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188호 배타적인 생각을 버리면 너희도 할 수 있다 (막9:17~29)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이 말씀은 수용과 배척의 기준이 되는 말씀입니다. 수용(受容)은 받아들이는 것이요, 배척(排斥)은 싫어서 밀어내거나 거부하는 것으로, 위 말씀을 보자면 ‘세상’과 ‘나’(예수를 믿는 자)는 배타적인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밀어냅니다. 배척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부를찌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찌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잠1:24~25).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사30:9).
하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조차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6:3).
예수를 배척한 결과요? 이렇습니다.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잠1:26~30).
반대로 믿는 자들은 세상을 배척합니다. 밀어냅니다. 왜냐?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수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
세상을 배척해야 하나님을 모셔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세상의 자랑하던 것들을 아낌없이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빌3:8). 그래야 하나님을 수용할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에 100%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후1:20). 그런 그가 받을 것은 이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8).
저는 자주 목회 38년을 뒤돌아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니 먼저 세상이 저를 배척합디다. 가장 사랑하던 가족들, 친구들이 저를 버립디다. 그래도 저는 괜찮았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배척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된 후, 교단에서도 배척을 당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의 사후의 영이 귀신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역시 괜찮았습니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교단에서 제명된 후에 교회에 돌아와 성도들과 함께 떡을 떼며 잔치를 할 정도로 되레 감사했습니다.
저는 하나님 말씀을 100% 믿고 수용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무식하게 믿어라.”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 말씀에 토 달지 않고, 이해가 안 돼도 묻지도 않고 믿습니다. 특별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는 말씀을 완전히 믿고, 레마로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냐?”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게 겸손일까요? No!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한 것입니다. 이런 배척, 배타적 생각은 고착된 사고의 틀에서 비롯됩니다. 사고가 옛것에 답답하게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사해가 왜 썩고 있나요?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나 인식도 갇혀 있으면 썩습니다. 알량한 지식이란 틀, 쥐꼬리만 한 경험 안에 갇혀서 하나님을 그 잣대로 재고 있으니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막9:23)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안 되는 것은 기름이 물을 배척하듯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겸손을 가장한 배타적인 생각으로, 겉으론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속으로는 예수를 배척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23:27).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세상에서도 왕의 자녀가 누리는 권세와 능력은 대단하건만, 하나님의 자녀에게 불가능할 게 뭐가 있단 말입니까? 그럼 못 살고, 아프고, 능력도 없어야 정상입니까? 예수님이 낮아지라고 하심이 가난해서 빌어먹으라는 걸까요? 아파서 늘 빌빌거리라는 걸까요? 아닙니다. 있어서 주며 살되 섬김의 자세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해야 할 권리도, 아플 권리도, 망할 권리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이것들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그 밥에 그 반찬으로 사는 것은 고정관념, 잘못된 인식이 딱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사장들이 지식을 버려서 그렇습니다. 가르치는 자가 잘못 가르쳐서 그리된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지요(눅6:39).
성경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4)고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 역시 100% 믿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럼 안 되는 게 하나도 없게?”라고 따집니다. 당연히 안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했는데 안 되던데요?’ 하십니까? 왜 기도했는데 안 되느냐? 첫째는 ‘이게 될까?’ 부정의 생각 때문이요, 둘째는 아직 기도의 독이 안 차서요, 셋째는 열매가 맺히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정욕으로 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수용하여 순종하면 하나님이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분명히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을 배척하지 않고 온전하게 수용하고 행하는 자에게 놀라운 축복을 하십니다. 신명기 28장에 주신 복의 주인이 될 것이고,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복, 즉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고전2:9).
여러분, 내 안을 잘 살펴보세요. 내 안에는 상극인 두 마리의 동물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들은 늘 으르릉거리며 상대를 잡아먹으려고 난리입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대사도 바울도 속에서 싸우는 두 놈 때문에 힘들어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7:23).
그럼 두 놈 중 누가 이길까요? 당신이 어느 것에 더 먹이를 많이 주느냐, 어느 것을 배척하고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부정’이란 동물에 관심을 갖고 먹이를 많이 주면 상대적으로 ‘긍정’이란 동물은 힘을 잃어 당신은 부정적인 사람이 될 것이고, 또 당신이 ‘미래’라는 동물을 굶기고 배척하며 ‘과거’라는 동물을 먹여 살찌우면 당신의 삶은 과거에 발목이 잡혀 발전과 성장이 없게 됩니다. 제가 자주 말하지 않습니까? 병을 떠받치고 사는데 병이 떠나겠냐고요. 가난을 떠받들고 있는데 가난이 떠나겠느냐고요. 부정과 과거, 그리고 병과 가난은 배척해야 할 대상이지 품에 품고 먹이를 줄 대상이 아닙니다. 행복하고 싶습니까? 건강하고 싶습니까? 가난과 병을 배척하세요. 쫓아버리세요. 그리고 행복과 축복, 건강을 수용하세요.
지금 나는 어떤 것을 배척하고, 어떤 것을 수용하고 있는가 돌아봐야 합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성패는 물론이요, 영생과 영멸을 판가름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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