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때는 밥상머리 교육으로 국가 운영 감각을 익혔다. 20대 때는 나라 안팎을 챙기며 국민과 국가를 내 가족 이상으로 챙겼다. 30대 때는 동서양 고전을 탐독하고 사색하며 스스로를 단련하면서 부모님 추모사업과 무료병원, 장학 사업에 매진했다. 40대 때는 IMF로 흔들리는 나라를 반석 위에 다시 세우고자 정치에 입문. 50대 때는 천막당사에서 한나라당을 재건했고 우리나라 정당사에서 최초로 당대표 임기를 완수했다.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책날개에 적힌 글이다. 이 책은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의 자서전이다. 박 의원은 2012년 7월 10일 영등포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대통령 출마 선언을 했다. 1952년생이므로 한국나이로 61세인 박 의원의 60대는 대통령으로 소명을 다 하는 것으로 정한 것 같다.
“국민의 삶과 함께 가겠습니다. 국민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출마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슬로건을 두고 트위터에서 니 꿈이냐 내 꿈이냐 갑론을박이 전개됐다. 어쨌든 국민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는 살기에 나쁜 나라는 아닐 것이다.
박 의원이 언급한 국민의 꿈을 보기 위해 출마 선언문을 읽었다. 주택문제, 노후대비, 정쟁 쇄신, 일자리 창출로 인한 경제 민주화, 복지확대, 시장경제 질서 확립, 문화산업, 교육, 남북의 신뢰회복, 투명한 정부 등이 선언문의 골자를 이루고 있다.
내가 눈여겨 본 것은 경제문제였다. 경제문제는 일자리 창출과 직결된다. 취업이 안정되면 소득이 증대한다. 지금과 같은 취업인구의 1/3를 차지하는 비정규직 문제도 해소할 수 있다.
비정규직은 저임금과 무단해고로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일방적인 해고는 생활 기반이 깨지고 삶의 존엄성을 잃는다. 기본적인 생활비용을 충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의료비와 교육비마저 포기하게 된다. 생계를 위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범죄에 노출되는 위험성도 높아진다. 사회 안전망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숨통이 막힌 것이다. 여기에 사회에서 필요없는 존재라는 정신적 충격까지 가세한다.
“정당한 기업활동은 최대한 보장하고 불필요한 규제는 철폐하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지만 영향력이 큰 기업일수록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데는 과감하고 단호하게 개입하는 정부를 만들겠습니다.”
박 의원은 선언문에서 ‘일자리 창출’만 언급했을 뿐, 구체적으로 노동자의 처우 개선과 기업의 정리해고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국민들의 절박한 상황을 인지 못하는 듯 70년대식의 기업활동이니 경제활력이니 하는 원론적 이야기만 했다. 이거다 하는 자신의 정책 포인트를 표명하는 대신 표를 의식한 경제민주화라는 모호한 구호로 그쳤다.
박 의원이 천명한 경제민주화는 김종인 선대위원장이 밑그림을 그린 것으로 전한다. 김종인 선대 위원장은 박정희 정권부터 노태우 정권까지 정계 노른자위에 있던 인물이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입안에 참여했고 전두환 정권 때는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노태우 정권에선 경제수석 비서관과 보건사회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처럼 역대 정권에서 막강한 실세 노릇을 하던 김종인은 1993년 안영모 동화은행장으로부터 2억여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전력이 있다.
이와 같이 김종인은 정부 입장에서 경제정책을 맡아왔다. 정부의 경제 정책은 기업 활동과 연계된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선언문의 주요 골자인 경제문제는 현명관 전 전경련 부회장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명관은 전 삼성물산 상임고문 출신이다. 김종인과 현명관은 권력의 지근거리에서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입법화하는데 거든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정부 측 인사였고 한 사람은 기업의 대변자였다.
헌법에 명시한 경제민주화 개념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헌법 제119조 ①항-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헌법 제119조 ②항-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①항은 포괄적 의미의 경제 질서를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②항에서 ‘소득의 분배’와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방지’가 눈에 띈다. 헌법에 명시한 해석대로 하자면 임금차별이나 집단해고가 발생하지 않는 경제 상황이 경제 민주화다. 취업을 보장하고 부의 균등한 분배로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을 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의원이 선언문에서 강조할 정도로 한국의 경제상황은 안 좋다. 국민 3명 가운데 한 명이 비정규직이며 비정규직의 일방해고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지난 몇 년간 노동자 해고와 농성과 투신자살이 사회면 뉴스를 장식했다. 삼성이 연간 10조원의 순이익을 챙기고 대기업이 부동산을 장악하는 동안 노동자는 해고되고 길에서 농성 텐트를 설치했다.
경제정책을 만들고 입법화하는 사람들은 경제 전문가들과 정치인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경제학자를 포함해서 언론과 기업인들이다. 파워 엘리트 집단에서 국가의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것이다. 국가 경제 정책 지표는 기업이 제공한 자료, 또는 기업이 직접 개입한 기획안에 따라 정한다. 따라서 기업은 기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자료를 제공한다. 기업구성은 노동자라는 인적자산과 자본이라는 물적 자산의 결합이다. 유감스럽게도 기업을 운영하는 관리자는 인적자산보다 물적 자산을 기업의 재산으로 규정하는 것이 현실이다. 노동자를 동반자 관계가 아닌 고용해서 부리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희망텐트(사진출처:진보신당)
그렇지 않다면 우리 사회에서 범람하는 홍수와 같은 대량해고는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 정치인과 기업인이 결정한 경제정책이 노동자 입장을 철저히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과거 부패로 얼룩졌던 경제 관료와 기업 임원 출신을 선거캠프의 수문장으로 앉힌 경제민주화가 신뢰감이 안 생긴다. 이미 새던 바가지로 다른 우물물을 퍼 봤자 새는 바가지는 계속 샌다.
박 의원의 경제민주화가 공염불처럼 들리는 이유는 또 있다. 5선 의원인 박 의원은 16년간 의정 활동에서 한 차례도 노동쟁의 현장을 방문한 적이 없다. 재능교육 1600여일, 콜텍 1900여일, 코오롱 2400여일 노동권 투쟁이 지속되고 있지만 침묵으로 일관한다. 2011년 한국노동사를 뜨겁게 달군 한진 중공업과 유성실업과 3천여 명의 정리해고와 스물 두 명의 사망자를 낸 쌍용자동차 사태도 입을 열지 않는다. 6천여 장이 넘게 법원에 제출된 용산참사 철거민 불구속 탄원서와 같은 재개발 문제 역시 박 의원은 그 어떤 입장표명이 없었다.
박 의원과 ‘경제민주화와 꿈’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워낙 바쁘신 분이라 응해주실지 모르겠다. 2011년 11월 22일 한미FTA 가결 당시 찬성표를 던진 박 의원에게 트위터에서 질문을 했지만 아직 답변이 없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