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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4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 묵시 14,14-19
복 음 : 루카 21,5-11
그때에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삶의 아마추어’가 아닌 ‘삶의 프로’가 됩시다.
-한결같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삶의 프로, 삶의 성인’-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만추晩秋의 수도원 아름다운 하늘길 축복 선물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사랑하는 자매님(형제님)!”
어제 여러분들에게 보냈던 메시지와 더불어 황홀한 아름다움의 만추의 하늘길 사진입니다.
보이는 세상이 이렇듯 아름답다면 보이지 않는 우리 궁극의 미래인
하느님 나라는 얼마나 아름답겠는지요!
오늘도 피정중이지만 시간을 내어 못 보낸 분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할 작정입니다.
‘곱게 늙기’는 피정 주제인데 참으로 곱게 늙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만추의 아름다운 수도원 하늘길 풍경입니다.
빛과 단풍의 절묘한 조화가 빚은 하느님의 살아 있는 작품처럼,
우리 인생도 은총의 빛과 순리대로의 한결같은 삶이 조화를 이룰 때
‘곱게 살고 곱게 늙다가 곱게 죽기’의 아름답고 고운 삶과 죽음의 인생이 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삶의 아마추어가 아닌 삶의 프로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베트남의 순교자들,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를 포함한 117명 동료 순교성인들의 기념일입니다.
순교성인 현황은 베트남인 96명(사제37, 평신도 59),
외국인 21명(스페인 도미니코 수도회 출신 주교6, 사제5, 프랑스 외방 선교회 주교2, 사제8)입니다.
참으로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의 박해 역사와 흡사한 역사를 가진 베트남입니다.
17세기에서 19세기 까지 3세기에 걸쳐 1만여 명이 순교자들을 배출한 베트남 가톨릭 교회입니다.
참으로 잔인하고 잔혹한 갖가지 고문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죽음을 맞이했는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민주화 역사의 빛나는 성취로
이런 일체의 고문이 없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격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어느 순교한 베트남 신학생이 쓴 감동적인 편지 중 끝부분만 인용합니다.
“만일 우리가 현세에서 다시 못 본다 해도,
내세에서 우리가 흠 없는 어린양의 옥좌 앞에 서 있을 때
이것은 우리의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승리의 기쁨에 환호하며 그분께 한 목소리로 찬미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 엄혹한 순교 상황에서도 승리의 기쁨을 앞당겨 살며
곱고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한 젊은 순교 신학생입니다.
오늘 복음이나 제1독서의 묵시록은 종말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모두가 의도하는 바는 결코 우리에게 공포의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하루하루 종말론적 삶을 살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언젠가의 심판이 아니라 오늘이 바로 심판의 날이자 구원의 날인 것처럼 생각하여,
하루하루 한 결 같이 깨어 곱게 살다가 곱게 늙어 곱게 죽자는 것입니다.
오늘의 현재는 내일의 미래입니다.
오늘 최선을 다해 깨어 곱게 살면 내일의 미래는 전혀 걱정 안해도 됩니다.
내일은 내일이 잘 해결해 줄 것이니 바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의 때가 왔습니다.”
언젠가의 죽음으로 인생 수확의 때가 이르기 전 우리가 할 일은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하루하루 내적성장과 성숙의 여정에 충실하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일체의 유혹에 휘말리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무서워하지 말고 제 삶의 자리에서 충실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결코 부화뇌동, 경거망동 하지 말고 제 삶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이들은 하루하루가 종말이요 그 종말은 어둠이 아니라
희망의 빛, 구원의 빛으로 활짝 열린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짙은 구름속에서 배어 나오는 태양빛이요, 밤의 어둠이 깊어갈수록 가까워지는
일출의 빛나는 태양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구원을 상징하는 태양입니다.
이런 태양 같은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 때
일희일비함이 없이 깨어 한 결 같이 곱게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삽화가의 잔잔한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은 노력으로 자기 경지에 이른 분입니다.
정말 아름답고 한결같은 삶의 프로입니다. 저절로 ‘프로는 아름답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하지만 남들의 속도에 더는 흔들리지 않아요.
자기 증명에 대한 강박에서도 놓여나고요.
얼핏 무의미해 보이는 노력의 시간이 가져다 준 결과예요.
스스로 설득이 되는 지점까지 노력해본 자가 가질 수 있는 고요이지요.
자기를 끝까지 소진하면 오히려 결과에 겸허해져요.
더 할 수 있는 노력이 없을 때까지 해보면 남들이 뭐라든 스스로 인정할 수 있어요.
저의 눈에 반짝이는 작가들이 보여요. 자유롭고 거침없이 그리는 작가들이요.
배가 아프죠. 샘도 나요. 그런데 그게 전부예요. 며칠 질투하다 제자리로 돌아와요.
정보의 이해를 돕는 데에 최적화된 저의 그림체는 오랫동안 평범하다는 평을 들어요.
하지만 그것이 내 것이예요. 삽화가로 부단히 애쓴 10년이 만들어준 소중한 내 것이죠.
빛나는 재능을 가진 이들처럼 일필휘지로 그리지 못하지만, 제 책이 자랑스러워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고. 이것이 내가 만들 수 있는 최상의 것임을 알기 때문이에요.
온 힘을 다해 뛰어도 우리는 여전히 자기 자신밖에 되지 못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 볼 필요가 있어요.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윤곽을 확인하기 위해서요.
‘여기까지가 한계이고, 너는 최선을 다했어’라고 자신이 설득되는 지점을 찾기 위해.
경계에 울타리를 세우면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마음이 있고, 보이는 소중함이 있어요.“
(한겨레; 11월21일 ‘돌파하는 힘-유설화 삽화가)
이렇게 긴 개인의 인터뷰 기사를 인용하기는 처음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프로의 삶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 제 크기, 제 모습, 제 색깔, 제 향기로 참 나를 살 때
비로소 주님을 닮아 삶의 프로요 삶의 성인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한결같고 아름다운 삶의 프로, 삶의 성인이 되어
곱게 살다 곱게 늙다가 곱게 죽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루하루 한결같고 아름다운
삶의 프로, 삶의 성인이 되어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분이 오신다.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우리를 다스리러 오신다. 그분은 우리를 의롭게, 진리로 다스리신다.”(시편96,13).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부님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올해 처음으로 본당 신부를 나간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본당 신부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저의 의도를 알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저도 사랑만 받는 신부가 되고 싶은데, 그렇게 인기만을 추구해서는
사제 양심상 도저히 그럴 수 없네요. 너무 힘들어요.”
그러자 어느 선배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환영받는 사람은 딱 한 부류밖에 없어. 바로 사기꾼이야.
사기꾼은 자신의 사기 의도가 노출되지 않게 하도록 모든 이에게 환영을 받도록 만들거든.
그래야 사기를 치지. 너 사기꾼이 되고 싶어? 아니지? 그러면 딱 30%의 지지만을 목표로 살아.
그 정도로도 잘 사는 거야.”
어느 책에선가,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은 30%, 싫어하는 사람도 30%,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이 40%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100%의 지지는 예수님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100%의 지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요구를 채우지 못해서 아프고 힘들다고 말합니다. 100%의 지지는 사기꾼만 가능한데도 말이지요.
오늘 복음의 장면은 성전에서의 마지막 설교에 관한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성전을 보며 감탄의 이야기를 하자,
주님은 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와 함께 세상의 멸망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처음부터 세상 종말에 관해 이야기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생활 중에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셨고,
그 표징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과 같이 강력한 말씀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라면서 자신의 변화보다
놀라운 표징을 보고 싶은 욕심만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아마 30%의 지지도 없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몇몇 사람만이 예수님 곁에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모든 이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사기꾼과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지했던 종교지도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에게 유익한 생각만을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하느님 말씀보다 인간이 쓴 글을 강조하면서 거의 모든 이의 지지를 끌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거짓 예언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사기꾼이 아닌 참 그리스도를 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더는 사기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비난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에서 하신 긴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 성전파괴에 대한 예언과 세상종말이 오기 전의 표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전은 주님의 현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한 것이라 하더라도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면 그 존재의미를 잃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성전 파괴에 대해서는 이미 예언자 미카,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에 의해서 진술된 바 있었고,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기원전 515년에 즈루빠벨의 치하에서 재건된 제 2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헤로데 왕에 의해 기원전 19년부터 확장되고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지면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그 때와 표징을 묻는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루카 21,8)
이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비 메시아는 누구일까요?
대체, 우리는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 속고 있을까?
그것은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사이비 구세주로 따르고,
속아 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소.” 하고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결국에는 우상을 따르고 섬기도록 부추기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입으로는 주님을 구원자라 고백하지만,
정작 무엇에 목매달고 쫓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 재물뿐만이 아니라, 세속정신을 따르고 섬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현대사회의 가장 큰 병폐로 지적하신
신자유주의 정신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또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고약한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녀석입니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곧잘 자신을 속이고, 자신에게 속기도 합니다.
자신의 욕망과 생각, 자신의 견해와 뜻을 섬기고 추종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피시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1티모 4,16)
분명, 우리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뜻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8)
주님!
속이지도 속지도 말게 하소서.
재물에 속지 않고, 세속에 속지 않게 하소서
제 견해와 편견, 제 생각과 허영에 속지 말게 하소서.
제 자신과 제 뜻에 속지 않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14년에 ‘왕가네 사람들’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습니다. 건전한 가족드라마였습니다.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데 극중 할머니가 가족들에게 하던 대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6.25를 겪은 사람은 5백만 명이 안 될 정도입니다.
90%이상의 국민은 6.25 이후에 태어났습니다. 저도 6.25가 끝나고 10년 뒤에 태어났습니다.
할머니께서는 6.25의 참상을 다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족들이 함께 지내면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를 6.25 때의 난리와 비교합니다.
과장된 면이 있지만 할머니는 요즘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2020년 코로나를 겪으면서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박해 중에도 있었던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교회의 가장 거룩한 전례인 사순과 부활을 교우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있는 미국도 가장 많은 확진자가 발생하였고, 한국에서 안부를 묻는 전화를 받아야 했습니다.
유럽은 확진자가 증가하면서 제2의 코로나가 시작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생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스크 착용이 일상이 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닌 코로나19가 사라질 수 있도록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면 좋겠습니다.
지구의 역사는 40억년이 넘는다고 합니다.
생명의 역사는 30억년이 넘는다고 합니다.
30억년 생명의 역사에서 5번의 ‘멸종’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성의 충돌, 지진과 화산 폭발이 멸종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빙하기와 같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명이 멸종되었습니다.
90% 이상의 생명이 멸종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 생명의 멸종은 다른 생명에게는 기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공룡이 멸종되면서 지구는 포유류의 세상이 되었고,
포유류의 한 종인 인간이 출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매년 5만종 이상의 생명이 멸종되고 있다고 합니다.
멸종의 원인이 인간인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코로나19는 인간과 다른 생명이 서로 공존하라는 자연의 경고라고도 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이른 새벽을 볼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그것은 매일 부활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빛이 밝아오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른 아침에 1시간을 기도하는 것은 하루를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이 아무런 조건 없이 아침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을 봅니다.
기꺼이 비울 수만 있다면, 나눌 수 만 있다면 하루의 끝이 아쉬울 것 없습니다.
삶의 끝도 걱정될 것이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가는 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걱정 때문에 지금 기쁜 마음을 날려 버리지 마십시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별로 없으니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다만 오늘을 충실하게 살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미 지나간 과거로 기억 될 것입니다. 오늘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남게 될 것입니다.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 6)
한상우 바오로 신부
허물어지고
바스러지는 낙엽이다.
허물어지기에 사람이다.
허물어지기에
겸손을 배운다.
허물어지는 우리자신을
주님께서 껴안아 주신다.
허물어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우리들 삶이다.
허물어지는 여정도
기꺼이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허물어진 우리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이시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자비이다.
새로워져야 할 우리들 삶이다.
부질없이 허물어지는 것들 안에서
영원한 것을 다시 갈망한다.
우리에게는 어김없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 계신다.
인간의 욕심은
이와 같이 허물어지지만
주님의 사랑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허물어지는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가 가득하길
기도드린다.
세상에서 깃들이던
육신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될 것임을
진심으로 나는 믿는다.
칼이 무뎌지면 적이 활개를 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도 역시 종말에 관한 말씀이십니다.
몇몇 사람이 성전의 화려함에 대해 말합니다.
이는 내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외적인 화려함에 사람들이 집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성전이 멸망하는 과정이 세상의 멸망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표징은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큰 자연의 재앙이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재앙을 넘어 하늘의 무서운 일들과 표징들이 일어나면 그때가 마지막입니다.
온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성전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외적으로는 화려하겠지만 하느님을 버리게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과정에서 무엇이 먼저 일어나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스도는 ‘진리’이십니다.
이 말은 세상과 교회 안에서 먼저 진리가 흐려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명확한 진리를 알려주고 있지 못하면 교회는 물론이요,
세상도 거짓 그리스도들에게 속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진리가 흐려져 무엇이 진리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
그때 전쟁도 잦아지고 자연재해도 잦아질 것입니다.
1992년 9월 11일 추석, 경상남도 마산에서 조상님 산소에 갔다가 내려오던 한 사람이
고압선 철탑에 무언가 매달려있는 것을 봅니다.
30대 젊은 여성이 목을 매어 자살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쓴 유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0월 28일을 앞두고 세상 살기가 싫어졌어요.”
인천의 한 산부인과에서 또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산부인과 의사가 30대 임산부를 설득 중이었습니다.
낙태 수술을 하겠다는 여인을 말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10월 28일에는 아이가 있으면 안 돼요. 무거워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거든요.”
이번엔 군포에서 엄마, 아빠와 삼 남매가 한 꺼 번이 사라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10월 28일이 되면 이런 것들은 아무 필요가 없어져요”라고 하며
집안의 모든 가재도구를 친척들에게 나누어주고 어디론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데에는 한 목사가 쓴 책이 주요했습니다.
성산동 ‘다미선 교회’의 ‘이장림 목사’이고 그가 쓴 책이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였습니다.
휴거 이후 7년 대환란(3차대전과 대학살)으로 50억 명이 고통 중에 죽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1999년 인류의 멸망을 말한 것에 빗대어
7년 환난이 시작되는 때는 1992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셔서 십억 명을 하늘로 들어 올릴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도들은 이 예언이 맞는다는 꿈을 꾸어 간증하였습니다.
여기저기 교회들이 이 예언에 가세하기 시작하며
약 10만 명의 개신교 신도들이 1992년 10월 28일 24시에 휴거되기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이장림 목사의 책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종말을 위한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르는가?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도 구원받을 기회를 놓친다면 그것은 당신의 책임일 것이다.”
10만 명이란 인원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정부는 이장림 목사를 잡아들였습니다.
그의 통장엔 신도들이 낸 돈 약 34억 4천만 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자발적으로 신도들이 낸 것이기에 그것으로는 기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사기 혐의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그의 집에서 채권이 발견되었는데 만기일이 1993년 5월 22일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이장림 목사는 그것은 자신은 휴거가 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기에
이 환란의 때에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활동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증거로 그에게 사기죄가 적용되어 구속되게 됩니다.
이것으로 사람들이 휴거를 믿지 않게 되었을까요? 더 많은 신도가 교회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라 믿는 이가 박해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미선 교회에서는 휴거 되는 사람들에게 출입증을 주어
그 사람들만 흰옷을 입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수많은 인파와 기자들이 다미선 교회에서 휴거가 일어나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현재 이장림 목사는 이름을 바꾸고 어디선가 또 교회를 이끌고 있다고 합니다.
[출처: ‘10만 명을 겁에 떨게 한 증발 사기극’, 꼬꼬무 6화, 유튜브 SBS NOW]
이장림 목사의 주장에 기름을 부었던 사건은 1991년 초에 일어났던 걸프전이었습니다.
최초로 TV로 생중계되는 전쟁의 참상은 많은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그런데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이장림 목사는 감옥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합니다.
악의 세력을 알아보는 것은 단순합니다.
분명 그들은 진리를 말한다고 하면서도 돈을 추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성전이 금으로 되어 있고
귀한 돌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랑했던 것과 같습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면 진리의 칼은 무뎌집니다.
그러면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고
더불어 수많은 자연재해와 전쟁, 사건·사고의 소식이 들릴 것입니다.
누군가 나의 칼이 무서워 덤비지 못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무도 자를 수 없는 무딘 칼이라면 마구 덤벼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의 환란 전에 가짜 그리스도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라고 하신 이유는
이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칼이 무뎌질 때 악의 세력들이 넘쳐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들이나 사이비들의 교리에 속아 넘어갈 것을
걱정할 정도로 교리 지식이 얇아졌을까요?
우리 교회의 진리의 칼이 무뎌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두려워 떨기 이전에 나의 칼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어떤 공격도 두렵지 않은 말씀과 교리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과 세상을 위해 지금 회개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남이 휘두르는 칼에 겁먹지 말고 내 칼이 날카로운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