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하는 종교가 있습니다.
1) 첫째, 카톨릭 교회는 믿음과 행위가 모두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게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기보다는 선행에 둡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 2장 26절과 같은 구절에 뿌리를 두고, 선행이 구원을 이룬다고 합니다.
2) 둘째, 이슬람교는 알라와 무함마드를 선지자로 믿는 믿고요. 역시,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꾸란은 의로운 행위를 행하는 신자들이 천국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자주 언급합니다.
예를 들어, 꾸란 2장 277절은 "믿고 의로운 행위를 행하며 기도를 확립하고 자카트를 드리는 자는 주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3) 셋째, 불교는 행위 구원론을 말합니다.
불교는 고통과 윤회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완전한 평화, 깨달음, 그리고 생사윤회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상태인 열반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고 합니다. 즉, 개인적인 깨달음을 강조하며, 명상, 윤리적 행동, 지혜에 중점을 두는데요. 개인적 수행을 통해 열반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초대 교회 유대교는 의로운 생활과 토라 및 그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을 깨달은 바울은 율법 행위를 통해, 자긍하는 자들에게 뭐라고 했나요?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는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것을 항상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주 아래에 있게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들이 율법을 따르며 의로 내세운다고 하여도 결코 행위로 의로운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18절, 성경하브루타코칭 묵상을 하겠습니다.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0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바울은 율법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선포하였습니다.
1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1절,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인간은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려고 그렇게 노력하면서 어떤 병폐가 있게 되었나요? 바로, 스스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자랑하고 자긍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철저한 율법적인 삶을 드러내면, 그 당시 사람들에게 바로 인정과 단기간에 가시적 열매를 보일 수 있었습니다. 상당히 종교적인 모습으로 믿음을 드러내고, 칭찬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어떻습니까?
단기간 가시적으로 눈에 확 보이지 않습니다. 실패한 것 같습니다.
영화 <신은 죽지 않았다>에서 한 아들이 치매에 걸린 노모와 대화를 했는데요.
어머니는 실패하고, 자신은 성공한 자라고 하자, 노모가 갑자기 말하였습니다.
“성공의 단 열매는 사탄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미끼란다...”
단 시간 만족하고, 무엇인가 허세를 부리게 하는 율법적 신앙은 사탄의 미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율법만을 고수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율법만 강조하는 자는 율법의 감옥에서 갇혀 살게 됩니다.
12절 같이 읽겠습니다.
12절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전통과 유전의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굴레 속에서 평생 살게 됩니다.
이 율법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이 율법에는 긍휼이 없습니다.
이 율법에는 속량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을 죽이고 굴레 씌우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법도 율법처럼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한 책이 출간되게 되었는데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장 칼라스’ 가족은 카톨릭으로 개종한 장남을 제외하고 다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남 마르크아투안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카톨릭이 주류였던 당시 프로테스탄트 가족들이 죽였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고소당했습니다. 고문 중에도 장칼라스를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아들들은 자신들이 죽였다고 거짓 자백을 하였습니다. 아버지 장 칼라스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는 3년 뒤 장 칼라스의 오명을 벗겨 주었습니다.
이 내용은 이탈리아의 젊은 형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는 인도적이고 합리적인 법과 형벌에 대한 강력한 촉구를 이끈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바로 <범죄와 형벌>이었습니다.
<범죄와 형벌> (On crimes and punishments, 1764)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첫째, 체사레 베카리아는 유럽에서 “법의 이름으로 통용되는 것은 무엇인가?”라며 그 것은 야만이라고 했습니다.
법은 자유로운 사람 사이의 대등한 계약이어야 마땅하지만, 당시의 법은 소수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였기에 그는 ‘법이란 무엇인가’에서 더 나아가 “법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형벌은 오직 법률을 통해서만 규정할 수도 있지만, 법관은 법규를 적용할 권한은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베카리아는 그렇다면 “형벌의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하였을 때 형벌의 일차적 목적은 범죄로 인해 손상된 사회 전체의 선과 이익을 회복하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3) 베카리아는 범죄를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형벌의 잔혹성’에 있지 않고 정확성에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고문과 사형폐지라고 하였습니다.
<범죄와 형벌>처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람이 율법의 저주 아래 법이 아래서 생명 구속의 법으로 속량하려고 하셨습니다.
13절 같이 읽겠습니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이 우리를 죄에서 속량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중독에서 자유하게 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를 자유하게 하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죄를 덜 지을 수 있지만, 우리가 더 성숙한 믿음이 장성한 분량의 성도로 자라게 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은 단지 죄를 덜 짓는 단계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14절입니다.
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율법으로는 성령님의 약속을 받지 못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약속의 자녀가 되지 못 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고, 회복을 받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회복,
지체와의 회복,
자연 만물과의 회복을 경험하게 합니다.
이런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서 난 것입니다.
18절 말씀입니다.
18절,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주님! 제가 율법적 사람을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증명하려는 종교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를 믿어 성령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 말씀 중 받은 도전 혹 은혜는 무엇인가요?
눈을 감고, 잠시 개인적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