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3> 1495.2.22. 프랑스 황제 샤를 8세의 군대가 이탈리아 나폴리를 함락시킨 모습. 5만 명에 이르는 대군의 깃발에는 라틴어로 ‘Voluntas Dei; missus a Deo’ “신의 의지; 신이 보낸”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군대는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에서 모여든 용병으로 이루어졌고, 800명의 매춘부가 딸려 있었다. 나폴리가 함락되고 나자 이들은 방탕한 생활에 몰두했고 용병과 매춘부가 온 유럽으로 퍼져 나가자 매독 또한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사진 출처 : World History Archive / Alamy 그림 제목 : “Entry of Charles VIII into Naples” by Eloi Firmin Feron, 19th century. 내용 출처 : http://egloos.zum.com/kk1234ang/v/2883227, 아노 카렌, 『전염병의 문화사』,사 이언스북스, 2001)
불과 몇 개월 후 매독은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독일에서 급속히 번져 나갔고 5년 후에는 덴마크, 스웨덴, 영국, 그리스, 폴란드, 러시아까지 전파되었다.
성 매개 질병이라 불리는 매독은 전신에 고름 덩어리를 만들었으며 심한 경우 궤양이 뼈를 파고 들어가 코와 입술 등이 녹아 내렸다. 성행위를 매개로 전염된다는 사실과 고통스럽고 혐오스러운 증상 때문에 사람들은 매독을 죄악의 징표라 생각했다.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병”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병”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병” 러시아에서는 “폴란드병” 터키에서는 “가톨릭병”이라 부르며 서로 상대방에게서 옮았다고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했다.(아노 카렌, 『전염병의 문화사』,사 이언스북스, 2001,190p)
그렇다면 매독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매독의 기원을 둘러싸고 유럽 사람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에게서 옮아 왔다고 생각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부터 스페인 사람들은 원주민을 성 노예로 삼았고 이후에도 탐험가들이 원주민 여성을 강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충분히 개연성 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1492년 이전에 매독에 감염된 유골이 영국에서 발견되면서 매독이 유럽에도 존재했으며 다른 감염병과 혼돈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자료4
여러 주장에서 공통적인 것은 15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매독이 ‘악성 매독’이라 불릴 만큼 독성이 강했으며 빠른 시간에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인도와 아프리카에도 매독과 비슷한 전염병이 존재했지만 유럽만큼 강력하지 않았고 급속도로 전파되지도 않았다. 유럽이 매독의 1번 확진자는 아니라도 슈퍼 전파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는 매독으로 코가 녹아내린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매독 환자들은 코의 피부가 점점 괴사하면서 코 밑의 연골이나 뼈 조직까지 약해져 코가 내려앉게 되었고 심하면 코뼈가 얼굴에 파고들어 살이 썩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환자들을 위해 이탈리아 볼로냐대학교 외과 교수였던 가스파레 탈리아코치는 코 재건술을 시도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은 그의 재건술을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 인간의 외모를 고치는 것은 창조자 즉 가톨릭의 하느님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가톨릭 성직자들은 매독에 걸려도 코 재건 수술을 받지 않았다.
당시 성직자들은 첩을 거느리고 살았기 때문에 매독이 창궐하는 환경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성직자들은 교황에게 축첩세만 내면 아무 불편 없이 첩을 데리고 살 수 있었고, 신도들 앞에서는 독신 생활을 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연기할 수 있었지만 매독에 걸려 코가 녹아 버리자 더 이상 거룩한 연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매독으로 코가 찌그러진 추기경을 조롱하는 풍자시가 유행해서 민중들은 “그 코는 현자(賢者)의 코. 다음에는 그 코가 교황에게 내려지겠지.”(Eduard Fuchs, 「Illustrierte Sittengeschichte vom Mittelalter bis zur Gegenwart」)하고 노래했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교황 율리우스 2세와 알렉산드르 6세도 모두 매독에 걸린 것으로 유명했다. 율리우스 2세를 보좌했던 의전관 그라시스의 보고에 따르면, 예수의 수난일이 되었을 때 교황은 매독에 걸려 발이 엉망인 상태였다. 예수의 수난일에는 관례로 신도들이 교황의 발에 입을 맞췄는데 그때 교황은 누구에게도 발 키스를 허락하지 않았다.<자료5> 교황 알렉산드르 6세는 자신의 친딸인 루크레치아를 첩으로 삼은 것으로 유명했는데, 알렉산드르 6세가 매독에 걸리자 불과 2개월 만에 가족과 첩들까지 17명에게 매독이 전염되었다.
16세기 매독이 퍼지던 무렵 독일의 민중들은 “교황 성하”를 “음란 성하”라 부르고, “추기경”을 “수캐”라 불렀는데 이 비유는 가톨릭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 시대를 연구한 독일의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는 <풍속의 역사>에서 이렇게 적었다.<자료6>
“당시 유럽에서 교황과 가톨릭 교회는 모든 가톨릭 신도 위에 군림한 최고 권력자였고, 이 때문에 가톨릭 교회의 타락은 파괴적인 독기를 내뿜었다. 성직자들의 퇴폐적 음란 풍조는 유럽 시민들의 풍기 문란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전염병은 적절한 숙주를 만났을 때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다. 숙주는 생물학적인 조건이지만 그 조건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적 정신적인 요소도 맞아야 한다. 육체적 탐욕을 좇았던 가톨릭의 풍토와 정신은 악성 매독균이 급속도로 퍼질 수 있는 이상적인 숙주였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가 팬데믹 공포에 빠져 있는 지금, 어떤 정신적 요소가 숙주를 만들고 있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https://theweekly.co.kr/?p=65707
#가톨릭 #교황 #수은 중독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잘 봤습니다~
잘보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