은 품성을 식별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분의 사명이 성경 말씀을 성취시키고 있음을 알고자 하지 않았다. … 하늘이나 땅에서 나타낼 수 있는 어떤 표적도 그들에게는 유익되지 않을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마음속에 탄식하시며” 이 트집잡는 무리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다시 배에 오르셨다. 슬픔으로 침묵한 채 그들은 다시 호수를 건넜다. 그러나 그들은 저희가 이전에 떠난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천 명을 먹이신 곳 부근의 벳새다로 방향을 돌렸다. 기슭에서 꽤 떨어져 나왔을 때 예수께서는 “삼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셨다. …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가단에서 갑자기 떠나왔으므로 그들은 떡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에게는 떡 한 조각밖에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의 떡을 사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믿음과 영적 통찰력이 부족하여 그분의 말씀을 이처럼 오해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몇 마리의 생선과 보리떡 몇 조각으로 수천 명을 먹이신 그분께서 그 엄숙한 경고의 말씀을 단지 육신의 양식에 대해서만 언급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 그들을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활한 논법이 제자들을 불신으로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사업을 경하게 여기도록 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소망, 407~408)
◎ 제자들은 저희 선생께서 하늘의 표적을 보이라는 요구를 들어주셨어야 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분께서 이것을 충분히 하실 수 있으며 그런 표적은 그분의 원수들을 침묵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이 비평자들의 위선을 식별하지 못하였다.
몇 달 후 … 예수께서는 같은 교훈을 반복하셨다.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 12:1).
가루 속에 넣은 누룩은 부지 중에 모든 가루를 누룩의 성질로 변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와 같이 마음속에 외식이 자리 잡도록 허용한다면 그것은 품성과 생애에 스며들게 된다.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기만적인 원칙을 넌지시 심어 주고 있었다. 그들은 저희 교훈의 진정한 취지를 숨기고 듣는 자들의 마음에 그 원칙을 교활하게 침투시키기 위하여 온갖 기회를 이용하였다. 이 거짓 원칙을 일단 받아들이면 마치 가루 속에 든 누룩처럼 품성에 침투하여 변화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그렇게 어렵게 만든 것이 바로 이 기만적인 교훈이었다. (소망, 408)
◎ 모세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도 서둘러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분의 자녀들 마음속에 있어야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오,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거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보증인가! …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아는 분, 그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체험적으로 알고 계신 분이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선포하셨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연결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아버지와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하며,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 살아 있는 포도나무의 가지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그리스도인 교육의 기초, 177~178)
<8월 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언의 신 보충자료
◎ “하나님 말씀으로 만물이 창조됨” (높힘, 6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물질세계는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다. 자연을 다스리는 법칙은 자연에 의하여 지켜진다. 만물은 창조주의 뜻을 말하고 행동한다. 구름과 비와 이슬, 그리고 햇빛, 소나기, 바람, 폭풍, 이 모두는 하나님의 감찰 아래에 있으며 자신들을 부리시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한다. 작은 풀잎의 싹이 땅을 뚫고 나오면 처음에는 잎사귀, 다음은 이삭, 나중에는 이삭이 여물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주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그분의 종들로 사용하셔서 그분의 뜻을 행하신다. 열매는 새싹에서 맨 먼저 보여지며 장래의 배, 복숭아, 혹은 사과를 둘러싸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적당한 계절에 이것들을 자라게 하시는데 이는 그것들은 그분께서 배열하시는 순서를 거역하지 않는다. 열매는 장래의 배, 복숭아 또는 사과를 둘러싸고 있는 새싹에서 먼저 보이며, 주님께서는 그것들이 그분의 역사에 저항하지 않기 때문에 적당한 계절에 자라게 하신다. 그것들은 그분이 마련하신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다. 천연계에서 보이는 그분의 작품은 절반도 이해되거나 평가되지 않는다. 이 침묵의 설교자들은 주의를 기울여 듣기만 한다면 인간에게 그들의 교훈을 가르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이성과 언어의 능력을 부여받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은사, 개선된다면 확대될 수 있는 은사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대한 스승과 동역할 만큼 고상하고 향상된 자로서 영광의 도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무질서를 낳게 되는 불완전하고 올바르지 못한 성품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불완전한 인간이 모든 것을 잘 이루도록 해놓으시고 결국 그리스도의 축복인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말을 들을 것이나, 하나님께서 값을 주고 사신 유업인 몸과 영혼들이 세속에 얽매인 습관들과 부정한 행위들로 심한 방해를 받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결코 반영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고, 그분의 말씀은 천연계 가운데 있는 이 작품들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창조는 다만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즉각적으로 하시려고 준비하신 방법들의 창고이다. 거기에는 필요 없는 것이란 없었으나, 가라지가 원수들에 의하여 뿌려졌다. 이성적인 존재만이 우리 세상에 혼란을 야기시키는가? 우리는 그분을 영광되게 할 수 없는가? 우리 하나님과 구주께서는 완전한 지혜를 가지고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그분의 완전하심을 우리에게 계시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의 믿음은 성장해야 한다. 행동과 성향에서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우리의 길을 비추는 빛과 우리의 지성에 명령하는 진리에 순종하면 이 빛과 진리는 영혼을 성결케 하고 변화시킨다. 진리의 지식, 하늘의 지혜, 영적 자질은 우리의 지혜로운 발전을 위하여 우리에게 맡겨진 하늘의 재산이다.
◎ “참된 표적” (소망, 404~409).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막 7:31)니라.
거라사의 사귀 들린 자가 고침을 받은 것은 데가볼리 지방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이곳 사람들이 돼지 떼가 죽게 된 것에 놀라 그들에게서 떠나달라고 예수께 강권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그분께서 뒤에 남기신 사자들의 말을 듣자 예수님을 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다. 그분께서 다시 그 지방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 주위에 모여들었고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관례대로 말씀만을 그 사람을 고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그의 혀에 손을 대며 하늘을 우러러보고 진리를 향하여 열지 않는 귀와 구주를 시인하기를 거절하는 혀를 생각하고 탄식하셨다. “열리라”라는 말씀에 그 사람의 말하는 기능이 회복되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그는 자기가 고침 받은 이야기를 널리 공개하였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시니 무리가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들은 아픈 자와 불구자들을 데리고 와서 그들을 예수님의 발아래 놓았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들은 이방인이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 그들은 삼 일을 계속 구주 곁에 모여 밤에는 노천에서 자면서까지 종일토록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하시는 일을 보고자 열망하였다. 삼 일이 다하였을 때 그들의 양식은 떨어졌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배고픈 채로 보내고 싶지 않아 제자들을 불러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다시 저희의 불신을 나타냈다. 그들은 벳새다에서 그들의 적은 소유가 그리스도께서 축사하심으로 무리를 어떻게 능히 먹이실 수 있었던가 보았으면서도 그들은 배고픈 무리를 위하여 식물을 늘리실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믿지 않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갖다 드리지 않았다. 더구나 그분께서 벳새다에서 먹이신 무리는 유대인이었는데, 이 무리는 이방인과 이교도들이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유대인적 편견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어서 그들은 예수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여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그분께 가지고 나왔다. 무리가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나 거두었다. 이와 같이하여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사천 명이 원기를 회복하였으며 예수께서는 그들로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그런 후에 그분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게네사렛 평야의 남단에 있는 마가단 지방에 가기 위하여 호수를 건너셨다. 두로와 시돈 지경에서 그분의 마음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확신 있는 신앙으로 힘을 얻으셨다. 데가볼리의 이방 사람들은 그분을 기쁘게 영접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그분의 능력을 가장 현저하게 나타내고 또한 그분의 자비의 사업 대부분을 행하며 교훈을 주던 갈릴리 땅에 다시 내렸을 때 경멸적인 불신을 만나셨다.
바리새인들의 대표자 중에 제사장의 일단이요 회의론자이며 나라에서 귀족 계급인 부하고 오만한 사두개인들이 파견한 대표자들이 함께 있었다. 이 두 파는 서로 앙숙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저희 자신의 지위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지배 세력의 호의를 사고 있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로마 사람들에 대한 민중의 증오를 조장하여 정복자의 멍에를 벗어 버릴 수 있는 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이제 그리스도께 대항하기 위하여 연합하였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악이 있는 곳은 어느 곳이든지 선을 멸하기 위하여 악과 악이 동맹하는 것이다.
이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그리스도께 나와서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요구하였다.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이 벧호론에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려고 나갔을 때 승리를 거둘 때까지 지휘관의 명령대로 태양은 그 자리에 멈춰 있었으며, 이와 비슷한 많은 이적이 그들의 역사에 나타났다. 그들은 이와 같은 표적을 예수께 요구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이런 표적이 아니었다. 단순한 외적 증거는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될 수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적 계몽이 아니요 영적 혁신이었다.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하늘을 살핌으로 그들은 천기를 예고할 수 있었다.),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죄를 자각하게 하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주셨던 표적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명을 보증하기 위해 하늘에서 온 직접적인 표적도 주어졌다. 목자들이 들은 천사들의 노래, 동방 박사들을 인도한 별, 침례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내려온 비둘기 모양과 음성 등은 그분을 증거하는 것들이었다.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 같은 시간을 “땅속에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요나의 전도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한 표적이 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전도는 그 세대에 한 표적이었다. 그러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얼마나 대조적인가! 그 큰 이방의 도성에 살던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온 경고를 듣고 두려워 떨었다. 왕들과 귀인들이 자신을 겸비하게 하고 높은 자나 천한 자가 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어 마침내 그들은 그의 긍휼하심을 받았던 것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 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마 12:40, 41)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이적은 그분의 신성에 관한 표적이었다. 그는 메시아에 관하여 예언된 바로 그 사업을 행하셨으나 이 긍휼의 사업이 바리새인들에게는 심한 모욕이 되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인간의 고통을 냉담하게 바라보았다. 많은 경우에 그들의 이기심과 압박이 고통을 야기시켰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고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적이 그들에겐 질책이 되었다.
유대인들로 구주의 사업을 거절하도록 이끈 것이야말로 그분의 거룩한 품성에 관한 가장 큰 증거였다. 그분의 이적의 가장 큰 의의는 그 이적들이 인류의 축복을 위하여 행하여졌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그분이 하나님에게서 오셨다는 가장 큰 증거는 그분의 생애가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낸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업을 행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셨다. 그와 같은 생애는 모든 이적 중에서도 가장 큰 이적이다.
오늘날 진리의 기별이 제시될 때 유대인들처럼 우리에게 표적을 보이라, 이적을 행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요구대로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광야에서 사탄의 꾐에 응답하여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 자신을 옹호하거나 불신과 교만의 요구를 채워 주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지 않으신다. 그러나 복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표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탄의 속박을 끊을 수 있는 것은 기적이 아닌가? 사탄에 대한 적대감은 사람 마음의 본성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입된 것이다. 완고하고 억센 의지의 지배를 받던 자가 해방을 얻고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의 이끄심에 전심으로 복종할 때 기적이 이루어진다. 강력한 미혹을 당했던 사람이 도덕적 진리를 깨닫게 되는 때도 그러하다.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를 배우는 때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겔 36:26)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다. 인간의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 곧 인간 품성의 변화는 살아 계신 구주께서 영혼을 구하려고 역사하고 계심을 보여 주는 기적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언행일치의 생애는 하나의 큰 이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지금 그리고 항상 나타내야 할 표적은 듣는 자들에게 그 말씀이 개심시키는 능력이 되게 하는 성령님의 임재하심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의 거룩한 사명에 대하여 세상에 제시하시는 증거이다.
예수님에게서 표적을 바라던 자들은 그들의 마음을 불신으로 강퍅하게 하였으므로 그분의 품성에서 하나님을 닮은 품성을 식별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분의 사명이 성경 말씀을 성취시키고 있음을 알고자 하지 않았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이나 땅에서 나타낼 수 있는 어떤 표적도 그들에게는 유익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마음속에 탄식하시며” 이 트집잡는 무리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다시 배에 오르셨다. 슬픔으로 침묵한 채 그들은 다시 호수를 건넜다. 그러나 그들은 저희가 이전에 떠난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천 명을 먹이신 곳 부근의 벳새다로 방향을 돌렸다. 기슭에서 꽤 떨어져 나왔을 때 예수께서는 “삼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시대 이래로 유월절에는 저희 집에서 누룩을 없애는 것이 관습이었으며 누룩을 죄의 상징으로 보도록 가르침을 받아 왔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가단에서 갑자기 떠나 왔으므로 떡 가져오는 것을 잊어서 그들에게는 떡 한 조각밖에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의 떡을 사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믿음과 영적 통찰력이 부족하여 그분의 말씀을 이처럼 오해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리하여 몇 마리의 생선과 보리떡 몇 조각으로 수천 명을 먹이신 예수께서는 그 엄숙한 경고의 말씀을 하시면서 겨우 육신의 양식에 대해서만 언급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을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활한 논법이 제자들을 불신으로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사업을 경하게 여기도록 할 위험이 있었다.
제자들은 저희 선생님께서 하늘의 표적을 보이라는 요구를 들어주셨어야 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분께서 이것을 충분히 하실 수 있으며 그런 표적은 그분의 원수들을 침묵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이 비평자들의 위선을 식별하지 못하였다.
몇 달 후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을 때도 예수께서는 같은 교훈을 반복하셨다.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 12:1).
가루 속에 넣은 누룩은 부지중에 모든 가루를 누룩의 성질로 변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와 같이 마음속에 외식이 자리 잡도록 허용하면 그것은 품성과 생애에 스며들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성전에 너그럽게 바치는 체하면서 부모에 대한 의무의 등한을 숨기던 “고르반”의 행습을 책망하는 중에 그들의 외식에 대한 뚜렷한 실례를 일찍이 견책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기만적인 원칙을 넌지시 심어 주고 있었다. 그들은 저희 교훈의 진정한 취지를 숨기고 듣는 자들의 마음에 그 원칙을 교활하게 침투시키려고 온갖 기회를 이용하였다. 이 거짓 원칙은 일단 받아들여지면 마치 가루 속에 든 누룩처럼 품성에 침투하여 변화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그렇듯 어렵게 만든 것이 바로 이 기만적인 교훈이었다.
이와 같은 영향들은 오늘날 하나님의 율법을 저희 행습에 일치시키는 방법으로 설명하려고 애쓰는 자들을 통하여 역사하고 있다. 이런 자들은 율법을 공공연히 공격하지 않고 율법의 원칙을 저해하는 위험한 이론을 내놓는다. 그들은 율법을 설명하되 그 능력을 파괴하기 위하여 설명한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은 이기주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들의 생애의 목적이었다. 그들로 성경 말씀을 왜곡하고 악용하며 그리스도의 사명의 목적에 눈을 감게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이 교활한 악을 품게 될 위험이 있었다. 자신을 예수님의 제자로 분류하면서도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은 자들은 바리새인들의 논증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종종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으며 그리스도 안에 숨겨진 지혜의 보화를 식별하지 못하였다. 제자들까지도 겉으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것처럼 보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자신을 위하여 큰 것들을 추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지에 대하여 분쟁을 일으킨 것이 바로 이 정신이었다. 그들과 그리스도의 사이를 막고 그분의 자아 희생의 사명에 몰인정하게 하고 구속의 오묘를 그토록 더디 이해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정신이었다. 누룩을 그 작용하는 대로 놓아둔다면 부패와 쇠퇴를 일으키는 것처럼 이기적인 정신을 마음에 품으면 영혼을 더럽히고 파멸시키는 작용을 한다.
옛적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주를 따르는 자들 가운데도 이 교활하고 기만적인 죄가 얼마나 편만해 있는가!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와 우리 상호 간의 교제가 자신을 높이려는 은밀한 욕망으로 인하여 얼마나 자주 손상을 받는가! 얼마나 자아 만족을 생각하고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갈망하는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것보다도 쉬운 길을 가려고 하늘의 교훈 대신 인간의 이론과 유전을 채택하도록 이끄는 것은 자아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 … 의 누룩을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성실 그 자체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성은 성령님께서 심어 주신 동기이며, 성령님의 효과적인 역사만이 이 동기를 불어넣으실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이기심과 외식을 쫓아낼 수 있다. 이 변화가 그분의 역사하심의 표적이다. 우리가 받아들인 믿음이 이기심과 외식을 멸할 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게 하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이 올바른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8). 이것이 그리스도 생애의 핵심이었다. 우리가 만일 그분을 따른다면 이것 역시 우리 삶의 핵심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행하시는 대로” 행하라고 명령하시므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일 2:6, 3)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