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는 열지 마세요 / 안병석
항구도시 여학교 선생님이
첫 마음, 시집 한 권을 보내왔다
등을 흔들의지에 내주고
수평으로 누워 갈피를 넘기는데
표지의 나리꽃 허리째 안겨온다
이십여 년 흘림체로 산만한 아이들
솔숲 풍경 소리로 비끌어매느라
그악한 손금에 이슬도 젖었으리
해조음을 당겨 시를 썼는지
비린내 진동하는 뱃고동 소리
하이네의 로렐라이 언덕처럼 그윽하다
무슨 이유로
마지막 페이지는 열지 말. 라고 제목을 붙였는지
선생님
그 여자 첫 마음 시집
옷고름을 풀던 죄의 말, 시가 될까 봐
마지막 페이지를 열고도 읽지 못했네
우스꽝스러운 춤 / 안병석
어떤 시인이 '길은 마을에 가 닿는다' 했는데
난 '길은 산에 가 닿는다' 고 믿어요
우산을 잃으셨나요
고양이를 잃으셨나요
벽으로 둘러친 마을에서 찾지 말고
길이 닿는 산에 가 찾으세요
도토리나무 지나고 너덜 무덤 지나고
키가 큰 굴참나무 숲을 지나면 보일 거예요
발 하나로 우산을 받치느라
절뚝거리는 우스꽝스러운 고양이 말이에요
산이 함께 뒤뚱거리겠죠
길이 닿는 산으로 갑니다
피돌기가 선명한 손톱을 오무려 쥐고
남은 신발 한 켤레를 끌고
내가 어렸을 때 잃어버린
손수건과 국어책을 찾으러 산으로 갑니다
곱게 늙은 절터를 지나
납작한 바위에 올라 춤을 출 거예요
손수건과 국어책을 찾지 못해도 좋아요
춤이 우스꽝스럽겠죠. 별 수 없어요
경계가 허물어지면 다 그래요
글사랑닷컴
<우스꽝스러운 춤> / 안병석 시집 P85, P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