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의 ‘시와 사랑의 강’
오늘 신문을 보니 일본에서는 사람과 거의 똑 같이 움직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졍 표현까지 할 수 있는 로봇이 실용화 단계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있었다. 우리나라도 뒤질세라 로봇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우리의 로봇 공학은 일본에 비해 뒤져있다면서, 우리처럼 이렇게 기피현상이 심각한 현실에서는 인문계보다는 이공계로 우수한 인재를 유도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조금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마치 인문계와 이공계가 대결판국에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지난 입시전형 면접 때 만난 한 여성이 기억났다. 영어 문제 중 하나가 기계문명의 발달과 인간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인간의 역사에서 기계 문명이 지대한 공헌을 했으나 현재에는 오히려 인간이 기계 문명에 종속되어 있다. 밖에서 10분 동안 지문을 읽은 학생들은 면접실로 들어와 교수들의 질문에 답하게끔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영문의 주제 파악이나 해석에 관한 질문에 별 어려움 없이 잘 대답했다. 그러자 옆의 선생님이 문득 어느 여학생에게 질문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왜 문학을 하려고 하지?‘ 과학과 문학이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기계도 결국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여학생이 대답했다. ‘기계를 만드는 사람도, 소설을 쓰는 사람도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공유하는 마음이 있고, 물리적 가치를 떠나 영혼적 가치를 추구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면접용‘ 답치고는 참으로 멋진 답이었다. 조금 비약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시성(詩聖)이라고 부르는 타고르의 말과 닮은 점이 있다. 타고르는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내게 있어 과학과 예술은 둘 다 인간의 생물학적 필요를 떠나 궁극적 가치를 지닌 우리의 영혼의 표현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서로 존경의 마음을 표하던 타고르와 아인슈타인은 1930년 여름 독일에서 만난다.(이 두 사람의 대화는 에이브러캠 파이스가 1994년에 펴낸 ’아인슈타이이 여기에 살았다.‘ 라는 책 9장에 기록되어 있다). 아인슈타인의 인문학적 지식과 재능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이제껏 내 길을 밝혀주고 내가 계속해서 삶을 기쁘게 대면할 수 있는 새로운 용기를 준 세 가지 이상은 친절과 아름다움과 진리였다. 라고 한 말은 특히 유명하다.
그런데 더욱 인상 깊은 것은 두 사람이 만나기 전 아인슈타인이 타고르에게 쓴 글이다.
“타고르는 우리에게 살아있는 영혼과 빛, 조화의 상징이다. 폭풍우 가운데서 날아오르는 자유로운 새요, 에어리얼 요정이 금색 하프로 타는 영원의 노래이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인간의 불행이나 투쟁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의 ‘위대한 파숫군’이다. 이제껏 인간이 성취하고 창조한 모든 것의 뿌리는 시와 사랑의 강속에 속에 있다.
‘시와 사랑의 강’
아인슈타인이 시인인지 물리학자인지 모를 정도의 문학적 표현이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아침에 눈만 뜨면 세상이 달라지고 아인슈타인에게 새로운 용기를 준 세 가지 이상, ‘친절과 아름다움과 진리’도 점차 힘을 잃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로봇같이 움직이고 시와 사랑의 강은 자꾸만 말라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