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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皆知有用之用 而莫知無用之用也.
(인개지유용지용, 이막지무용지용야)
사람들은 누구나 다 쓸모있는 것의 쓰임새를 알고 있지만, 쓸모없는 것의 쓰임새를 아는 사람은 없다.
-『장자』 인간세편
쓸모없음의 쓸모있음- 무용의 용(無用之用)
사람이 땅 위를 걸을 때 필요한 것은 발바닥이 닿는 면적이다. 그러나 발이 닿는 부분만 재어 놓고 그 둘레를 다 파 내려가 절벽을 만들어 버린다면 그 발 닿는 곳 마저 쓸모가 없어진다. 그러니 쓸모가 없어 보였던 그 변두리 땅들이 다 쓸모있는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이다. 이 이야기는 장자가 '무용의 용(無用之用)을 설명하기 위해 들었던 사례다.
'피터의 법칙'으로 유명한 L. J 피터는 '능력의 종착역 증후군'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직장인에게 승진은 기쁨이고 꿈이다.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인정받아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다면 그것 보다 좋은 일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의 최고 단계를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무능해 지고 실수하게 되고 오판하게 되고 무너지게 된다.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급기야 건강을 상하게 되고 불명예를 안고 물러서게 된다. 이것은 '유용의 용'(有用之用) 에 치중한 결과다. 오직 쓸모 있음의 길로 자신을 내몬 결과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살아남아 오래 번영하는 자 (適者)의 처세법이 아니다.
직업인이 피터의 법칙이라는 증후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장자의 ‘무용의 용’의 묘리를 터득하는 데 있다. 그 우선적 원칙이 바로 휴식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휴식는 재충전이 아니다. 재충전이라는 단어는 휴식를 일에 종속시키는 구차한 변명처럼 보인다. 즉 일을 잘하기 위해 심신을 쉬게 한다는 뜻이며, 따라서 놀이와 휴식으로서의 휴가는 일을 위한 종속적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가정한다. 그렇지 않다. 인간은 놀 줄 아는 동물이다. 호이징하는 ‘호모 루덴스’라는 말로 인류의 특징을 집어냈고, 문화는 놀이 정신이 만들어낸 가치임을 지적한다. 취미로 일하는 사람들, 취미가 곧 일인 사람들이 행복한 것은 일과 놀이가 일상 속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는 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좋은 직업인들은 놀이 자체가 일에 뒤지지 않는 또 하나의 삶의 형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직장인의 단어가 바로 휴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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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밟지 않은 땅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말은 쓸모가 없습니다.”
장자가 말했습니다.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를 말할 수 있
습니다. 땅이란 넓고도 크지요. 하지만 사람들
이 걸을 때 쓸모 있는 땅은 발이 닿는 부분일 것
입니다. 그렇다고 발이 닿는 곳만 남겨놓고 나
머지 쓸모없는 땅을 황천에 이르도록 깎아낸다
면 그래도 그곳을 밟을 수 있을까요?”
혜자가 대답했습니다.
“밟을 수 없겠지요”
장자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쓸모없는 땅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
분명히 아시겠지요.”
- <외물>7
혜시가 대변하는 가치는 '쓸모 있음’이다. 사용가
치가 있는 것, 유용한 것이 중요하다. 일종의 효
용론이다. 박씨를 심었는데 너무나 커다란 박이
열려 바가지로 만들 수 없다면 그 커다란 박은 쓸
모없는 것이다.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줄기와 가
지가 뒤틀어져 목재로 쓸 수 없다면 그 나무는 쓸
모없는 것이다. 그때마다 장자는 혜시의 견해에
딴지를 건다. 박이 커서 바가지를 만들 수 없다면
배를 만들어 타고 놀면 되지 않느냐고, 나무가 뒤
틀려서 목재로 쓸 수 없다면 그 큰 나무의 그늘에
누워서 편히 쉬면 되지 않겠느냐고.
장자는 혜시의 편협한 효용론을 비판하면서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단지 그
것을 쓸모없다고 보는 편견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재목으로 쓸모 있어서 제명대
로 살지 못하고 베어지는 나무를 안타까워한다.
쓸모 있어 오히려 목숨을 잃게 되었다고, 쓸모없
었다면 천수를 누렸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장자
는 쓸모의 위험성을 경계한다.
이 세상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
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고도 편협한 발상이다. 그
때 우리는 물어야 한다. 당신이 말하는 쓸모는 도
대체 누구를 위한 쓸모냐고? 무엇을 위한 쓸모냐
고?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인정하지 못하고 도구
로 바라보는 시선은, 유용(有用)한 것만 남겨놓
고 무용(無用)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없애려고
한다. 그런 행위는 장자의 비유처럼, 자신이 밟은
땅만 남겨놓고 나머지 땅은 천 길 낭떠러지로 만
드는 것이다. 그 결과는? 자신조차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절체절명의 사태를 맞이하게 된
다. 그때가 돼서야 뒤늦게 자신이 무용하다고 생
각한 것이 유용한 것의 근거이며, 존재의 안받침
임을 깨달아도 소용없다.
현대사회는 스펙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사용설명서’를 자세히 기록해놓고 쓰이기를 바
란다. 그렇게 해서 어렵사리 구한 직장에서도 다
시 자신의 유용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밤낮을 가
리지 않고 일해야 한다. 철학자 한병철은 이러한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명명하였다. 자신이 자신시 자신의 유용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밤낮을 가
리지 않고 일해야 한다. 철학자 한병철은 이러한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명명하였다. 자신이 자신
을 스스로 착취하는 시대, 피로는 간 때문이 아니
라 바로 자신 때문이다. 자신의 쓸모가 자신을 피
로로,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장자는 말한다. 쓸모만을 추구하는 그대여, 쓸모
없음을 없애고 쓸모만을 추구하는 세상은 평안할
것인가? 모든 존재를 그대로 놔두라. 오히려 쓸모
의 위험성을 늘 상기하라. 그대가 밟고 간 땅은
점점 불모로 변해가고 있다. 그렇지만 그대가 밟
지 않은 땅을 보라. 새가 날고,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다람쥐가 뛰논다. 존재를 따로 증명할 필
요는 없다. 쓸모가 그대를 죽이고, 오히려 쓸모없
음이 그대를 살릴 것이다. 그러니 때로는 쓸모없
어지길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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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은 진흙으로 만들지만, 쓰이는 것은
그릇 속에 담긴 비움이다."
- 도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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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은 속이 비어 있어 그 쓰임새가 명확하지 않
다. 용도가 달리 정해진 것도 아니다. 물을 담으
면 물그릇, 밥을 담으면 밥그릇, 반찬을 담으면
반찬그릇이다. 그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다목적'이다. 노자는 이를 두고 쓸
모없는 것의 쓸모(無用之用)를 말했다. “무용취
시유용無用就是有用, 대무용취시대유작위大無
用就是大有作爲” 즉 쓸모 없는 것이 곧 쓸모
있는 것이 되고, 쓸모가 없을수록 더 큰 용도로
쓰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우화가 장자(莊子) '외물
편(外物篇)’에 나온다.
"석(石)이라는 목수가 제(齊)나라로 가는 길
에 상수리나무를 보게 되었다. 그 크기는 수
천 마리의 소를 가릴 정도이고, 굵기는 백 아
름, 높이는 산을 내려다 볼 정도였다. 가지
하나만 있어도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지만 석은 거들
떠보지도 않은 채 지나쳐 버렸다.
석의 제자가 그 나무를 지켜보다가 스승에
게 훌륭한 목재를 그냥 지나쳐 버린 이유를
묻자, 석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그건 쓸모 없는 나무이다. 배를 만들면 가
라앉고, 널을 짜면 곧 썩게 되고, 물건을 만
들면 곧 망가지고, 기둥을 만들면 좀이 슬게
된다. 이렇게 쓸모가 없었기에 그만큼 크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상수리 나무가 자신을 보전하고, 사방의 생명을
품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
가 특정한 쓰임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자는 무
용의 유용함을 설파함으로써 '만물이 유용하
다'는 뜻을 전한다.
그런데 과연 '유용하다'는 건 어떤 것일까?
산업화 시대는 인간에게 명확한 기능을 부여하고
교육하여,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발휘하도록 육
성해왔다. 의사면 의사, 판사면 판사, 엔지니어면
엔지니어 등 명확한 기능- 쓸모를 가진 인간은 유
용한 인간 곧 '인재'라 불렸고, 그만큼 대우를 받
았다. '유용한 사람이 되라'는 대명제 하에 우리
는 끊임없이 능력을 평가받고 비교당한다. 나는
무엇을 잘하고, 너는 무엇을 잘하는 인간인가? 각
자 자신의 '명확한 쓸모'를 찾아 광야를 헤매었
다.
나는 어떤 기능을 가졌는가? 나의 기능은 명확
한가? 이게 개인의 유용함을 가르는 지점이었
다.
각자가 가진 재능과 능력을 명확히 파악해야 행
복하게 일할 수 있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는 도그마가 널리 전파되어 있다. 우리는 스스로
에게 특별한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 그 기능을
담아내기 위해 죽도록 노력한다. 우리는 채우고,
채우고 끝없이 채워간다. 유용한 물건이 되기 위
해, 쓸모있는 인재가 되기 위해!
하지만 정말 쓸모 있는 것들은 어떤 것인가?
정말로 쓸모가 있는 것들은 특정 기능을 가진
것보다, 비어있는 것들이다. 비어있기 때문에
밥을 담을 수 있고, 비어있기 때문에 방에 기거
할 수 있으며, 비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상황에
따라 쓸모를 채워넣을 수가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휴대폰은 비어있다. 우리는 그곳에 각자의 필요
에 따라 앱을 설치하고,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노
트를 기록하고 자신에게 맞게끔 핸드폰을 활용한
다. 폰은 '소통'을 위해 비어있는 도구의 다름이
아니다. 대나무도 속이 텅 비어 있다. 그 비어있
는 공간이 소리를 만들기 때문에 대나무는 오래
전부터 악기로 많이 쓰여왔다. 숫자 0도 마찬가
지다.
숫자의 발견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
로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숫자 '0'은 무용의 유용
으로 큰 가치를 평가받는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수치화되어 있는데, 숫자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0은 반드시 필요하다. 평생 0이라는 숫자에
사로잡혔던 세계적인 수학자 아미르 D 악젤은
<'0'을 찾아서>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자신
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 0이라고 말한
다. 그에 따르면 0이란 '아무것도 아니면서 엄청
난 무언가를 대표하는 것, 무한이면서 동시에 비
어있는 것'이다.
소설가 김연수는 무용에 관해 이런 글을 썼다.
"시를 읽는 즐거움은 오로지 무용하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하루 중 얼마간을 그런 시간으로 할애
하면 내 인생은 약간 고귀해진다. 시를 읽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용한 사람이 된다. 시를
읽는 일의 쓸모를 찾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아무런 목적없이 날마다 시를 찾아서 읽으며 날
마다 우리는 무용한 사람이 될 것이다. 아무런 이
유가 없는 데도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순수
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세상 만물에는 저마다의 쓰임이 있다. 그것이 바
로 존재의 이유다. 유학에서도 "천명지위성天命
之謂性"이라 하여 모든 것은 나면서부터 천명을
받는다는 걸 전제로 한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
은 쓸모가 있다. 따라서 쓸모없다는 말은, 쓰임새
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더이상 그 쓸모를 찾지 못
했다는 말일 뿐이다.
남들 눈에는 쓰레기여도 어떤 이들의 눈에는 보
물이 되는 경우가 있다. 터치포굿이란 사회적기
업에서는 버려지는 폐현수막을 모아 가방을 만든
다. 노리단 이란 또 다른 사회적기업은 고철로 악
기를 만들어 연주한다. 이들은 남들이 미처 찾아
내지 못한 '쓰임새'를 찾아내었다.
비어있는 것들은, 인간의 창조력을 엄청나게 자극한다.
그 쓸모를, 새롭게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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