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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6월 30일 오후 찬양 예배 설교)
성 경 : 사도행전 2:37-47(신약 190)
지난 주까지 2주간에 걸쳐서 베드로 사도께서 하신 첫번째 설교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령이 임하신 것에 대해서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교했고, 하나님께서 죽으신 예수님을 살려주셨고 그로 인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고 설교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다윗의 시를 인용해서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오른편에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기에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은 기쁘고 즐겁고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설교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의 삶은 기쁘고 즐겁고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즘 인스타그램과 연결된 쓰레드를 가끔씩 보는데 쓰레드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의 글이 가장 많이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인스타에 친구를 맺은 분들이 기독교인들이라 쓰레드도 기독교인들의 글을 많이 보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쓰레드에 많이 올라오는데 그냥 자기 생각을 가감 없이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지금까지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내용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 중에는 상당히 충격적인 표현들이 꽤 많이 나옵니다.
글을 읽고 충격을 받은 내용 중에는 교회에서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성도들을 가스라이팅한다는 내용들입니다. 교회에 가면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구절과 같은 구절들을 가지고 가스라이팅을 합니다. 라는 글을 올린 사람이 있었는데 사는게 힘들고 어려운데 힘들다고 말도 하지 말라고 하고, 죽을 만큼 힘든데 감사하라고 하는 것은 가스라이팅이다. 그런 글이었습니다.
교회는 왜 힘들다. 어렵다. 고통스럽다. 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그런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고 말하느냐 그건 가스라이팅이다. 그런 내용입니다. 그와 비슷한 내용들이 꽤 많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그런 내용을 볼 때 심각하게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것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힘들다고 말하고,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실 힘들기 때문에 교회 와서 기도하는 것 아닌가요? 고통스럽기 때문에 찬송하면서 이겨보려고 하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데 감사합니다. 하면서 나는 기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실까요?
하나님은 교회 와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죽을 만큼 힘들 때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싫어하실까요? 하나님은 다 들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뭐라고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 하든지 다 들어주십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다른 성도들에 대해서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힘들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주고 이해해 주고, 위해서 기도해 주고, 힘들어 하고 아파하는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면서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지 말고 보듬어 안아 주고 기도해 주고 같이 아파하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계획은 오늘 교회가 처음으로 세워진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말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과 관련된 내용이 많아져서 오늘은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 다음 주에 첫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하는데 성령을 선물로 받기 위해
1. 우리가 어찌할꼬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이야기 할 때 성령을 받는다는 표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요엘의 예언으로 설명하고, 너희가 법 없는 자의 손을 빌려서 죽게 한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37절을 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찔려’(카테뉘게산) 라는 동사는 ‘때리다’ 혹은 ‘격하게 찔러 관통하다’, ’실신시키다’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염려와 양심의 가책이 엉켜진 매우 심각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이성적인 죄책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무리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나서 자신들에게 있어 유일한 소망이며 오랫동안 고대하던 그 메시아를 스스로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것을 깨닫자 몸서리치도록 놀라며 ‘마음에 찔린’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에 찔림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에 찔림을 받지 않는 상태를 양심에 화인 맞은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37절을 다시 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 사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큰 권능과 기사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는데 너희가 법없는 즉 율법을 따르지 않는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들었고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설교하자 그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우리가 어찌할꼬? 하면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전까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자신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서 온 디아스포라들도 있지만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과 칠칠절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개종한 이방인들도 있지만 유대교 신앙으로 하나 된 사람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자신들이 죽게 했다는 것을 깨닫고 죄책감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죽게 만든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될까요? 라는 의미로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생각을 못했고,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이 죄라는 생각을 못했지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자신들이 죽였고, 자신들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2. 회개하라
베드로는 그들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선포했습니다. 38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베드로 사도는 가장 먼저 회개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자신들이 잘못한 것을 깨달았으면 그 죄에 대해서 회개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회개란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다.’는 마음의 완전한 변화와 죄의 고백을 뜻하며 완전한 돌아섬을 의미합니다.
회개에서 가장 선행되는 것은 마음의 완전한 변화입니다. 마음의 변화란 지금까지의 마음에서 변화되어 새로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신분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신앙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변화된다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고 생각의 변화와 삶의 변화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회개란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지금까지와 똑같은 마음과 똑같은 생각을 갖는 사람은 결코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닌다면 교회에 다니는 성도다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또한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로 죄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변화되지 않고는 자신의 죄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고 이어서 자신의 죄를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볼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다면 죄를 고백할 수도 없습니다. 누가 보아도 분명히 죄인데 자신이 그것을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죄로 볼 수 없다면 자신의 죄에 대해서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 먼저 죄를 알아야 합니다.
죄를 알았다면 그리고 깨달았다면 고백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절대로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는 시점은 죄를 안 시점이 아니라 죄를 고백한 시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의사 우리의 죄를 도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셋째로 완전한 돌아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두 번째까지는 잘 합니다. 마음의 변화도 받고 깨달아 알고 고백도 잘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범한 잘못과 죄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일은 잘 못합니다. 아니 그렇게 잘 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란 자신의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서 이전까지 걷던 길이 아닌 새로운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3.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회개하고 세례 즉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38절을 다시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말은 회개와 세례는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 침례를 준 것은 회개의 침례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서기 위해서 회개하고 회개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상징으로 침례를 준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같은 의미로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주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에 이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겠습니다. 하는 고백으로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또한 침례를 받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침례를 받으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된 것이고 예수님께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정식으로 교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되었고, 교회의 정식회원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동안 침례를 하지 못했는데 청년들이 침례를 받을 수 있도록 마음으로 준비하고 금년 여름에 침례식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선포했습니다. 38절을 다시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사해주심으로 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천주교에서 고해 성사를 하면 신부님이 보속과 사죄경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고 합니다.
보속이란 말에 대해서 천주교에서 설명한 내용을 보면 ‘넓은 의미로 끼친 손해의 배상 및 보환을 뜻하나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죄로 인하여 하느님의 벌을 받음을 의미한다. (중략) 가톨릭 윤리신학상의 보속은 고백성사의 본질적 요건의 하나로서 이미 지은 죄를 징계하는 벌이요, 영혼의 허약함을 치료하여 다시 범죄하지 않도록 하는 약이다. (중략) 그러나 그 죄의 벌까지도 다 사하여지는 것이 아니고 지옥벌만 사하여질 뿐 잠벌은 남아 있게 된다. 잠벌이란 영원한 벌에 대하여 일시적인 벌, 혹은 연옥벌이란 뜻이며 이는 우리 자신이 기워 갚아야 하는 것이므로 자연히 보속이라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중략) 바울로는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4)라고 하였다.(생략)
사죄경이란 설명을 보면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려고 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교회를 통하여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이렇게 신부가 선포하는 것을 사죄경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천주교는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지만 신부가 고해성사를 한 신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사해주신다고 대신 사죄경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이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심을 믿습니다.
4.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이렇게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진 성도가 사모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은 약간 애매하게 번역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개역성경이나 다른 모든 성경들은 한결같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되어 있는데 개역개정만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성경이 의미하는 것은 성령을 우리가 선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성령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세례를 받기 전에 성령을 받은 예가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확실한 신앙고백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8절을 다시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데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선물로 준다는 것은 은혜라는 단어와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즉 우리가 한 것이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선물로’란 표현을 직역하면 ‘성령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 개역 개정은 직역을 해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또는 성령의 선물이란 원어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 자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이 곧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며 그 유익을 위하여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는 특별한 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선물로 은혜로 받았고, 또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게 됩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주님의 나라와 교회와 선교와 삶을 위해서 귀하게 쓰임 받는 능력의 사람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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