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자세히 보려다가
전체는 못 본다
가출해야 성공한다
제목을 소방차라 지으면 사고思考가 그것을 맴돌고 진술 역시 그 제목에 끌려가게 된다. 화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소방차의 상징은 호스, 사이렌, 붉은색 등등 다양한데 통상적으로 떠오른 것을 먼저 표현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군살을 붙이는 단계까지 가버린다. 반면에 제목만 봐도 내용이 짐작된다면 그 시를 도두보긴 힘들다. 제가 지은 제목을 이기지 못하니 희한하다. 왜 이럴까. 먼저 정했기 때문이다. 제목은 소파의 오목한 단추 같은 것인 누빔점이면서 엠블렘(Emblem)의 역할도 한다. 역설적으로 시거나 시집이거나 제목이 반이다. 시집 제목이 맘에 들어 샀다는 말도 들었다. 쓰느라 사흘, 제목 정하는데 나흘이 걸려야 맞다고 생각한다.
디카시는 사진과 반대방향으로 가야한다. 독자가 짐작하는 방향을 비웃는 시가 명품이다. 익숙한 정서에 기대어 쓰는 건 돌려막기일 뿐이다. 모두冒頭를 이어받아서, 제목과 본문은 불편한 관계여야 한다. 은유적으로 길항拮抗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에 있어서 설명은 극약과 같기에 서로를 설명하면 망한다. 사진을 보면 이것 같고 본문을 읽으니 또 다른 생각과 이미지가 들끓는 게 명작이다. (디카)시는 읽을 때마다 천편만화로 둔갑하는 요괴여야 한다. 답이 정해져있고 거기서 문제를 추출할 수 있다면 교과서로나 가야할 시다(시에서 시험 문제를 낸다는 일 자체가 넌센스다).
부분으로 전체를 묘사해야 한다. 다리, 귀, 코 같은 부분으로 코끼리를 묘사하는 사람이 고수다. 경제적으로 써야한다. “빼도 지장이 없는 단어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뺀다.”는 조지오웰의 글쓰기 원칙도 있다. 같은 말 빼고 장황한 단어 줄이고 익숙한 비유도 지양한다. 퇴고는 덜어내는, 깎아버리는 작업이다. 조각처럼 더는 덜어낼 것이 없는 단계가 완성형이다. 사진이라는 이미지에는 색깔 형태 위치 등등의 형용사들을 내포하고 있는데 거기 또 형용사로 수식한다면 더부룩해진다. 독자는 소화불량에 걸리고 지루함에 빠진다. “파란”이라는 형용사로 독자에게 강요하기보다 독자 스스로 “파란”을 상상하고 더불어 서늘함까지 느끼게 해야 고수다. 시를 읽다가 메모했는데 그 만년필의 푸른 잉크가 새롭게 보이는 상황이다. 상상력 충만한 독자라면 거기에서 강릉바다, 애인의 스커트, 딸의 헤어밴드 등등 무한대로 펼쳐질 것이다. 고수는 시 한 편으로 시공을 넘나들게 만든다.
명사를 혁파해야 성공한다. 오염된 기존의 이미지들을 지워야한다. 비둘기를 소재로 한다면 평화, 공원, 다정함 같은 상투성을 피해야한다. 그것들을 따라가다가는 시가 통속으로 빠진다. 사진은 고정화면인데도 선다, 앉는다, 난다 같은 류의 동사를 내포하기에 그것들을 뒤집는, 이른바 전복적 사고가 필요하다. 비둘기가 땅을 파고 강이 날아가야 우리 안의 자동화된 인식을 깨고 거기서 정서적 환기가 일어난다. “시는 정서로부터의 도피”라는 엘리엇의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의 정서는 대상을 보며 일어나는 “1차정서”와 대비하여 그 이후에 스미어 나오는 “2차정서”이다. 설악산 현장에서 쓴 시는 감정이 앞설 것이고 돌아온 다음날의 시는 정돈되고 나지막하다. 이렇게 다르다. 주관이라는 집에서 가출해보라.
소재로서의 사물(풍경)을 찾지 않고 응시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게 좋을 듯 싶다. 찾으면 서두르는 마음이 생기고 조급해지면 거기에 자기감정을 투사하는 문장이 나온다. 아차하면 “슬퍼하는 바위”, “웃는 자전거” 류의 감상적오류(존 러스킨)를 범할 수도 있다.
추신 : 시가 안 돼서 디카시로 바꿨다는, 장르 갈아탔다는 시인에게 "늑대 피하려다가 호랑이굴에 드셨습니다"라고 하련다.
전영관 충남 청양 출생. 2011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슬픔도 태 도가 된다』 외.
[출처] 47호/ 전영관. 이기영|작성자 dpoem21
첫댓글 “빼도 지장이 없는 단어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뺀다.”는 조지오웰의 글쓰기 원칙도 있다. 같은 말 빼고 장황한 단어 줄이고 익숙한 비유도 지양한다. 퇴고는 덜어내는, 깎아버리는 작업이다. 조각처럼 더는 덜어낼 것이 없는 단계가 완성형이다.
“시는 정서로부터의 도피”라는 엘리엇의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의 정서는 대상을 보며 일어나는 “1차정서”와 대비하여 그 이후에 스미어 나오는 “2차정서”이다. 설악산 현장에서 쓴 시는 감정이 앞설 것이고 돌아온 다음날의 시는 정돈되고 나지막하다. 이렇게 다르다. 주관이라는 집에서 가출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