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음모는 언제나 아르누보 식이었지요 이 말은 우리가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은 돼지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겁이 많고 눈이 커다란 데다 제법 순종적이었거든요 꾸불거리며 대가리 쳐들 기회만 슬슬 엿보는 거지요 저렇게 끼리끼리 모여 있는 걸 보면 몰라요? 젊은 돼지들은 침대 위를 뒹구는 마피아와 갱을 상상했습니다 소름이 돋았지요, 요즘엔 유기농 비료를 먹고 있는데 말입니다
늙은 돼지들은 구석에 누워 심하게 낄낄거립니다 약고 퍅하고 야한 농담을 즐기죠 젊은 돼지들의 토실토실 오른 살을 부러워했고 항상 네 다리를 벌리고 잠잤습니다 인간의 아이가 태어날 때면 엉덩이로 꼬리를 뭉갠 채 잠들었지요 너무 늙은 나머지 꿀꿀거리지 못하는 돼지들도 있어요 그들은 다만 낄낄거릴 따름이지요 늙는다는 것은 이렇게나 추하고 무서운 일이랍니다
식충이들
밥을 먹는다 습기 먹은 김을 먹고, 인분을 먹고 자란 돼지고기 2인분을 먹고, 고기를 구울 때 나는 탄내도 덤으로 먹는다 풀 먹은 옷을 입고 담배를 뻑뻑 먹으며 출근을 한다 동료들에게 빌어먹을 골탕도 먹고 겁을 먹고 찾아간 부장에게 욕도 한 두어 바가지 얻어먹는다 독서 좀 하려 했더니 책 모서리는 개먹어 있고, 코 먹은 소리로 친구에게 전화하지만 전화는 먹통이고 가슴은 먹먹해진다 지금 이 순간, 공주님들은 이슬을 먹고 부잣집 어린이들은 꿈을 먹고 화투판에서는 똥을 먹는 아주머니들도 있겠지 연탄가스를 먹는 이들, 본드를 먹는 이들, 미역국을 먹는 이들, 아무렇지도 않게 꿀꺼덕 검은돈을 먹는 이들도 있을 테지
퇴근 후, 술을 처먹고 아편 대신 육포도 씹어 먹고 좀먹는 속이 걱정되어 보약도 챙겨 먹는다 왕년에는 식은 죽 먹기로 1등을 먹었었는데, 어떤 일이든 척척 거저먹었었는데, 식욕은 왕성해지는데 먹어도 먹어도 떨어지는 게 없다니! 독하게 마음먹고 회사의 공금을 좀 먹어 볼까? 콩밥도 먹고 나이도 먹고 그러다 운 좋게 한자리 해 먹으면 뇌물도 먹고 쓴소리에는 적당히 가는귀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쯤 되면 직원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고 배우자의 영혼도 야금야금 갉아먹을 테지
당신은 예외라고 생각하는가? 앉은자리에서 손 하나 꿈쩍 않고 1,397바이트를 소화시킨 무시무시한 당신은
어떤 날들이 있는 시절 3 ―속담으로 구성된 어떤 말놀이
어떤 날엔 눈만 감아도 석 자 코가 썩썩 잘려나갔다 무심코 돌다리를 두드렸다가 핑계 없는 무덤에 매장되기도 했다 아니 땐 굴뚝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매연을 뿜었다 학교에서는 낫을 놓고 ㄴ자라고 가르쳤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지만, 기는 놈만큼 생존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뛰어 봤자 벼룩이었고 날아 봤자 배만 떨어졌다 벼룩의 간과 그림의 떡이 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받았다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들이 누워서 떡을 먹거나 침을 뱉었다 간혹 침이 웃는 얼굴에 떨어지면 당장 전쟁이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마다 새우 등이 터졌지만, 등잔 밑이 어두워서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떤 날엔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고 죽 쑤어 개 주는 게 유망한 직종으로 여겨졌다 개는 대개 게 눈을 감추고 게걸스레 개밥을 먹었다 개밥 속 숨겨진 도토리를 찾으면 서당에 살지 않아도 풍월을 읊을 수 있었다 첫 술에 배불러 지레 똥을 지리는 개도 있었다 약은 인간들이 개똥에 모르는 것을 첨가해 약을 제조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수 있어 감초보다 약방에선 인기가 좋았다 어떤 날엔 얌전한 고양이가 스스로 방울을 달고 부뚜막에 오르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밤말을 듣던 쥐가 놀라서 나자빠졌지만, 그 순간에도 뒤로 호박씨를 까는 건 잊지 않았다 종이호랑이가 낱말은 가재가 듣고 반말은 게가 들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선택받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들이 종이호랑이를 맞들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떤 날엔 다홍치마 때문에 가재가 게를 배신했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말 속에 뼈가 있어서 신중하게 발라먹어야만 했다 반말을 하다가 걸리면 어김없이 목구멍에 끌려가 서 말의 구슬을 꿰는 벌을 받았다 벌을 받는 동안만큼은 마른하늘 날벼락에 콩을 볶아 먹었다 친구 따라 강남에 갔지만, 바늘을 훔쳐 담을 넘다가 소도둑이 된 구렁이만 만났다 쥐구멍에는 볕 대신 병이 들었고 고생 끝에 찾아온 건 낙이 아니라 막이었다
---------------- 오 은 /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석사.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럭키 스트라이크 ㅡ 오 은
건수를 올리기 위해
우리는 볼링장에 간다
카운터에서
발에 딱 맞는 슈즈를 신청하고
10파운드쯤 되는 볼을 고른다
남들 다 하듯
손가락 사이사이 송진 가루도 묻혀본다
세 개의 구멍에
볼링 담배 파업
세 개의 손가락을 사이좋게 끼우고
삼각진 친 핀들을 3초간 노려본다
미끈하게 잘 빠진 레인 앞
우리는 이제 미끄러져야 한다
승리의 포물선을 그려야 한다
발 디딜 권리를 되찾기 위해
트라이앵글의 빈틈을 파고들어야 한다
심호흡을 한 뒤
우리는 수상한 낌새에 바짝 다가간다
고도에 다다르기 위해
발작처럼 떼는 발짝, 발짝, 발짝
포조는 럭키를 기다리고
럭키는 스트라이크를 기다리고
볼링공은 둥글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시종 두근거리는 감각 편대
손목이 날렵하게 허공을 찌른다
발뒤꿈치가 슬쩍 내뺀다
공이 손끝에서부터 구르기 시작한다
꼭짓점을 향해
덜컹거리며 굴러가는 시한폭탄
사태가 나고
꼭대기에서부터 산이 깎인다
분열 직전의
결딴 직전의
버뮤다 삼각지대
볼링엔 행운이 뒤따랐는가?
담배는 승리만큼이나 중독적이었는가?
파업은 마침내 성공했는가?
니코틴과 타르에 찌든
포켓 존이나
브루클린 존에서
희망 비슷한 것이라도 튀어나왔는가?
스크린에서 폭죽이 터지고
승리의 비명을 지르듯
펄럭이는 산꼭대기의 깃발
다시 출발점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터키로의 망명을 꿈꾸며
스무 개의 핀에 불붙여
국회를 향해 힘껏 던진다
—《문학과사회》200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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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 감정
오 은
자고 났더니
눈에 쌍까풀이 생겼다
자, 누구한테 고백해야 할까
너는 섣불리 국경을 넘어 내 품에 파고든다
키스하기 싫은데
너의 입에 어떤 색깔의 재갈을 물릴 것인가
척골처럼
부서져버릴까 꽃병처럼
깨져버릴까 너와 나의 의견처럼 산산이 조각나
다시는 붙지 못해버릴까
너무 익은 토마토처럼 금이 가버렸는데,
결승점 금은 대체 어디에 그어졌는가
나는 불쌍한 표정을 짓고
버전을 달리하며 달리기 시작한다
15페니를 쥔 소년과 300원을 쥔 소녀 중
누가 더 불쌍합니까
우리는 서로 다른 쪽에 표를 던진다
TV 속에서 충격전이 한창인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덮밥을 퍼먹는 게 가능합니까
나는 숟가락을 놓고
재갈을 문 너의 입은 게걸스럽다
선생님, 쟤와 제 짝꿍을 바꿔도 되겠습니까
역사시간이 끝나면 제 국적을 포기해도 되겠습니까
미술시간만큼은 제 감정에 충실해도 되겠습니까
선생님은 먼저 세상을 뜨고
너는 샤프심을 새로이 장전한다
수업이 무인도에서 펼쳐지는겁니까,
아니면 나 혼자 외따로 펼쳐지는겁니까
나는 잊고 또 묻는다
묻고 금세 또 잊는다
다른 물음이 급부상할 때까지
나는 외까풀을 덮고 잠에 빠져든다
자고 일어나도
이 땅에서
매력이 있겠습니까, 나는, 털끝만큼이라도
—《현대시》201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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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들이 있는 시절 4 —소비의 시대 ㅡ 오은
어떤 날엔 거의 모든 물건들이 9,900원에 판매되었다 100원이 남는 장사라는 말에 넘어가지 않을 장사는 없었다 사람들의 지갑엔 동전만이 가득했고 그 동전들로 9,900원을 만드는 일이 매일매일 되풀이되었다 물 쓰듯 돈을 써도 물은 고갈되지 않았고 돈에서 썩은 내가 났다 어떤 사람들에겐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없는 것이 돈이었다 어떤 날엔 돈 주고 이름을 사는 게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돈 잘 버는 이름을 얻기 위해 호주머니를 찢어 가진 돈을 전부 쏟아냈다 작명소 잎에서 동전을 만지작대며 기다렸지만 정작 9,900원짜리 이름을 찾을 순 없었다 작명가는 돈을 더 많이 내야 나중에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단언했다 날이 어둑해지고 작명소가 문을 닫을 때쯤이면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이름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을 다 모아도 찢어진 호주머니를 기워내기엔 순 역부족이었다 어떤 날엔 돈을 만지고 굴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찌르는 수법이 버젓이 교과서에 실렸다 보이지 않는 돈을 가지고 세탁소에 맡기면 보이지 않는 손이 그것을 빳빳하게 펴주었다 그 돈을 갖기 위해 눈알을 굴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옆구리를 찔리는 일도 발생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고소할 수 없었다 어떤 날엔 돈으로 비단뿐만 아니라 비단결 같은 사랑도 살 수 있었다 사랑을 팔기 위해 돈 들여 온몸을 치장하는 사람들이 결국 온몸에 비단을 둘둘 마는 영예를 안았다 애정은 환율보다 더 자주 오르락내리락했고 굳건한 건 오직 돈뿐이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결합하고 해체했다가 또다시 재결합했다 어떤 날엔 어떤 날의 가격이 폭등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날엔 모든 돈이 거리의 조명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사람들은 합격과 돈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돈에 진지하게 아로새겼다 세탁소에선 밤새 불이 꺼질 기미가 안 보였고 이따금 눈먼 자들이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진 100원짜리 동전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수많은 이름들을 단 사랑이 거리를 수놓았지만, 돈에서 나는 썩은 내 때문에 아무도 그 냄새를 맡지 못했다 곳곳에서 일제히 지갑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날엔 돈을 내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단 하나, 또 다른 어떤 날뿐이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0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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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하려는 경향 (외 2편)
오 은
순간이 도래하기까지
우리는 불길하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파란불이 켜질 때까지
몸은 앞쪽으로 기울어지고
너와 나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마찰력과 만유인력이 팽팽하게 맞설 때까지
혹시 켜져 있을지도 모르는 가스 불과
근사한 연애,
마주 선 사람들의 벗은 몸 따위를 상상하며
심장의 BPM이 정점을 찍고
청색 신호총이 발사되어
약빠른 자가 가장 먼저 첫발을 뗄 때까지
제 몸을 찔러 줄 젓가락을 기다리는
설익은 감자처럼
제 몸을 채워 줄 펜을 기다리는
원고지의 빈칸처럼
순간이 도래하기까지
우리는
불길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밤
—리처드 브라운*의 경우
수염이 3mm/s의 속력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정확히 24초 후면 남자가 도착할 것이다 예처럼 세 번 현관문을 노크하겠지 처음 두 번은 가볍고 경쾌하게, 나머지 한 번은 길고 둔중하게 물론, 문은 통째로 떨 것이다 문이 떨면 모든 것이 떤다 집안의 가구들도 일제히 움찔하고 의자에 앉은 내 엉덩이도 흔들리겠지 냉장고의 무게는 150kg, 오븐의 무게는 50kg 냉장고는 꼭 오븐의 3분의 1만큼 떨 것이다 문까지의 거리를 따진다면 한 7분의 2쯤 떨 수도 있다 그런데 왜 200g 슬리퍼는 날지 않는가 중력 얘기는 골치 아프니까 오늘만큼은 하지 말자
남자의 보폭은 오늘 40cm가 채 되지 않는다 평균 보폭을 밑도는 수치다 꽉 끼는 가죽 바지를 입었거나 새로 산 구두를 신은 게지 결국 남자가 도착하기까지 2초의 여유가 생겼다 하품을 하고 나니 상대습도가 73%를 막 넘어섰다고 달력이 말해 주었다 불쾌지수도 조금 상승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이 일요일임을 감안한다면 어제와 별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남자가 도착하기 7초 전,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바라본다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냐고 꼬치꼬치 캐묻고 다니던 시절, 9시 이후는 밤이라고 한다는 걸 알아냈다 세계 인구의 69.5%가 그렇게 믿고 있다 사실, 아프리카와 남미 몇 개 국가는 조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들은 항상 10시와 12시 사이에 산다
백혈구 수치가 8199개가 넘은 것은 방금이었다 1개만 더 늘어나면 나는 백혈구과다증에 걸리게 된다 먼셀표색계에 따르면 밤하늘은 지금 5PB2.5/4의 색을 띠고 있는 중이다 1882년 1월 25일** 오후 9시 23분 하늘색과 정확히 일치하는 셈이다
이윽고 남자의 주먹이 현관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예상 시간보다 0.7초 늦었지만 100m 달리기가 아니므로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가구들은 막 떨기 시작했을 겻이다 마른바람이 창을 통해 들어와 상대습도를 71.5%까지 끌어내린다 불쾌지수도 따라서 조금 하락했을 것이다 요컨대, 모든 문제는 상관이 있다
남자는 3N/m²의 압력으로 자꾸만 문을 떼밀고,
창밖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는 내 눈은 살짝 슬프다 이는 어제의 나도, 내일의 너도 가질 수 없는 감정이다 소유권은 오로지 73.5(+α)mm 길이의 수염과 8199(+β)개의 백혈구를 가진 사람에게 있다 이 순간, 나는 유일하다! 상대습도가 50% 이하였다면 나는 아마 기뻤을지도 모른다 열 받은 남자가 문을 부수기 직전, 나는 창문 밖으로 힘껏 뛰어내린다 하늘에게는 뛰어오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200g 슬리퍼는 끝내 날지 않았는가?
———
* 마이클 커닝엄(Michael Cunningham)의 소설 『세월(The Hours)』에 등장하는 작가.
**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생일.
동시다발
눈 푸른 선생이
등 푸른 생선을 먹고 있을 때였다
고양이가 짧게 울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쥐가 죽어 버리고
새가 하늘에서 배영을 하기 시작했다
비가 쏟아졌다
불투명한 것들이 단숨에 거덜 났다
아무것도 없는 여기로
네가 사선으로 걸어와
세계가 삼각형을 이루었다
사냥꾼이 소리를 질렀다
쥐도 새도 모르게 새가 죽었지만
그 누구도 표정을 짓지 않았다
180도 안에서
지분을 나누는 문제에 돌입하자
우리는 잠시
파렴치하고 어리둥절해졌다
비가 그쳤다
사냥꾼이 그림자를 끌고 달아났다
고양이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눈 푸른 선생이
뼈만 남은 생선의 등 색깔을 잊어버렸다
—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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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해
오 은
왼손으로 글씨를 쓰고
오른손으로 밥을 먹는 게
한 끼밖에 안 먹었는데
하루 만에 콧수염이 이만큼이나 자라난 게
죽을 것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내년 계획을 짜고 있는 네가
그 계획이 멋지게 엎어지는 모습을 상상해
그리고 쓰디쓴 커피를 한 잔 마시지
저길 봐
포플러 냄새가 방 안에 울려 퍼지는데
벽지에는 누룩곰팡이가 슬고 있어
너는 갑자기 눈물이 난다
편의점에 가서
생명이 간당간당한 삼각김밥을 사
오른손으로 그것을 집어
참치샐러드가 나올 때까지 천천히 베어 먹는다
수상해
매달 17일에 하트 표시를 그려 넣고
흐뭇한 듯 묘한 미소를 짓는 네가
아까 마신 커피가
반투명한 액체로 배출되고 있다는 게
서서 할 수 있는 사소한 일들 중 하나를 하며
나는 낌새를 온몸에 새기는 거야
왼손으로 단추를 채우고
오른손으로 지퍼를 올리며
너를 생각하는 내가
너만 생각하는 네가
수상해
누룩곰팡이가 슬고 있는
내 기억이
오른손으로 글씨도 쓰고 싶은
내 욕망이
삼각김밥을 다 먹으니
달력의 유통기한이 하루 줄어들었다
과거에 있던 삼백여 번의 17일을 더듬으며
나는 의심쩍게 웃는다
왼손으로는
지난 17일에 만난 너를 배웅하고
오른손으로는
다가오는 17일에 만날 너를 손짓하는 내가
수상해
마침내 애가 끓다가 다 타버렸다
나는 너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네가 다음 달로 넘어가기 직전,
나는 너를 어지간하게 끌어당긴다
백짓장 위에 턱을 괸 채,
내 계획에는 없었던 네 눈물을 훔치며
왼손 몰래
오른손으로 하는 날렵한 스케치
수상해
―《문학동네》201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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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북
오 은
오전에는 패션지에 실린 너를 오린다 너는 앉아 있지만 나는 모가지에서 너를 싹둑 자른다 스모키 화장을 한 네 얼굴이 마음에 든다 얼굴 없는 네가 의자에 앉아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오후에는 신문에 나온 너를 오린다 너는 서 있지만 나는 눈 딱 감고 네 허리를 쳐내버린다 너의 상체는 내가 탐할 만큼 매력적이지 않다 네 반쪽이 방금 3면에서 사라졌다
네 가슴을 구하기 위해 나는 성형외과에 간다 성형외과에는 빵빵한 가슴들이 많다 나는 포스터를 훑고 맘에 든 가슴 한 쌍을 오린다 조만간 너는 더 완벽하게 태어날 것이다
집에 와서 너의 부위들을 잇대기 시작한다 조각난 하루도 이어 붙인다 패션지에 실린 너의 얼굴과 신문에 나온 네 하체 사이에 너의 새 가슴을 이식한다 너는 전보다 더 자신만만해졌다
수술을 마친 너를 분쇄기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른다 너의 육체가 국수 면발처럼 뽑혀 나온다 나는 너를 파괴하고 창조하고 다시 파괴할 권리가 있다 스모키 화장을 한 네 눈에 방금 잿빛 눈물이 맺혔다
조각난 너를 가지고 폭죽을 만들겠다 너는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가 나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질 것이다 두 팔을 활짝 벌려 너를 안아주겠다 열리지 않는 책이 되어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겠다 신인가수가 깜짝 데뷔해 내 취향을 바꾸어놓을 내일모레까지는
나도 드라마 연작을 일곱 편인가 쓴 적이 있지만, 이 젊은 시인은 16부작 드라마를 겨우 16줄로 솜씨 좋게 요약해 놓았다. 드라마가 품은 반전의 기법이란 기법은 여기 다 모인 거 같다. 사실은 그 반전이라는 게 이야기 전개의 유일한 방법이다. 줄을 바꿔도 계속되는 저 “느닷없이”란, 손바닥을 뒤집듯 얘기의 줄기를 바꾸거나 잇는 접속어일 테고. 그러고 나서는 이 모든 게 몽유록이라고 갑자기 우리를 깨운다.
아쉬우면 이런 식으로 몇 줄 덧붙여 볼까. “느닷없이 연장방영/느닷없이 기억상실/느닷없이 출생비밀/느닷없이 개과천선…”
권혁웅 (시인)
희망
― 간빙기
오 은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됩니까?
생물이 됩니다. 움직입니다.
생물은 어디로 움직입니까?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생물이 생물을 위로하기 위해
위로, 위로, 더 위로.
높은 데에 올라가야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위는 위험하고, 위는 경이롭습니다.
너무 아파서 앞세울 수 없었던 사정들이
생물과 함께 드러나고 있습니다. 움직임으로
높은 데에서는 크나큰 비가 내립니다.
짜고 축축한 것이 자꾸 내립니다.
간절하게 허공을 두드립니다.
아래에는
아직 반쯤은 얼어 있는 생물이 서 있습니다.
벌써 반쯤은 녹아 있는 생물이 앉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춥습니다. 뜨겁습니다.
얼음과 얼음 사이
생물과 생물 사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갑니다.
마음을 품으면서,
그 마음을 서로에게 기꺼이 들키면서
우리는 지금 자발적으로 녹고 있습니다.
평형 상태로 요동하고 있습니다.
반쯤 물에 잠겨
열린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문장웹진》201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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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더캄머*
오 은
과거는 왜 항상 부끄러운가?
미래는 왜 항상 불투명한가?
방문을 열면
얼굴이 화끈
뱃속이 발끈
허기를 참지 못하고 또다시
너를, 너희들을 소환한다 오늘
누구나 소유할 수 있지만,
아무나 소유하지는 않는
새로운 친구가 왔단다
너희들은 서로 인사를 하지 않는다
지분을 배정받은 공유자처럼
묵묵하고 꿋꿋하다
우정 따위의 지나친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너희들이 더 많아질수록
너희들이 더 다양해질수록
나는 더 작아지고 적어진다
재능이 넘치면 노력이 부족해
시작이 창대하면 끝이 미약해
어떤 경지에 오르려다
어떤 지경에 이를 수도 있지
현재는 왜 항상 불완전한가?
뱃속을 다 채우면
나는 예정대로 구역질을 한다
신물 나는 완벽함을 향해
빛나가면서 빗나갈 때
뒤쳐지면서 뒤처질 때
놀랍게도
나는 방 안에서 놀라워진다
내 방을 누가 들여다볼까 봐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진다
눈을 감아도 네가 보인다
너희들이 빤히 보인다
아, 대체 나는 어디에 발을 들였단 말인가
내 앞에 도래하는
백지상태의 내일 앞에서,
새로운 친구같이 어색하기만 한 나는
————
* 독일어로 ‘놀라운 것들의 방’이라는 뜻.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 특별한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에 물건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방을 분더캄머(Wunderkammer)라고 불렀다.
—《창작과 비평》201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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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발생하려는 경향」감상 / 진은영
발생하려는 경향 ㅡ 오 은
순간이 도래하기까지 우리는 불길하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파란불이 켜질 때까지
몸은 앞쪽으로 기울어지고 너와 나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마찰력과 만유인력이 팽팽하게 맞설 때까지
혹시 켜져 있을지도 모르는 가스 불과 근사한 연애, 마주 선 사람들의 벗은 몸 따위를 상상하며
심장의 BPM이 정점을 찍고 청색 신호총이 발사되어 약빠른 자가 가장 먼저 첫발을 뗄 때까지
제 몸을 찔러 줄 젓가락을 기다리는 설익은 감자처럼
제 몸을 채워 줄 펜을 기다리는 원고지의 빈칸처럼
순간이 도래하기까지 우리는 불길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 학창시절에 배운 수많은 과학 지식들 중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어요. 관성의 법칙 정도? 정지한 물체는 영원히 정지하려고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영원히 움직이려 한다. '지금 나는 운동하고 있는 상태일까, 아님 정지한 상태일까?' 그 법칙을 배우면서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은 한 물체가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것이 물리 세계의 법칙이라는데 시인의 세계에서는 조금 다른가 봐요. 어떤 외적 자극이 주어지지 않아도 자꾸 다른 존재로 변하려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다는 군요 신호등은 아직 빨간 불인데 몸은 건널목 건너의 사람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설익었는데 몸을 찔러줄 존재를 부르기도 합니다. 신호총이 채 울리기도 전에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 우사인 볼트의 발같이 활기차고 급한 마음을 가진 적도 있었는데요. 어떤 외부의 힘이 우리의 '발생하려는 경향'을, 그 멋지게 불길한 순간을 방해하는 걸까요? 진은영 (시인)
인과율 ㅡ 오 은
그는 어기기 위해 약속을 하는 사람
설거지를 하기 위해 밥을 안치는 사람
태어나기 위해 죽기로 마음먹은 사람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낮은 자리에 임하는 사람
내공을 쌓기 위해 욕먹는 사람
명성을 쌓기 위해 욕보는 사람
웃기 위해 섣불리 희극을 보는 사람
울기 위해 스스로 비극이 되는 사람
극이 되기 위해 기꺼이 삶을 선택한 사람
살기 위해 순순히 입을 여는 사람
살기 위해 꿋꿋이 입을 다무는 사람
살기 위해 묵묵히 입을 채우는 사람
어떻게든 입만이라도
살기 위해 입을 맞추는 사람, 모으는 사람
천군만마를 얻기 위해 천 번의 거짓말과 만 번의 고자질을 하는 사람
이런 파렴치한 사람을 고발하기 위해 십만 번 넘게 창문을 두드리는 사람
그 전에 이미
창문을 열기 위해 창문을 닫은 사람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창문을 여는 사람
소문이 새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창문을 닫아버리는 사람
여기를 잊지 않기 위해 여기를 등지기로 마음먹은 사람
그 후에 벌써
받기 위해 무언가를 베푸는 사람
칭찬과 상과 돈을 받기 위해
선행과 재능과 호의를 베푸는 사람
절정에 오르기 위해 몸을 혹사시키는 사람
42,195명의 환호를 받기 위해 42.195㎞를 쉬지 않고 달리는 사람
힘이 되기 위해 힘을 다 써버리는 사람
극이 되기 위해 기꺼이 죽음에 선택된 사람
얼어붙기 위해 쓸쓸해지는 사람
녹아 흐르기 위해 얼음이 되는 사람
약속 하나를 하기 위해 약속 하나를 취소하는 사람
저 하나를 위해 이 하나를
잊는 사람, 버리는 사람, 잊어버리는 사람
소싯적에 했던 약속처럼 까마아득해지는 사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처음부터 쓰기 시작하는 사람
또다시 마지막부터 기억을 지우는 사람
— 웹진《발견》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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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오 은
일 분 안에 달아올랐다가
일 초 만에 등을 돌린다
일분일초가 아쉬운 역사
그러나 영원하지 않다
순간만이 영원하다
영원히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국기가 올라간다
국가가 울려 퍼진다
이마를 맞대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네 손등 위에 내 손바닥을 포개고
우리는 굳은살처럼 단단해진다
사이좋게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눈빛은 언제나 강렬해야 한다
일 분 만에 얻은 기회가
일 초 안에 기포가 된다
일분일초가 아득한 역사
그러나 기억하지 않는다
단지 나만 기억한다
기억의 중심엔 나만 있을 뿐이다
어김없이
한쪽은 이기고
다른 한쪽은 졌다
입 냄새에는 땀 냄새로 응수한다
사이좋게
두 팔을 올리고
침을 뱉는다
국기가 내려간다
국가가 들어설 공간은 없다
출구에서는 너도나도
안녕, 안녕
구현되는 뿔뿔이 민주주의
—웹진 《시인광장》2011년 10월호 《시사사》2012년 1-2월호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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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탐사의 명징한 시선
젊은 감각은 신선하고 발랄하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감각의 영역을 개척하고 그곳에서 또 다른 지점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낡고 진부한 사유에 매몰된 시들은 눈앞의 얕은 풍경을 반복적으로 보여줄 뿐 열정도 광기도,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스파크도 없다. 유효기간이 만료된 음식을 뒤적거려야 하는 고역은 행복한 경험이 아니다.
오 은 시인은 독자를 낯선 감각의 영지로 이끈다. 잘 지은 시의 집이 빈틈없이 안정적이고 구도 역시 잘 짜여져 있다. 웬만한 태풍에도 끄덕 하지 않을 견고한 건축물이다. 집의 택호부터 눈길을 끈다. 「팀」은 단독자, 개별자와 대척의 자리에 있다. 집단, 떼거리, 무리는 집단 사유에 쉽게 길들여지고 획일화된 질서에 편입되어 자체적인 방어 시스템을 구축한다. 일종의 약자의 방어기제이며 생존 전략이다. 현실의 내부에는 무수히 많은 집단이 형성되어 있고, 그것이 사회의 동력으로 긍정적인 기능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상당수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이익 추구 집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고, 집단의 조직 또한 내부 충돌에 의해 쉽게 분열되고 와해된다.
이 시의 화자는 ‘팀’과 ‘개별자’를 대립적 구도로 설정하고 ‘팀’의 허구성을 발랄한 감각적 언술로 드러낸다. 결코 영원하지 않을 이해관계로 얽혀 ‘팀’이 만들어지고 ‘굳은살처럼 단단해’지지만 내부 감시자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강렬한 눈빛으로 무장하고 싸워야 한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고 견고한 조직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고군분투하는 것만이 이겨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팀’의 현실은 ‘일 분 만에 얻은 기회가 / 일 초 안에 기포가‘ 되는 예측불허의 가변적 공간이다.
‘팀’이 거대 이데올로기와 연결될 때 내부의 공고한 질서는 한층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기고 지는 승패의 문제에 직면할 때 ‘팀’과 ‘팀’의 충돌은 더욱 날카로운 대립적 예각으로 맞서게 된다.
이처럼 「팀」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작품이다. 외형은 스포츠의 ‘팀’을 떠올리게 되지만 시의 화자는 단순히 운동 경기를 하는 ‘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과 집단의 허구적 속성을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팀’의 내부적 결속을 다지게 했던 ‘국기’나 ‘국가’가 들어서지 못하는 곳은 어떠한 질서나 제도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인으로서의 단독자가 최종적으로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세포분열하듯 ‘팀’은 전체에서 개인으로 되돌아가고, 바로 그 자리가 삶의 본래 자리임을 말한다. 그리하여 ‘출구’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존재의 변환이 이루어지는 자궁인 셈이다. 그 때 비로소 ‘구현되는 뿔뿔이 민주주의’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게 되고, 한동안 은폐되어 있던 적나라한 존재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 탐사의 명징한 시선이 돋보이는 오 은 시인은 무거운 주제를 무겁지 않게 다루는 특이한 재주를 가졌다. 시의 보법이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진중하다. 현실의 문제를 깊이 있게 견인하는 사유의 장력 또한 만만치 않아 앞으로 우리 시의 새로운 가능성의 표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 책
오 은
팔리는 책 잘 팔리는 책 팔이 잘리는 책 표지가 죽이는 책 등장인물을 다 죽이는 책 독자를 질식시키는 책 처음부터 질리는 책 딱 질색인 책 머리를 때리는 책 눈을 자극하는 책 귀를 사로잡는 책 목을 뻣뻣하게 만드는 책 가슴을 울리는 책 배를 부르게 하는 책 허리를 쿡쿡 찌르는 책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책 엉덩이를 근질근질하게 만드는 책 다리를 휘청이는 책 제발 부탁하는 심정으로 제 발 저리게 하는 책 발바닥을 간질이는 책 작가가 유명한 책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는 책 이름 없는 작가가 쓴 유명한 책 이름값을 하는 책 마지막에 가서 제 이름을 잊어버린 책 제 명분을 잃어버린 책 작품 뒤로 작가가 숨어버린 책 작품 대신 작가가 전면에 나서는 책 비싼 책 아무도 사지 않는 책 훔친 책 아무도 팔지 않는 책 가판대에 쌓인 책 수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쌓인 책 누구나 다 읽는 책 창고에 쌓인 책 수북이 먼지 쌓인 책 그 누구도 읽지 않는 책 작가가 사랑하는 책 작가만 사랑하는 책 작가가 외면했지만 대중에게 사랑받는 책 한 번도 속을 내보인 적이 없어 적이 없는 책 스스로 입 벌리는 책 다물지 않는 책 내가 썼지만 그 안에 정작 나는 없는 책 16페이지가 감쪽같이 사라진 책 문체가 사라진 책 맥락이 사라진 책 책꽂이에서 사라진 책 도서관에서 사라진 책 나라에서 추방당한 책 물성을 상실한 책 거대한 먼지가 되어 떠돌아다니는 책 들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책 오직 기억에만 있는 책 귀퉁이가 여럿 접힌 책 잠자고 일어났더니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책 아무 데나 버젓이 있는 책 아무 데서도 팔지 않는 책 잠자코 잠자는 책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한 권의 책 막 발견된 책 갓 발굴된 책 내가 산 책 지갑을 열어, 마음을 열어 내가 살리는 책 마침내 책이 된 책 나의 책
—《현대문학》201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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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드 (외 3편)
오 은
나는 란드에서 태어났다 부동산에서, 재화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중개로, 서비스로
핀란드에서 나는
이가 나면서부터 자일리톨이 잔뜩 들어간 껌을 씹었다 단물 빠진 껌을 앞니 뒤에 숨기면서부터 비밀을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해맑게 웃으며 거짓말하는 법을 배웠다 양들처럼 두 가지 일을 능숙하게 처리했다 침묵하기, 동시에 무럭무럭 자라나기
폴란드에서 나는
글을 깨치면서부터 시를 읽었다 시엔키에비치는 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심보르스카는 언제나 너무 멀리 있었다 호기심은 낯설고 결핍은 낯익었다 낯 뜨거운 일들은 밤에 벌어진다는 걸 알았다 낮은 이미 충분히 뜨거웠으므로
네덜란드에서 나는
대마초를 피울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노천카페에서는 렘브란트와 반 고흐의 엽서를 싸게 팔았다 대통령같이 아무 데도 없는 것들과 축구공같이 어디에나 있는 것들에 시종 둘러싸여 있었다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면 겨울이 꼭 친구 같았다 반쪽 같았다
그린란드에서 나는
순간을 얼리는 법을 터득했다 별을 헤고 있으면 살이 에이는 것 같았다 새우잡이를 해야 겨우 세우(細雨) 같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지구가 온난해지자 젖은 옷은 마르고 지하에 있던 자원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발견의 순간에는 주인공이 “이누크!”*라고 외쳤다 성엣장이 떠내려가듯 유유히 발음하는 게 중요했다 란드에 남은 마지막 에스키모와 키스를 한 순간, 나는 주인공이 되었다 어른 이누크가 되었다
아이슬란드에서 나는
외로움을 다스리는 훈련을 했다 당시에 나를 포함해서 한국인은 총 아홉 명이었다 까만 눈과 까만 머리카락은 가장 독특한 액세서리였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초리가 어음장처럼 날아왔다 나는 빚을 갚는 심정으로 차근차근 숫자를 셌다 숫자는 두 자리가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홀수여서 나는 덜 외로웠다 도망치기, 더 이로웠다
나는 란드에서 태어나 란드에서 자라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란드, 돈이 되는 란드
여기는 땅이다, 네가 와서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해맑게 웃으며 거짓말을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아무리 참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는, 온화하고 냉혹한 땅,
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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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란드어로 ‘인간’을 뜻하는 말.
설
익은 감자를 깨물고 너는 혀를 내밀었다 여기가 화장실이었다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나는 아무도 듣길 원치 않는 비밀을 발설해버렸다 너의 시선이 분산되고 있었다 나에게로 천장으로 스르르 바깥으로
방사능이 누설되고 있었다 너의 눈빛을 기억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는 여기가 바로 화장실이라는 듯, 바지를 내리고 시원하게 노폐물을 배설했다 노폐물은 아무런 폐도 끼치지 않지 너의 용기에 힘껏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이 모든 일이 내년의 첫째 날에 일어났다 그날은 종일 눈이 내렸다 소문처럼 온 동네를 반나절 만에 휩싸버렸다 문득 폐가 아파 와 감자를 삶기 시작했다 여기가 화장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말이 더 마려웠다
첫 연에 이력서에 대한 모든 말이 들어 있다. ‘밥을 먹고 쓰는 것’, 밥 기운으로야 열과 성을 다해 쓸 수 있다!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자기성찰의 한 방편이나 취미로 이력서를 쓰는 사람도 아주 없으라는 법은 없겠지만.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더 말해 무엇하리. 이 세 줄 시구에 무한한 공감을 표할 독자가 수두룩하리라. 아, 이력서!
화자는 이력서를 쓰는 요령도 알려준다. 직장사회는 ‘잘나고 둥글둥글하고 예의 바른’ 사람을 원하니까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걸 어필해야 한다. 자랑을 하되 겸손하게! 이력서를 쓰는 시간은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낯간지러운 이 짓을 하고, 하고, 또 해야 한다. 지긋지긋하다.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고, 힘이 빠지고, 허기가 진다. 취직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것 같은 이름이여!
이력(履歷), 즉 ‘지금까지 닦아 온 학업이나 거쳐 온 직업 따위의 경력’을 적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를 문서로 작성한 것이 이력서다. 거기 한 줄이라도 더 올리면 취직하는 데 유리하겠지. 요즘 청년들이 입에 달고 사는 ‘스펙’이란 말에 넌덜머리가 날 때가 있었다. 그들 머릿속에는 ‘스펙’이라는 말밖에 없는 듯했다. 삶의 본질과 아무 상관없는, 껍질뿐인 스펙. 거기 매여 있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았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현실적 욕망만 강해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생존이 걸린 취업의 길 위에서 치열하게 전술을 연마하는 것이었구나. 모쪼록 오늘밤 작성한 이력서로 직장의 문을 통과하시길!
매일 화살이 날아와 몸에 쑤셔 박힌다. 화살을 주렁주렁 매달고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즉시 뽑아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 가능한 한 오래 간직하고서 그걸 제 몸 안에다 녹여내는 이가 전자라면, 하나씩 물리치면서 산뜻하고도 명쾌하게 각개격파의 방식으로 타인을 대하는 사람이 후자일 것이다. 글도 이렇다. 무엇을 쓰건, 거기에는 일정한 시간을 감내하고 사유를 개진하며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고 작가 지망생이 스탕달에게 물었다. “자네가 질문하는 바로 이 시간에 펜을 들고 쓰게나.” 두 눈을 부릅뜨고 세계와 당당히 맞서면서 한 문장 한 문장 써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보다 명쾌한 대답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조재룡 (문학평론가)
맥거핀
오 은
12월 31일 23시 59분
이 세계는 지금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때마침 별똥별이 하나 떨어지고 있다
잠시 후면 내 삶은 새로 시작될 것이다
나는 그 삶을 새로 시작할 것이다
이 나라를 좌지우지할 비밀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을 놀랠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몰랐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별똥별의 자취를 한창 더듬을 때
때마침 새해가 밝았다
나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가리키는 집게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내가 놀랠 사람들이
모두 주인공이 되어 나를 놀래고 있었다
이미 순간을 살고 있는데 아직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일이 와도 미련이 남아 있었다
주인공들이 1월 1일에 처음 한 말은 “아”였다
이 세계가 통과하여 도착한 곳은 이 세계였다
때마침 배가 고파서
별똥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맥거핀 : 속임수, 미끼라는 뜻으로 알프레드 히치콕이 고안한 극적 장치를 말한다. 극적 효과를 증대시키기 위한 일단의 인물이나 사건, 혹은 물건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코너 저 코너 한산하기 그지없는 서점 한 구석에 웬 사람들인가 하고 보니 온갖 종류의 다이어리를 한데 모아 팔고 있었습니다. 새해가 이십일가량 남았음에도 새해가 바로 내일인 양 저마다 굳게 결심한 바라도 있는 듯 그래서 마음이 급한 듯 이것 들었다 저것 들었다 곰곰 어린 표정 속에 뭐랄까, 저 고심이 어떤 기복의 손놀림 같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최소한 올해보다 내년이 낫겠지 싶은 바람, 그 연고 없는 희망마저 없다면 우리는 하루하루 무슨 힘으로 오늘밤 잠자리에 누워 내일 아침 알람을 맞출 수 있을까요. 나 역시 새 물건에 눈이 멀어 요건 독서노트 삼고 요건 가계부 삼고 요건 일기장 삼아야지 돈 아까운 줄 모르고 덥석덥석 사들고 오니 채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노트들이 책상 서랍 속에 가득이었습니다. 미친 노릇이지요. 작년 말에도 글쎄 이 마음이었단 얘기지요. 책가방 크다고 공부 잘하냐? 그러게요, 노트 많다고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시 줄줄 써댈 필력은 아니지만 일단은 자세부터 갖겠다는 마음, 비단 나만의 결심은 아닐 거라고 봐요.
이재훈 : 반갑다. 오은 시인. 우린 오래 만난 사이인데 새삼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그냥 편하게 얘기하기로 하자.
오은 : 좋지, 형.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 못 본 지 두 달은 넘은 것 같네. 호프집에서 맥주 한잔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듯 답할게.
이재훈 : 세월호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요즘 마음이 무겁고 괴롭다. 슬픔과 분노가 교차되어 한 마디로 멘붕 상태다. 어떻게 잘 버텨내고 있는가.
오은 : 그제는 안산에 다녀왔어. 유가족들이 단상에 올라가는데 모인 사람들이 다 훌쩍이더라. 유가족 한 분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지. 분노와 무기력, 슬픔 등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이면 결국 울게 되는 것 같아. 울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한동안은 넋이 좀 나간 채로 지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이재훈 : 요즘 많이 드는 생각이 과연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이다. 새삼스럽긴 하지만, 세월호와 같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시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들. 이런 때에 한 정치인이 시를 써서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시가 희화화되지 않았나. 오은 시인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하다.
오은 : 고통을 덜고 위로를 해주는 것은 시가 할 수 있는 부차적인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어. 시인이 그 시를 쓸 당시에 기대했던 바가 아닐 수도 있고.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는 아이를 잃은 부모가 나오잖아. 시는 어쩌면 제과점 주인이 그 부모에게 건네는 롤빵보다 하찮은 것일지 몰라. 허기를 달래주지도, 가시적으로 온기를 전달하지도 못하니까. 그러나 나는 시가 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 이 어처구니없는 참사를,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각자의 말로, 우리의 말로 기억하는 거지.
이재훈 : 내게 오은 시인은 막내동생과 같다. 나뿐만은 아닐 텐데. 문단의 교유가 넓은 편 아닌가. 오은 특유의 친화력이 부러울 때가 많다. 오은의 어머니를 뵐 때 느끼는 것인데,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았구나 생각했다. 그 천진무구의 성정은 어디로부터 연유된 걸까?
오은 : 집이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어. 아버지가 선생님이었는데, 우리 집은 엄격하기보다는 자유로웠지. 우리가 거짓말할 때를 제외하곤 매를 들지 않으셨으니까. 단칸방에 꽤 오래 살았는데, 덕분에 부모님과 형이 거의 항상 가까이 있었어. 귓속말을 해도 다 들릴 정도였어. 형이 무슨 책을 읽는지, 어머니가 무슨 색깔의 매니큐어를 칠하는지, 아버지가 어떤 TV 프로그램을 좋아하시는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 어머니의 긍정적인 성격을 닮은 것도 한몫한 것 같아. 가난이 단 한 번도 부끄러운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부모님이 우리가 부족한 거 없이 자랄 수 있도록 아낌없이 베풀어주셔서 그랬을 테지만.
오은_이재훈_ 약수역_2014.5
이재훈 : 사회학을 전공하고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문학이 아니라 사회학을 택하게 된 이유라도 있는가? 그리고 문화기술대학원에서는 어떤 연구를 했나. 그 연구의 결과물로 로봇서사를 다룬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를 출간했다. 독자들을 위해 소개 부탁한다.
오은 : 학창시절에 문학을 전공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었어. 알다시피 나는 친형 덕분에 등단을 했으니까. 중고등학교 시절 큰 대회에서 몇 차례 상을 받긴 했지만, 그건 대부분 산문이었고. 무엇보다 나는 내가 쓰는 것이 시가 될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거든. 수험생이 으레 그랬듯 나 역시 교과서 시들만 접했으니까. 국문학은 내가 범접하기엔 너무 멀리 떨어진 학문이었던 셈이지.
사회과학대학에 입학하고 1학년 때 전공 탐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 나는 원래 기자가 꿈이어서 언론정보학과에 진학하려고 했는데, 수업을 듣고는 실망하고 말았지. 내 기대와는 전혀 달랐거든. 심리학, 경제학, 외교학, 인류학 등 사회과학대학에 있는 다른 전공들을 듣다가 사회학이라면 머리는 아프지만 기분 좋게 공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거리낌 없이 의심할 수 있었으니까.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바라보는 고유의 시선을 갖고 싶었지.
문화기술대학원은 ‘융합기술’이라는 것이 대한민국에서 막 주목받기 시작했을 때 문을 연 대학원이야. 국문학, 법학, 경영학, 미학, 컴퓨터 공학, 건축학, 산업디자인 등 다양한 전공 출신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지. 겹치는 전공이 거의 없었을 정도니까.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구현하는 데까지가 우리가 하는 일이었지. 그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작업이 팀으로 이루어졌어. 가령 나 같은 사회과학도가 어떤 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말문을 트면,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친구가 그것이 현재 어디까지 가능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친구는 그것을 어떻게 구현해야 사용자들에게 좀 더 편안할까를 고민하고 경영학을 전공한 친구는 그것이 시장에 어떻게 어필할 수 있을지 따져보는 거지. 얼핏 분리된 작업 같지만, 한자리에 모여 항상 머리를 맞대고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작업했어. 그 친구들과의 작업 경험은 아마 평생 동안 잊을 수 없을 거야.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라는 책은 ‘로봇’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산업자원부(現 산업통상자원부) 프로젝트였어. 로봇이 변화함에 따라 그것을 가지고 만들어진 콘텐츠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피는 게 목적이었지. 나는 영화, 소설 등 서사를 다른 하나의 축으로 세우고 작업했다면 어떤 친구는 무용(퍼포먼스)을 다루는 작업을 했어. 로봇과 교육, 로봇과 디자인, 그리고 로봇과 애니메이션을 함께 엮어서 살펴본 친구들도 있었고. 이른바 ‘로봇 시리즈’로 출간된 이 책들을 읽어보면 우리가 로봇이라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협소한 개념인지 파악할 수 있을 거야. 로봇이 어떤 존재로 우리에게 인식되어왔는지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고.
이재훈 : 색과 그림을 다룬 책 <너랑 나랑 노랑>을 출간했다. 오은 시인은 문학과 미술뿐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다방면의 문화 취향에 대해 들려 달라.
오은 : 조예가 깊지는 않다고 생각해. 미술, 음악 등 다른 분야에 몸담은 사람들과 협업을 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들과 대화하기에 큰 무리가 없는 정도야. 좋아하는 건 어떻게든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하잖아. 그러다 보니 틈나는 대로 찾아서 읽고 보고 들었지. 시간이 없어서 요새는 전시는커녕 영화도 많이 못 봐. 많이 속상하긴 한데 언젠가는 찾아올 여유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지.
취향에 대해서라면 크게 할 말이 없어. 두루두루 다 좋아하거든.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색과 그림을 다룬 책을 낸 것처럼 색을 잘 구사하는 화가들을 좋아해. 앙리 마티스나 파울 클레 같은 화가를 예로 들 수 있겠지. 음악은 신스팝(synthpop)과 프로그레시브 록을 좋아해. 기타보다는 건반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요새 부쩍 들어. 나는 줄곧 내가 기타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웃음)
요 몇 년 사이에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이 많아졌어. 몇 년 전부터 타이포그래피 아티스트들과 작업할 기회가 있었는데, 시가 읽는 것에서 보는 것이 될 때 어떤 질감을 가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지. 작년에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에서 영상으로 내 시를 보여줄 기회가 있었는데, 아예 해당 미디어에 걸맞게 시를 새로 썼거든. 서울역 근처를 지나가는 시민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을 거야. 앞으로도 기회가 생기면 협업을 계속해서 해나가고 싶어.
이재훈 : 큰 교통사고로 인해 생사를 넘나든 적이 있지 않은가. 아직도 많은 시인들이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되면 가슴을 쓸어내린다. 한동안 기억을 잃어버렸던 실존의 경험이 시 쓰기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오은 : 글쎄, 나는 그때가 좀 뿌예. 많이 아팠다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할 정도니까. 물론 재활 치료의 고통은 아직도 생생하지만. 정말 끔찍했지.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볼게. 교통사고의 충격으로 머리에 물이 찼었는데, 그 물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니까 사고 직후부터 수술 직전까지의 기억이 모조리 사라진 거야. 그사이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지인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지. 정말 가관이더라고. (웃음)
그때의 기억을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은 없어. 단지 나는 내가 정말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지. 그 뒤로 아픔과 슬픔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 듯싶어. 한동안은 병원에 가서 대기실에 앉아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만 봐도 눈물이 났어. 그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아니까. 어떻게 버텨내고 있는지 아니까. 시무룩한 표정의 보호자만 봐도 어머니 생각이 나서 가슴을 쓸어내렸지. 나는 진짜 효도해야 돼.
이재훈 :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부터 오은 시인 하면 명명되는 것이 ‘말놀이’로 대표되는 언어감각이다. 말놀이나 펀(fun), 유희의 수사법은 오래된 전통을 가진 것이지만 오은의 언어는 다른 지점이 있다. 나는 그것이 인문학적 사유와 사회성을 겸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인문학적 말놀이라고 할까. 말놀이로 투영되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
오은 : 글쎄,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말놀이 때문에 주목받았지만, 그것이 내 발목을 잡는 상황이라고 말하면 조금 우스울까? (웃음) 놀이의 세계는 변화무쌍한데, 사람들은 놀이의 가벼움, 놀이의 발랄함만 기억하니까 가끔 안타까울 때도 있어. 아직까지도 “오은? 말놀이하는 애?”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것은 나의 개성을 반영한 말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면서 은연중에 자신이 생각하는 나의 한계를 미리 재단해놓는 것이기도 하거든. 그만큼 놀이가 가진 기운이 내 시를 압도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실은 놀이에서도 자꾸만 규칙을 어기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규칙을 지키면서 교묘하게 배반하는 작업을 하고 싶은 거지. 기존의 언어 규칙에 내가 짠 규칙을 접목한 뒤,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싶어. 이건 형식적인 문제고, 무엇을 쓰느냐의 문제는 또 완전히 다르지. 흔히 놀이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다루고자 하는데, 아직은 내가 미숙한 탓인지 사람들은 형식에만 반응하더라고. 어쨌든 결국에는 내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해.
이재훈 : 대표적으로 「ㅁ놀이」를 보면 말놀이, 물놀이, 맛놀이, 몸놀이, 망놀이, 멋놀이, 무놀이, 문놀이, 몽놀이, 맥놀이, 멱놀이, 몇놀이, 맘놀이, 못놀이로 이어지면서 의미가 확장되고 유희가 가속화된다. 요즘도 사전을 읽나? 말놀이의 이면에 숨어 있는 시인의 태도가 궁금하다. 물론 말놀이는 재미있어 하겠지만, 그것 이외에 추구하려는 전략이 있다면 살짝 공개해 달라.
오은 : 응, 예전처럼 자주는 못 보지만 아직도 무료할 때 가장 먼저 찾는 친구가 바로 국어사전이야. 요새는 새로운 단어를 발견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내가 익숙한 단언데 잘 사용하지 않는 것들, 뜻을 많이 품고 있어서 그중 일부만 사용하는 것들에 관심이 가더라고. 실제로 그 단어를 실생활에서 사용해보려고 노력도 하고. 입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내 말이, 내 단어가 되는 것 같으니까. 전략이라고 말할 것은 없고, 놀이라는 게 가진 기본적 속성이 즐거움, 흥겨움, 즉흥성 등이잖아. 그 놀이가 다 끝났는데 이상하게 슬픈, 혹은 이상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기분을 갖게 하는 것? 울면서 웃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당도하게 하는 것? 너무 거창한가? (웃음)
이재훈 : 두 번째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시인의 말을 보면 “가장 가벼운 낱말들만으로 가장 무거운 시를 쓰고 싶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이 오은 시의 정체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오은의 언어는 경쾌함, 유쾌함, 유희 등의 요소들이 있다. 이런 개성은 한국 시단에 드문 세계이다. 앞으로의 언어 방법도 이 분위기를 유지할 것인지 궁금하다.
오은 : 글쎄, 나는 굳이 내가 어떻게 변화해야겠다고 생각한 뒤에 시를 쓰지는 않아.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을 쓰니까. 이전 질문의 답변과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 양극단에 있는 감정이나 무게, 질감 등이 어떻게 시 안에서 부딪치는지 지켜보고 싶어.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친 말들, 너무나 익숙해서 그 특유의 색깔이 지워지고 있는 말들, 아무러한데 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말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데 붙어 다니는 말들 옆에 붙어 있고 싶어. 내가 해왔던 방식을 전면적으로 뒤엎지는 못하겠지. 그것은 천성에 가까운 것이니까. 단지 단어가 어떤 식으로 문장에 결절을 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일이 잦아지겠지.
이재훈 : 나는 두 번째 시집을 ‘부조리’라는 개념어로 읽은 적이 있다.(「부조리한 언어의 건축술, <세계의문학>, 2013년 가을호) 개인적으로 오은 시에 대한 평가가 너무 언어감각과 방법론에만 치중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언어의 껍질을 벗겨내고 시의 속살을 바라보면 문명인의 무기력함과 한 개인의 쓸쓸함이 직설적으로 다가온다. 언어는 재밌게 놀고 있지만 분명 쓸쓸할 때 이 시를 썼을 거야 라고 혼잣말을 할 때가 있었다. 시를 쓸 때 어떤 정서의 감도를 가지고 쓰는가. 예를 들어 슬플 때, 기분 좋을 때, 헛헛할 때 등등처럼.
오은 : 쓸쓸하지. 나는 항상 웃고 있지만, 거의 항상 외로워. 외로우면 눈물도 나고 울상도 짓는 게 일반적인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더라고. 근데 그게 나를 포장하는 방식은 아니야. 나는 너무 슬플 때는 웃음이 터져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 쓸쓸함이나 외로움은 연애를 하거나 복권에 당첨이 된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시인으로 살고 있는 것도 우스꽝스럽고, 부조리를 감추려고 또 다른 부조리가 행해지는 것을 목도할 때면 정말이지 어이가 없지. 생각해봐. 웃음의 차원도 여러 가지잖아. 배꼽을 잡고 뒹굴뒹굴 구를 때도 있고 어처구니없어서 피식 웃고 마는 경우도 있으니까. 웃음을 유발한다고 해서 그게 가벼운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 형 말처럼 그 안에는 무기력함과 쓸쓸함, 공허함 같은 것이 다 담겨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쓸쓸하면서 우습고, 한없이 밝으면서 뒤꽁무니에는 거무스름한 그림자를 길게 달고 다니는 셈이지. 말하고 보니, 시를 쓸 때 딱 저런 상태인 것 같아.
이재훈 : 최근 시를 보면 점점 더 의미가 강화된다는 느낌이다. 「우리 학원」이나 「맥거핀」,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 「다움」 등에서 보이는 사회성이나 존재에 대한 풍자가 더 깊어진 것 같다. 「반의반」에서처럼 말놀이의 재기는 여전하고.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은가.
오은 : 딱 봤을 때, “이거 오은 시네!”라고 말할 수 있는 시. 나는 나의 시를 쓰고 싶어. 나만 쓸 수 있는 시. 내가 들어가 있는 시. 내가 아무리 내가 아닌 척 노력해도 종국에는 오은인 걸 들키고 마는 시를.
이재훈 : 우문이지만 현답이었다. 인터뷰 하느라 고생 많았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오은 : 응 형. 나도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어.
오은 :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및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로봇과 서사를 다룬 책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 그리고 색과 그림을 다룬 책 <너랑 나랑 노랑>을 썼다. 현재 작란(作亂)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이재훈 : 1972년 강원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저서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 <부재의 수사학>,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가 있다. <현대시작품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_ <시향>, 2014년 여름호
출처 : 이재훈 시인 블로그 <명왕성의 부족장>
http://ipoet.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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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로 보았을 때와, 낭송으로 들었을 때 매우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는 시이다. 소음과 속도에 지쳐 집으로 돌아와 산만한 노동자로 TV 앞에 멍하니 앉아 말도 안 되는 미니시리즈를 멍하니 보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엉성하고 부실한 카오스! 그런데 뜻밖에도 이 미니시리즈가 우리의 삶과 가장 많이 닮아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기승전결도, 극적 전환도 없이 느닷없는 악다구니와 느닷없는 필연과 상황 돌출……. 어쩌면 가장 리얼한 삶의 묘사가 아닐까 싶다.
문정희 (시인)
계절감
오 은
귀퉁이가 좋았다 기대고 있으면 기다리는 자가 되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가 물러갔다 뭔가가 사라진 것 같아 주머니를 더듬었다
개가 한 마리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개 개도 나를 처음 봤을 것이다
내가 개를 스쳤다 개가 나를 훑었다
낯이 익고 있다 냄새가 익고 있다
가을은 정작 설익었는데 가슴에 영근 것이 있어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땀을 흘리는데도 개는 가죽을 벗지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
땀을 흘리는데도 나는 외투를 벗지 않고 있었다 어찌하지 않은 일
우리는 아직 껍질 안에 있다
뭔가 잡히는 것이 있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꼬깃꼬깃 접힌 영수증을 펴보니 다행히 여름이었다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
—《유심》201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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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의지하다 / 신진숙정호승·오은·김지윤·유병록의 시
당신은 슬플 수 없다. 당신의 슬픔은 언젠가 곧 소멸한다. 슬픔은 슬픔일 뿐이다. 슬픔 없는 삶은 없으며, 하나의 슬픔은 또 다른 슬픔에 의해 지워질 것이다. 그것은 삶의 의지를 생존에 대한 의지로 이해할 때, 언제나 옳다. 아니 옳다고 간주된다. 하여 사람들은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입버릇처럼 말한다. 슬픔을 극복하라고. 지금 거기서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기만 하는 슬픔은 잊으라고. 그리고 다시 살아가라고.
맞는 말이다. 어떻게 옳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살아가야 한다는 가장 큰 목표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한.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절대적 명제에 비하면 당신의 슬픔은 하찮다. 그러므로 슬픔은 슬픔으로 향유될 수 없다. 슬픔을 지속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동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타이름이 나 자신을 향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슬픔 앞에서 냉정해지기란 나의 슬픔을 다스리는 것보다 얼마나 더 쉬운가.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슬픔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슬픔을 완전하게 제거한 사회는 행복한가. 슬픔을 이해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타인에 대한 이해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말했다. 우리가 단지 거기에 있다는 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함을 증명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의 ‘슬픈’ 얼굴을 바라보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 만일 내 안에 혹은 나의 세계 안에 나의 것이 아닌 타자의 얼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존재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단지 거기 있음 상태로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사물)과 구분할 수 없다. 사물과 나 사이의 결정적인 어떤 차이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슬픔을 쉽게 극복하지 않으려 하는 것, 더 오래 슬퍼하려는 행위, 그 또한 삶에 대한 의지이자 권리이다.
물거품이 될 때 인간은 비로소 물이 된다 인간은 물이 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물은 거품에게 평생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도 물방울이 되는 순간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물도 거품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물거품이 된다 물은 거품을 통하여 비로소 겸손해진다
거품도 물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햇살에 스스로 영롱한 순간 거품이 꺼지면 물은 다시 거품을 물로 받아들인다
물은 거품을 받아들일 때 가장 겸손하다 인간도 물거품이 될 때 비로소 아름답다
— 정호승 〈물거품〉 《유심》 11월호
삶은 ‘타자’의 가능성과 함께 시작된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죽음에 대한 가능성을 받아들일 때 실현된다. 소멸과 죽음이라는 타자성을 받아들일 때 삶은 비로소 완성된다. 가령 정호승 시인의 시 〈물거품〉은 소멸을 상상하지 않는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만을 강요하는 삶이란 성찰이 부재하는 사회이다. “거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삶으로부터 배제하기 때문이다. 저 또한 거품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야말로 익명의 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존재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정호승 시인에게 그것은 자연의 순리이다. 소멸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대면하지 못하는 한, 인간은 자기 삶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인간도 물거품이 될 때 비로소 아름답다”는 마지막 구절은 이런 방식으로 “물거품이 될 때 인간은 비로소 물이 된다”는 첫 구절과 호응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시적 진술의 무게이다. 즉, 이 시를 읽는 동안 독자는 느낌에 대한 어떠한 강요도 받지 않는다. 시인은 독자를 향해, 당신이 반드시 느껴야 할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느낌을 강요받지 않는다는 면에서 독자는 편안하다. 하지만 그러한 편안함 속에서 순간적으로 삶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정호승의 많은 시가 그랬듯 이 시 역시, 독자로 하여금 세상을 향한 시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자기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내성(內省)의 시간이 주어지지만 어떤 강요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역설. 그것은 정호승 시인의 힘일 것이다.
정호승의 진술들은 묘사보다 강하다. 그것은 시각에 의존한 현대적 감각체계로부터 벗어나 오롯이 의미만을 전달함으로써 미학적인 것이 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삶이 은폐한 진실들을 단 하나의 문장 혹은 단어 속에 응축함으로써 희미해져 가는 시의 아우라를 되돌려 놓는다. 그 속에는, 마치 시적 진술들을 대신할 듯 잠언에 가까워지는 상업광고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시의 품위가 존재한다. 드물지만 시적 진술이 불러일으키는 이런 종류의 깨우침이 존재하므로, 대중은 아직도 시를 읽는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귀퉁이가 좋았다 기대고 있으면 기다리는 자가 되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가 물러갔다 뭔가가 사라진 것 같아 주머니를 더듬었다
개가 한 마리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개 개도 나를 처음 봤을 것이다
내가 개를 스쳤다 개가 나를 훑었다
낯이 익고 있다 냄새가 익고 있다
가을은 정작 설익었는데 가슴에 영근 것이 있어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땀을 흘리는데도 개는 가죽을 벗지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
땀을 흘리는데도 나는 외투를 벗지 않고 있었다 어찌하지 않은 일
우리는 아직 껍질 안에 있다
뭔가 잡히는 것이 있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꼬깃꼬깃 접힌 영수증을 펴보니 다행히 여름이었다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
— 오은 〈계절감〉 《유심》 11월호
오은 시인의 〈계절감〉은 어떤 기다림에 관한 시다. 그것은 그 무엇도 기다려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시적 응전(應戰)이다. 정호승 시인의 시와는 사뭇 다르다. 오은의 이 시는 세상에 대한 서정적 도전이다. 모든 것이 대지 위로 녹아내리는 세상이다. 그것은 그 어느 순간도 간직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혹 지울 수 없을 것 같은 가혹한 사건이었다고 해도 결국 지워진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인정하게 된다. 망각은 자연스럽다고 자위한다. 하여 누군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정치적인 선언에 다름 아니다. 세속의 흐름 속에서 그 흐름을 비켜, 변하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하는 비행위(非行爲)야말로 변화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행위 아닌 행위로서 기다림을 지속하려는 시인의 삶이 세상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가령 오은 시인은 계절 감각에 관한 이야기로 이러한 비행위의 행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시인이 말하고 있듯, 개는 옷을 벗지 않는다. 아무리 더워도 제 털을 벗어던지지 않는다. 견딘다. 계절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개는 자신의 운명을 벗어던지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도 마찬가지다. 땀을 흘리는데도, 옷을 벗지 않는 시인이나 가죽을 벗지 않는 개가 한순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즉, 개의 적절치 못한 계절감각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인의 계절감은 “어찌하지 않은” 것이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非行爲]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하나는 무의지(無意志)로, 다른 하나는 의지로써 그리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부적절한 계절감은 그 자신의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 환언하면 존재함에 대한 명령이다. 익명성을 벗고 삶의 품위를 되찾으려는 시적 노력인 것이다.
그의 외투 속에서 발견된 지난 시간의 “영수증”처럼, 과거는 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시인이 대면해야 할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외면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외면하지 않겠다는 결심에 의해서 그리된 것이다. 오은은, 기다림이라는 전통적인 서정의 어조를 주체적 행위로 변환시키고 있다. 시인을 좀 더 미련이 많은 사람이라 부를 수는 있으나 용기 없는 자라고 부를 수는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서정이, 슬픔을 견딘, 세상에 대한 포용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시가 어떤 용기 속에서 쓰이고 있는가를먼저 말해야 하리라.
공전하는 감정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습관과 중독의 차이는 알 수 없지만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면 지루하지 않았고
우리는 둥글게 돌았다 언제나 제2의 지구를 꿈꾸고 불안은 또 다른 불안으로 벗어날 수 있는지 하늘을 베고 지나가는 별들의 단호한 의지
불 꺼진 주방에 흐르는 우주의 낯빛 층계를 타고 연속되던 폭발 우리 그때 춤을 추었지 스텝이 화려해질수록 멀어지는 지구의 빛 자고 나면 조용히 변해버린 냄비 속 음식과 네 안에 얹혀 있는 내가 아닌 사람 같은 거
밤마다 서로를 안은 채 별들이 떨어진다 한 입속에서 느리게 변해가는 우리 내가 아닌 사람의 이름이 네게서 불릴 때 환하게 웃으며 네게로 걸어가는 너는 여전히 별을 보며 소원을 비는지 하나의 행성이 추락하고 있다
— 김지윤 〈별의 수명〉 《현대시》 11월호
시인들은 어떻게 슬픔 속에서도 시를 계속해서 쓸 수 있는 것일까.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 아니 사람들은 언제부터 추락하는 것에 대고 기도하게 되었을까. 떨어지는 유성을 바라보며, 또는 이제 곧 사라질 보름달을 향해 소원을 말하는 법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기실 그것은 오래된 인류의 습관이자 시의 본질이다. 즉, 시인들은 슬픔을 사유하기 위해 제 운명을 소진한 채 소멸해가는 것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다시 도래할 가망이 없는 것들과 마주하려 한다. 그리고 슬픔에게 말을 건넨다. 불가능한 꿈을 이야기한다. 캄캄한 밤에도, 아니 캄캄한 밤이어서 시인은 추락하는 것들을 더 안타깝게 보듬는다. 그것은 추락하는 것이 품고 있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 때문만은 아니다. 슬픔 속에서도 시를 계속해서 쓴다는 것은, 시가 이미 하나의 감정이자 의지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시인이 가진 어떤 절망적 의지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시는 희망이 사라진 세계에도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사위가 막막할수록 더 절망적으로 희망을 노래한다. 이것이 시인이 슬픔이라는 감정을 통해 한 시대를 관통하여 보편적인 느낌의 구조에 도달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김지윤 시인의 〈별의 수명〉에서 슬픔은 삶에 대한 의지들과 뒤섞여 “춤”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죽음에 이르는 타나토스적 감정들은 춤의 “폭발”을 통해 삶의 의지로 전이된다. 죽음을 향한 감정과 삶에 대한 의지가 결합함으로써 춤은, 기존의 일상적인 맥락들을 초월해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간다. 말하자면 춤은 감정과 의지가 융해된 상태와 같다. 춤은 “지구의 빛”이 멀어지도록 만드는 상상력의 물질적 힘인 것이다. 춤은 감정의 형식이자 “하늘을 베고 지나가는 별들의 단호한 의지”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습관”이나 “중독”과 같이 상투화된 감정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세상을 변화시킬 어떤 의지도 태어난다.
시인은 묻는다. 하나의 행성이 추락하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당신은,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을 위해 슬퍼할 자신이 있는가. 슬픔은 하나의 의지다. 희망 없이 희망한다는 것, 그것은 추락하면서 더욱 아름다워지는 존재들의 역설적 측면이다.
방 한쪽에 코끼리 한 마리가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아무 말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위로도 타이름도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 듯이, 널따란 귀로 얼굴을 가리고
여기는 이제 네 집이 아니라고, 그만 일어나 저 문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나는 재촉하지 못하고
이불처럼 커다란 귀를 덮고 코끼리는 잠을 잤다 방을 어지럽히거나 물건을 부수는 일도 없이, 간직한 이야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듯이
내모는 일은 어렵겠구나 마음먹고 들여다보지 않은 며칠
너는 떠났다 광목 이불 같은 귀를 베어서 머리를 두고 눕던 자리에 곱게 개어놓고
나는 그것을 펼쳐서 덮지는 못하고 가만히 베고 누워 우리 함께 이불을 빨던 여름날을 생각했다 이제 온기라고는 없는 서러운 바닥에서
— 유병록 〈이불〉 《현대시학》 11월호
그러므로 진정한 슬픔은 성숙하다. 즉, 슬픔을 이해한다는 것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슬픔을 사유하는 사람은,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타인의 말을 듣는다. 시 또한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즉, 마음으로 타인의 슬픔을 들어주는 것, 말없이 그의 슬픔이 소진할 때까지 다 기다려 주는 것, 그러고도 슬픔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것, 이 모든 과정이 슬픔이다. 물론 슬픔이 삶의 의지가 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슬픔의 공정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슬픔은 때로 침묵해야 하고 때로는 깊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슬픔이 더 큰 슬픔이 되어 되돌아오도록 기다려 주어야 한다. 슬픔이 자기 자신의 테두리를 벗어나 더 먼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 다른 존재와 만날 수 있도록.
유병록 시인의 〈이불〉에서 이 크나큰 슬픔은 “코끼리”다. 어느 날, 방 한쪽에 코끼리 한 마리가 들어와 누워 잠들었다. 코끼리는 떠나야 할 때가 되어도 떠나지 않았다. 어떤 위로도 타이름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으로 그 방에 머물렀다. 그리고 슬픔이 간직한 이야기가 잠잠해질 때에서야 비로소 떠났다. 한 순간도 코끼리는 존재함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커다란 슬픔이 압도하는 시간들을 견뎌내고 견뎌낸 후 길을 떠났다. 그러므로 슬픔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존재이다. 슬픔을 기억하지 않고, 억누르고 내쫓는 한, 삶은 깊이를 가질 수 없다. 하여 시인은 말한다. 슬픔이 없는 삶은, 즉 코끼리가 떠난 빈방은 슬픔이 존재할 때보다 더 서럽다고. 그 점에서 슬픔은 “이불”이다, 존재의 몸을 덥혀 주는.
슬픔을 극복하는 데 시인들은 한없이 느리다. 그것은 시인이 슬픔의 근원을 보려 하기 때문이다. 슬픔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슬픔을 이해한 후에야, 슬픔을 떠나보낼 수 있다. 그것은 슬픔을 사유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슬픔은 소란이자 사건이다. 때문에 시인들은 슬픔의 과도함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써내려간다. 시를 쓴다는 것은, 슬픔을 용납하지 않는 망각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다. 시인은 슬픔을 의지(意志)한다.
하여 시인은 권유하지 않는다. 슬픔을 잊으라고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하라고. 슬픈 사람으로부터 슬픔을 빼앗는 것은 자유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타자에 대한 윤리적인 인식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다. 슬픔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다. 슬픔이야말로 자유의 진정한 기초이다. 거기 단지 있음으로서의 익명성을 벗고 하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슬픔을 지속할 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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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숙 / 문학평론가. 2005년 《유심》으로 등단. 평론집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가 있음. 현재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HK연구교수.
만약이라는 약이 있다면 이 세상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이 있었다면 늦잠도 자지 않고, 지하철을 놓치지도 않고, 바지에 커피를 쏟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이 있어 시인이 되지 않고, 대화보다 침묵을 좋아하고, 새벽보다 아침을 더 좋아했다면, 인생이 훨씬 편해졌을 것이다. 만약으로 그날 그 시각, 너를 마주쳤던 순간을, 너에게 꺼냈던 그 말을 지울 수만 있다면 이런 고통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텐데. 만약이 있었다면 세상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만약이 없기에 ‘만약’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너무도 간절하기에 자꾸만 되새겨볼 뿐 절대 가질 수 없는 약, 만약. 가정을 허락하지 않는 역사처럼 우리네 삶에도 만약은 주어지지 않는다. 만약에 만약이 있다면 삶은 꽤나 심심할 것이다.
이혜원(문학평론가, 고려대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아찔
좋아하는 단어가 사라지는 꿈을 꿨다. 잠에서 깨니 그 단어가 기억나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 할 말이 없는 표정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다른 기분으로 듣는다. 종착역보다 늦게 도착한다. 만남은 성사되지 못한다. 선율만 흐를 뿐이다.
들고 있던 물건들을 다 쏟았다. 고체가 액체처럼 흘렀다. 책장에 붙어 있던 활자들이 구두점을 신고 달아난다. 좋아하는 단어가 증발했다.
불가능에 물을 끼얹어. 가능해질 거야. 쓸 수 있을 거야. 가능에 불을 질러. 불가능해질 거야. 대단해질 거야. 아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야.
10년 전 오늘의 일기를 읽는다. 날씨는 맑음. 10년 후 오늘은 비가 내린다. 오늘에서야 비가 내린다. 지우개 자국을 골똘히 바라본다. 결국 선택받지 못한 말들, 마침내 사랑받지 못한 말들이 있다. 다만 흔적으로 있다.
어느 날 우리는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서 다른 음악을 같은 기분으로 듣는다. 시발역보다 일찍 출발한다. 불가능이 가능해진다. 착각이 대단해진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오늘 저녁에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찰나, 식당 하나가 문을 닫았다. 메뉴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배 속이 끓고 있다. 턱턱 숨이 막히고 있다. 당장, 당장.
시공간이 한 단어에 다 모였다.
우리 학원
학교에 있던 학생들이
학원에 고스란히 앉아 있었다
준비물처럼
책상 위에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사용되었지 우리 학원에서
우리가 우리를 사용할 때
우리는 주어일까 목적어일까
영어 선생님이 물었지
자기도 모르면서
학생이었으면서
옛날에 우리 학원에 다녔으면서
샤프심처럼 뚝뚝 끊어지고
지우개처럼 똥을 끌고 다니고
자처럼 재기 바쁘다가
노트처럼 갈가리 찢어졌으면서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음악 미술 체육
비결은 있었지만 도덕은 없었다
노트는 있는데 샤프가 없는 상황처럼
샤프는 있는데 샤프심이 없는 상황처럼
샤프심은 있는데 지우개가 없는 상황처럼
매시 매분 매초가
부족했다 위태로웠다
그래도 지구는 돌고
사회를 미처 다 배우지 못하고
사회에 투입되었던 학생들이
학원에 고스란히 앉아 있었다
준비가 완료된 준비물처럼
입을 앙다물고
마지막 학원에
마지막을 위한 학원에
죽을 준비를 도와주는 학원에
준비물은 둘 중 하나만 있어도 되었다
노쇠하고 병든 몸뚱이나 살고 싶지 않은 마음
우리 학원에는
이미 늙거나 벌써 아픈 우리가
우글우글 들끓었다
우리 학원에서 한 번쯤 만났던 친구들이
각도기처럼 앞과 좌우만 볼 수 있었던 친구들이
완벽한 준비물이 되어
360도 회전이 가능한 컴퍼스가 되어
샤프심이 장전된 샤프가 되어
우리 학원인데
우리 것은 아닌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음악 미술 체육처럼
한 번도 우리 것인 적은 없었던
우리 학원에
더 이상 준비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준비물들이 있었다
원생이기를 이제 그만 포기하기 위해
난생처음 순순히
학원에 발 들인 학생들이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우리라고 말할 때
목적어에서 주어가 될 때
보어 없이도 완전해질 때
비로소 대명사가 된
우리는 뒤를 돌아보며
도덕은 다음 생에서 배우기로
—시집『유에서 유』(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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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현대시’ 오형엽 주간은 ㅡ오은 시인의 시 세계
언어유희의 미학을 극단까지 밀고 가면서 사회비판의 메시지를 던지는 방법을 통해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한 방향을 제시해왔다. 언어가 시의 알파이고 오메가라는 사실을 말놀이의 실험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면서 동음이의어와 유사어문을 활용하여 리듬감을 형성하는 동시에, 의미를 장식하여 소비만능의 현대사회를 풍자하는 방식으로 그의 시적 전개 과정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특유의 블랙유머가 주는 재미와 사회적 모순에 대한 냉소적 아이러니가 상호충돌하며 빚어지는 충격의 미학은 그가 개척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로 평가될 수 있을 것 그의 시가 시적 방법과 주제의 영역에서 실험의 강도와 밀도를 더 강화해나가길 기대한다.
”고 전했다.
오은 시인의 수상소감
ㅡO와 o’라는 시는 아버지가 항암치료를 막 시작했을 때 썼던 시인데, 제 이야기를 썼다고 생각했다. 다 쓰고 나니 대문자 O가 아버지일 수도 있고, 소문자 o가 아버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를 다 쓰고 슬퍼졌는데, 이런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렇게 슬펐던 경험이 수상의 기쁨으로 이어지니 신기하다. ‘O와 o’를 수상작으로 선정해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사람 (외 2편)
오 은
뒤가 급해 화장실 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안에 사람 있습니다.”
또렷한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볼일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이 있었고 아침 햇살이 있었다
황무지가 있었고 뱃고동이 있었다
무인도가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았던 곳에 기척이 있었다
아무도 발 들이지 않았던 곳에 자취가 생겼다
발가벗은 아이가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아이가 있었다
기쁘다
부끄럽다
태어난 그대로라 아이는 기뻤다
아이를 만난 나는 부끄러웠다
볼일을 보지 않아서
실은 너무 많은 것을 봐버려서
밤하늘처럼
황무지처럼
무인도처럼
어느 순간 변해버려서
기쁨이 있었고 부끄러움이 있었다
온몸으로 기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었다
다행히 아직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
풍경화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정물처럼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죽고 싶어요
사람이 말했다
죽기 싫어요
사람이 말했다
실은 모르겠어요
사람이라 말했고 사람이라 거짓말했다
믿음이 있었고 믿어주는 척하는 사람이 있었다
속음이 있었고 속아주는 척하는 사람이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척들이 있었다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자취들이 있었다
밤하늘을 뒤덮는 아침 햇살처럼
황무지에 울려 퍼지는 뱃고동처럼
무인도를 수놓는 사람처럼
어색하고 껄끄러웠다
아이가 시원하게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너는 누구니?
아이는 도리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누구지?
지갑이 제대로 있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불이 나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근사한 집을 짓거나
어딘가에 불쑥 나타날 때에도
아직 당신이 사람임을 증명할
또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볼일을 다본 아이가 씩씩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물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풍경이 되었다
밤하늘이 아침 하늘이 되는 것처럼
황무지에 새싹이 돋는 것처럼
무인도에 온기가 도는 것처럼
꾸밈없고 자연스러웠다
기쁘다
부끄럽다
기뻐서 마침내 부끄러운 사람이 있었다
부끄러움을 알아서
겨우 기쁜 사람이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바깥에도 사람이 있었다
아직 화장실이었다
보는 일이 앞에 있었다
궁리하는 사람
이야기가 필요해
사람이 있고 집이 있고
집에는 책이 있고
식탁 위에는
꽃병도 있는 이야기
정작 꽃병에 물이 없었다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지
숨기고 싶고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고
그래도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하는 이야기
집 안에도, 책 속에도
식탁 위에도
이야기는 무궁무진하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꽃은 시들고 있었다
암만 씻어도
아무리 청소해도
제아무리 들여다봐도
표가 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야기를 떠올리다
꽃병에 물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꽃에 물을 주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이야기
오고 가야
나누는 것이 되고
담론이 되어 밤을 밝히고
항간에 떠돌며 손상되기도 하다가
이야기의 끝에서 기적적으로 만나는 이야기
밥때가 되면
식탁 위에서 다시 외로워지는 이야기
운때가 맞지 않아
집 안에 자취를 감추는 이야기
침묵하는 꽃을 핑계 삼아
또다시
이야기는 장황해지고
이야기는 쓸데없어지고
이야기는 황당무계해지고
이야기는 거짓말만 같아지고
꽃병에 물을 채우다
이야기를 꺼낸 사실을 잊고 말았다
사람이 있고 집이 있고
집에는 책이 있고
꽃병에 물만 채우면
소문처럼 부풀어 오를 줄 알았던
이야기가
말문 밖으로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궁리하지 않으면
말하기 전에 벌써 곤궁해졌다
세 번 말하는 사람
o는 꼭 세 번씩 말했다 그의 입에서 같은 말이 속사포처럼 작게 세 번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크게 한 번 놀랐다 같은 말을 연속해서 듣는 것은 고역이었다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라니!
혀가 짧아서, 속사포의 성능이 좋지 않아서, 단어의 시작과 끝이 토마토나 아시아처럼 같은 음절이어서 어떤 말은 세 번 말해야 상대가 겨우 알아들었다 불발이 된 단어는 늘 부끄러웠다
김치볶음밥에 어떤 재료를 추가하고 싶으신가요?
피망, 피망, 피망
말할 때 너무 열을 올려서 그런지 세 번째 피망은 피멍처럼 들리기도 했다 놀란 종업원이 조건반사처럼 고개를 세 번 끄덕였다 덕분에 피망볶음밥에 가까운 김치볶음밥이 나왔다
한 번만 말하면 의심스러웠다 뜻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상대가 말을 제대로 듣긴 했는지 간파할 수 없었다 파열음이나 마찰음이 섞여 있기라도 하면, 한 번 만에 의사를 전달하는 건 불가능했다
두 번을 말하면 상대가 의심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꼭 두 번을 말한다고 했다 사기꾼들은 보통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두 번 말하지 투자하세요, 투자하세요 수익이 납니다, 수익이 납니다
과감하게 투자하실 건가요?
수염, 수염, 수염
수익이 나는 걸 기다리느니 수염이 나는 게 빠르겠다고 답하려다 실패했다 웃음이 났는데 참다 보니 눈물이 났다 속사포의 방아쇠는 총알의 일부만 견인할 때가 많았다
세 번씩 말하면 사람들이 집중했다 세 번 말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겨졌다 간절한가 봐, 강조하고 싶은가 봐, 각인시키기 위해서인가 봐 봐봐,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잖아!
세 번째 말할 때 입천장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식욕이 돋았다 무조건반사처럼 천장에서 단비 같은 침이 쏟아졌다 o는 그것을 다시 식도 뒤로 꿀꺽 삼켰다
저녁에는 무엇을 드시고 싶습니까?
차장면, 자장면, 짜장면
속사포에서 파찰음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시집 『나는 이름이 있었다』 2019년 9월
(2019년 대산문학상 제27회 수상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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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왼손은 마음이 아파』 『나는 이름이 있었다』. SNS : http://twitter.com/flaneur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