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인연이 다하던 날의 추억,
불과 백여 년 전만 해도 나그네들의 신발은 짚신이나 미투리였다. 먼 길 가기 위해서는 짚신을 주렁주렁 매달고 길을 나섰고, 숙소에서 짚신을 삼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견고하고도 실용적인 신발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신발 한 켤레를 가지고도 몇 년을 신는다.
일 년에 수많은 날들을 길에서 소요하는 나의 신발장에도 이런저런 상표를 단 신발들이 수두룩 하다. 지인들이 신발 여러 개를 바꾸어 신으면 좋다고 해서 이 신발 저 신발 신는데, 이번 답사는 오래 묵은 등산화를 신고 갔다.
2012년이던가, 모 국가기관에서 대학생들과 몽고 답사 때 받은 등산화로 겉보기는 멀쩡했고 발도 편했다. 그런데, 김제 심포항에서 망해사로 산길을 올라가는데, 같이 걷던 도반이 신발 뒤축이 이상하단다.
벗어서 보니 뒤축이 벌어져 있었다. 강력 뽄드로 붙이던지, 아니면 신발 제조업체로 보내라고 한다. 오래되었으니, 답사 후 집에 가서 폐기 처분해야겠다. 생각했는데, 바다와 강이 나뉘는 군산하구둑을 걷다가 신발이 이상해서 보니 다른쪽 신발 앞축이 완전히 벌어져 철퍼덕 철퍼덕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오래되어서 접착제가 그 기능을 잃었기 때문이란다. 그 등산화와 나하고의 인연이 다한 것이다.
“차가 익고 향이 맑은데, 손님이 문에 이르니 기쁜 일이요,
새는 울고 꽃은 지고 인적이 없으니 한가한 일이다.
천만년의 기묘한 인연은 좋은 책과 만나는 것 만한 것이 없다.”
<소창청기>에 실린 글인데, 책이나 차, 신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인연도 시절 인연이라서 어느 시점에선 다하는 것이고, 김광석의 노랫말처럼 매일 이별하며 살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2000년대 초, 우리나라 10대 강(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 한탄강 만경강, 동진강)등 을 걸을 때 신었던 랜드로바가 닳고 닳아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밤하늘의 해와 달을 보던 시절 뒤에 오랜만에 겪는 신발의 추억을 또 하나 만들었구나.
누구나 길을 나서면 신어야 하는 신발과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보행의 의미를 연암 박지원은 다음과 같은 글로 남겼다.
“내 시험 삼아서 물어 보겠네.“ ”자네는 올 때 갓을 바르게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며 허리띠를 매고 신발 끈을 묶은 뒤에 대문을 나섰네. 이 중 한 가지라도 갖추어지지 않았으면 당연히 대문을 나서려 하지 않았겠지. 또 자네는 길에 나아갈 때 반드시 궁벽 진 데를 버리고 험한 데를 피하며 여러 사람들과 함께 다니는 데를 따랐지. 대저 이와 같은 것이 이른바 ‘알기 어렵지 않다’는 것이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가시밭길을 헤치고 논 밭길을 가로 지르다가 갓이 걸리고 신발이 찢어지며 자빠지고 헐떡이며 땀을 흘린다면 자네는 이 같은 사람을 어떻다고 생각하겠는가?“
자네는 이렇게 답하겠지.“이는 필시 길을 잃은 사람입니다.”그렇다면 내 또 묻겠네. “걸어가는 것은 똑 같은데,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도 하고 갈림길을 찾기도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자네는 이렇게 답하겠지. “이는 필시 지름길을 좋아하여 속히 가고자 하는 사람이요. 필시 험한 길을 가면서 요행을 바라는 사람일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필시 남이 가리켜 준 말을 잘못 들은 사람일겁니다.”
“아닐세. 이는 길을 가다가 잘못에 빠진 것이 아니네. 대문을 나서기 전에 사심私心이 앞섰던 것이지.” 내 또 묻겠네. “길이 진실로 저와 같이 중정中正하고 저와 같이 가야 마땅하건만, 자네가 발걸음에 맡겨 편안히 걷지 않는다면 어찌 그런 줄을 스스로 알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가야 마땅할 바를 아는 것은 길에 달려 있다고 하겠는가? 아니면 발에 달려 있다고 하겠는가?“ 자네는 이렇게 답하겠지. ”진실로 아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고, 실제로 밟고 가는 것은 발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발 쓰는 법을 이제 내가 알겠네. 반드시 장차 발을 번갈아 들고 교대로 밟는 것을 ‘보步’라 하고, 발을 옮겼다가 멈추는 것을 ‘행行’이라 하지. 내 모르겠네만 밟는 곳은 확고하나 발을 드는 곳은 의지할 데가 없으며, 발을 옮길 때는 비록 전진하나 멈출 때에는 가지 못하네. 그렇다면 자네의 두 발에 장차 한번은 허망虛妄함이 있는 셈이니, 진실로 알고 실제로 밟고 간다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박지원이 원도原道에 대해 임형오任亨五에게 답한 글로 <연암집>에 실린 글이다.
수십여 년간 길을 잃기도 하고 길을 찾기도 하며 수많은 길을 걸었던 나는 그 길을 올바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길을 잃고서 다시 새로운 길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24년 9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