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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7일(오순절 후 열세 번째 주일)
사도행전 27:13~26
이제는 안심하라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알렉산더 대왕이 10배나 많은 적군과 싸워야 했던 때의 일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이 이끄는 군대가 두려움으로 크게 위축되어 있는 것을 느끼고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전쟁에서 승리할 묘안 하나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는 군사들을 모두 불러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전쟁에 대한 신의 계시를 묻자. 동전을 던져서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우리가 승리한다는 계시다. 뒷면이 나오면 패한다는 계시니 싸울 필요도 없다.”
알렉산더가 동전을 꺼내 던졌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모든 부하들이 숨을 죽이고 동전의 모양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해보았더니, 동전은 앞면이 나왔고, 이 일로 인해 용기를 얻은 군사들이 전쟁에서 승리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승리의 기쁨에 취한 한 장수가 알렉산더에게 말했습니다. “운명이란 참 무섭군요. 이렇게 정확하게 계시가 맞아떨어지다니요.”
그러자 알렉산더가 동전을 꺼내 그에게 주었는데, 장수는 그 동전을 받아 들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가 건네준 동전에는 뒷면 표식이 없고 양쪽 모두 앞면 표식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알렉산더가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양쪽 모두에 앞면 표식만을 새겨놓았던 것입니다.
-김남국, 「기다려라, 반드시 응하리라」, 규장, 2014; 「생명의 삶」, 두란노, 2018년 8월호, 101에서 재인용.
이처럼 우리에게는 신념이 중요합니다. 신념은 불가능을 가능하게도 만들고, 두려움을 극복할 힘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념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우리의 인생에는 신념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사도행전 27장은 바울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향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 율리오는 군사들과 바울을 비롯한 죄수들을 이끌고 가이사랴를 떠나 구브로 해안 길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들 일행이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렀을 때 배를 바꿔 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탔던 배는 군함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리던 상선이었습니다. 당시는 겨울이었고, 로마까지 먼 거리를 항해하는 배가 적어서, 백부장 율리오는 상선을 계약하여 죄수들을 후송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여행하는 지중해는 9월 중순부터 3월까지가 가장 위험한 시기였습니다. 9절에 보면,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기 때문에 항해하기가 위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때는 10월 초가 넘은 시기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때는 한 창 파도가 높아서 배가 항해하기 매우 위험한 시기였습니다.
이들이 가까스로 그레데 섬의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백부장과 선원들에게 이번 항해가 우리의 생명에도 많은 손해를 끼칠 만큼 위험한 항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조금 더 기다렸다가 겨울을 지나 항해하자고 권면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했던 이유는 그가 지난 세 번의 선교여행 중에 무려 열세 번이나 이 뱃길을 여행했었고, 그중 세 번이나 파산의 위험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10절에서 바울은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라는 말을 했는데, 여기서 “보니”라는 말의 헬라어 단어(쎄오로)는 바울이 성령의 감동에 의해 말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번 항해에 관한 바울의 충고가 개인적인 사견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18년 8월호, 147).
과연 이러한 바울의 경고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을까요? 안타깝게도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과연 누가 죄수의 신분이며 노인이었던 바울의 말을 믿겠습니까?
더군다나 이 배는 경제적인 가치를 중요시하는 상선이었습니다. 만약 상선이 한겨울 동안 항해를 중지한다면 얼마나 많은 경제적인 손실이 뒤따르겠습니까? 더구나 선장과 선주는 항해에 있어서는 바울보다 더 경험이 많고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고, 작은 미항보다는 더 크고 편리한 뵈닉스에서 겨울을 보내기 위해 무리한 항해를 시도했습니다.
이들의 결정이 맨 처음에는 좋게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다시 항해를 시작했을 때, 남풍이 순하게 불어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는 순풍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광풍도 불어옵니다. 이들이 무리한 항해를 시작하자, 남풍이 순하게 불어 대다수의 결정이 옳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입니다. ‘유라굴로’라는 말은 ‘북동풍’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어 안전하게 항해가 이루어졌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얼마 되지도 않아 북동풍이 거세게 불어 마침내 배가 통제 불능의 상태까지 놓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처음에는 호감을 느끼는 이성을 만나 사랑을 키워가며 인생의 순풍을 기대했는데, 막상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만하던 부부관계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는 경우가 있지는 않았습니까?
큰 돈을 벌기 위해 사업에 투자했더니 순풍이 얼마 불지도 않았는데, 유라굴로와 같은 재정의 광풍이 불어 큰 손실을 보는 경우는 또 없었습니까?
바울을 실은 배의 상황을 잘 표현해 주는 단어가 있습니다. 15절과 17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쫓겨 가다가…그냥 쫓겨 가더니.” 이 얼마나 막막한 상황입니까?
선장과 선원들은 자기의 힘으로 이 광풍을 헤쳐 나가고자 안간힘을 썼습니다. 16절에 보면, 선원들은 구명정을 배에 잡아 묶었습니다. 17절 상반 절에 보면, 선원들은 혹시 배가 부서질까 두려워 밧줄로 선체를 둘러 감았습니다.
17절 하반 절에 보면, 혹시라도 ‘스르디스’라는 모래톱에 배가 걸릴까 염려해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연장을 바다에 버렸습니다. 그다음 날, 그들은 귀중한 짐들을 바다에 버렸습니다. 그다음 날에는 항해하는 데 꼭 필요한 배의 기구들까지 바다에 갖다 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배가 방향 감각을 잃고 표류하게 된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여러 날 동안 해도 보이지 않았고, 별도 보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낮에 해가 있어야 좌우를 분별하고, 밤에 별이 있어야 남북을 분별할 수 있지만, 여러 해 동안 하늘의 해와 별이 보이지 않자, 이들은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러한 상황 속에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초반에 말씀드렸던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처럼, 우리에게는 신념이 중요하고, 신념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선원들이 과연 신념이 부족해서 문제였겠습니까? 신념으로 말하자면, 그들도 나름대로 풍랑을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념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을 만나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졌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해서 재기 불능의 상태에 빠진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루아침에 건강을 잃고 인생의 의미마저 잃어버린 사람은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주변에는 이런 분들이 꽤 많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향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여기 표류하는 인생을 향한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폭풍 속에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인간 편에서 구원의 여망이 사라져버렸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실 차례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잊혔던 죄수 바울이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바둑의 고수들은 경기를 마치면 자신이 둔 바울 알들을 거꾸로 복기(復棋)해 나간다고 합니다. 그들은 바둑알을 복기해가면서 패배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되돌아봅니다.
이번 광풍의 일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나요? 백부장과 선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바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는다면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길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이 문제의 원인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기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임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21절). 그리고 바울은 사람들을 안심시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22절).”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우리 다 함께 23절과 2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풍랑 가운데 표류하고 있던 배 위에서, 주님은 바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이러한 주님의 음성이 바울에게 들려진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큰 핍박을 겪고 있을 때도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23:11).”
우리가 인생의 강풍을 만나 구원의 여망마저 끊어졌다고 느낄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꽤 오래전 탄광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굴 한 가운데가 무너져 양쪽에 사람들이 갇혔습니다. 다행히 구조작업으로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각에 양쪽 굴이 모두 뚫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쪽 사람들은 다 살아 있는 반면, 다른 쪽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공기와 물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사 결과, 한쪽은 전화선이 연결되었고, 다른 한쪽은 전화선이 끊겼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구조대가 전화선이 연결된 사람들에게 계속 전합니다.
“살아 있나?” “걱정하지 마! 우리가 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 기중기가 도착했으니 얼마 후면 뚫릴 거야.” “지금 5m 내려갔어. 조금만 더 참아!”
이런 말로 그들이 일주일, 열흘을 견디게 했습니다. 양쪽 다 똑같은 환경이었지만,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과 비(非)신앙인의 차이입니다. 모두 같은 태풍 속, 같은 고난, 같은 어려움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들은 그 마음에 소망을 품고 풍랑을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에게는 소망과 위로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남편이나 아내, 자녀들, 주변 사람들까지 안심시키고, 그들에게 살 힘을 줄 수 있습니다.
인생의 태풍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저 여러분의 영혼을 하나님과 연결하셔야 합니다.
-박정근,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자의 모습」, 누가, 2009; 「생명의 삶」, 두란노, 2018년 8월호, 97에서 재인용.
우리가 인생의 강풍을 만났을 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들입니다.
또한 우리가 인생의 강풍을 만나 구원의 여망마저 끊어졌다고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25절).
바울은 불안에 떨고 있던 사람들을 향하여 “안심하라!”고 말했고, 자신에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풍랑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신천웅’이라고 불리는 바닷새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새가 ‘나그네새’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새는 크기가 80~91cm 정도인데, 날개를 펴면 2m가 됩니다. 또 이 새는 장수해서 60년을 삽니다.
그런데 이 새는 나는 데 필요한 힘의 99%를 바람에 맡긴다고 합니다. 자신의 날갯짓은 겨우 1%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새는 자신을 바람에 전적으로 맡기다 보니 폭풍도 즐길 수 있습니다.
이 새는 바람이 불수록 큰 날개를 펴서 힘들이지 않고도 더 멀리 날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하늘을 믿고 나는 노인”이라는 뜻으로 이 새의 이름을 ‘신천옹’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김병태, 「하나님의 퍼즐」, 브니엘, 2014; 「생명의 삶 플러스」, 2023년 8월호, 263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의 풍랑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나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온몸에 힘을 뺀 채로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이끌려 가야 합니다.
마치 신천옹이 하늘을 나는데 필요한 힘의 99%를 바람에 맡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풍랑을 즐기고, 더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풍랑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자신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향해 “여러분이여 안심하십시오!”라고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열나흘째 먹지도 못하고 주리고 있던 배 안의 사람들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고,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라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배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바울을 통해 위로를 얻고 다 안심하고 음식을 받아먹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그 수가 모두 276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풍랑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던 바울이 어느덧 그 배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생명을 살리는 일에 귀하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풍랑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두 힘들다, 어렵다고 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약속을 신뢰해서, 인생의 풍랑을 만나 두려워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바울이 탔던 배는 멜리데 섬에 도착했고, 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죽거나 다치는 일 없이 모두 안전하게 구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측하지 못했던 인생의 강풍 앞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구원의 여망이 없는 사람들을 살리고 계십니까?
이 한 주간 여러분이 붙들어야 할 말씀은 무엇이고, 여러분이 손잡아 주고 함께 울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 있으니, 이제는 안심하십시오!”라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