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의 역사, 삼전도비(三田渡碑) 탐방
승영철학사상연구원(원장 김해영)은 4월 28일 오후, 서울시 송파구 송파나루길에 위치한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찾아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두들 인지하듯 나라를 잃은 민족의 삶은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특히 약자들의 삶은 논할 수조차 없습니다. 여하튼 삼전도비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淸)나라 태종(太宗)이 인조(仁祖)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이른바 전승비(戰勝碑)입니다. 잠시 보겠습니다.
1639년(인조 17), 청나라가 침략합니다. 이른바 병자호란입니다.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비(碑)를 세웁니다. 본래는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였습니다.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이 글을 짓고, 글씨는 오준(吳竣), 비명(碑名)은 여이징(呂爾徵)이 쓴 것으로 나옵니다. 비신은 대리석, 귀부는 화강암입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5.7m, 기단을 제외한 높이는 3.95m, 너비는 1.4m, 무게는 32t입니다.
비(碑)에 적시된 내용을 보면,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쪽 면엔 한문으로 새겼고, 다른 면엔 만주문(滿洲文)과 몽골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비석 하나에 3개국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비의 모양은 머리의 이수(螭首), 받침돌의 귀부(龜趺) 조각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석조물의 특징적인 것으로 꼽힙니다.
본래 석촌호(石村湖) 주변에 세워졌으나, 이 치욕적(恥辱的)인 역사를 잊기 위해 1895년(고종 32)에 매몰시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본에 의해 다시 세워집니다. 그리고 1956년 당시 문교부에서 또 다시 국치(國恥)를 용인할 수 없다 하여 다시 땅 속에 묻습니다. 하지만 치욕의 역사도 역사로 삼아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1963년 다시 세웁니다. 그리고 2010년 고증을 거쳐 최초의 위치였던 석촌호수 언덕으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