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고대부(五羖大夫)
다섯 장의 양 가죽으로 산 대부라는 뜻으로, 중국 춘추시기에 활약한 어진 정치가 백리해(百里奚)를 가리킨다.
五 : 다섯 오(二/2)
羖 : 새끼 양 고(𦍌/4)
大 : 큰 대(大/0)
夫 : 사내 부(大/1)
출전 :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우(虞)나라 출신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백리해(百里奚)의 별호이다.
백리해(百里奚)는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으나 집이 가난하였고 평민의 신분으로 벼슬자리 하나 얻지 못했다. 백리해(百里奚)의 아내 두씨(杜氏)는 남편이 세상에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다른 나라를 찾아다니며 직접 관직을 구해 보기를 권했다.
아내의 격려로 백리해(百里奚)는 집을 나서 송(宋)나라, 제(齊)나라 등을 다녔다. 그러다 곤경에 빠져 거리에서 걸식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연히 이를 본 제나라의 현인 건숙(蹇叔)이 백리해(百里奚)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를 거두어 자기 집에 데려가서 함께 이야기를 해보니 역시 견식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지기가 되었고 건숙은 백리해(百里奚)가 관직을 구할 때마다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제나라에서 지내던 백리해(百里奚)는 오랫동안 떠나 있던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 하였다. 이에 건숙이 당시 우나라의 대부(大夫)였던 친구 궁지기(宮之奇)에게 백리해(百里奚)를 추천해 주었고 백리해(百里奚)는 우나라로 돌아와 대부가 되었다.
기원전 655년 진헌공(晉獻公)이 괵(虢)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괵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나라를 지나가야 했는데 우나라 임금이 길을 빌려주지 않았다. 이에 진헌공이 귀한 수극(垂棘)의 구슬과 굴산(屈産)의 명마를 선물하자 우나라 임금이 혹하였다.
대부 궁지기가 우나라와 괵나라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순망치한과 같은 관계이니 길을 빌려주면 안 된다며 극구 간언하였다. 백리해(百里奚)는 우임금이 간해도 소용없는 어리석은 인물임을 알고 간하지 않았다.
결국 뇌물에 넘어간 우임금은 진나라에 길을 빌려주었다. 그렇게 진나라는 우나라를 지나가서 괵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돌아오는 길에 바로 우나라도 공격하여 멸망시킨 후 그 군주와 대부들을 포로로 잡아왔다.
후에 진헌공이 진목공(秦穆公)에게 딸을 시집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백리해(百里奚)를 하인으로 딸려 보냈다. 백리해(百里奚)는 치욕을 견딜 수 없어 고향으로 도망가다가 초(楚)나라 변경 사람에게 붙잡혀 소를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백리해(百里奚)가 변경 지역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진목공이 듣게 되었다. 진목공은 그를 데려오기 위해 백리해(百里奚)를 부려 먹고 있는 초나라 사람에게 사람을 보내 이렇게 말했다. "나의 잉신(媵臣, 예물로 딸려온 신하)인 백리해(百里奚)가 거기에 있는데, 검정 암양의 가죽 다섯 장을 몸값으로 치르고자 한다(吾媵臣百里傒在焉, 請以五羖羊皮贖之)."
초나라 사람이 이를 받아들여 백리해(百里奚)를 내주었다. 이때 백리해(百里奚)의 나이는 70이 넘었을 때였다.
백리해(百里奚)가 진나라에 도착하자 진목공이 직접 나가 맞이하고는 국가의 대사에 관해 물었다. 백리해(百里奚)는 사양하며 자신은 망국의 신하로서 자문할 자격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에 진목공이 말했다. "우나라가 망한 것은 임금이 어리석었기 때문이지 그대의 잘못이 아니오."
진목공은 백리해(百里奚)와 국사를 며칠간 논의하더니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는 국정을 맡기고 오고대부(五羖大夫)라 칭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백리해(百里奚)는 또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신의 친구인 건숙만 못합니다. 벼슬을 구하러 다니다 제나라에서 곤경에 빠진 저를 구해준 것이 건숙입니다. 우나라 임금을 섬기려 할 때 말렸던 것도 건숙입니다. 결국 그의 말을 듣지 않아 어리석은 우임금 때문에 우나라가 망했지만, 저를 알아봐 주고 제가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할 때 알려준 건숙이 얼마나 현명한 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만 못합니다."
이 말을 들은 목공은 백리해(百里奚)를 등용하였을 뿐 아니라, 사람을 보내 후한 예물을 갖추어 건숙을 맞아들여 상대부(上大夫)에 임명하였다. 그렇게 백리해(百里奚)와 건숙을 비롯한 현명한 신하들의 보필을 받아 진목공은 서융(西戎)의 패주(覇主)가 되었다.
이상의 내용은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나온다. 백리해(百里奚)에 대해서는 '맹자' 만장 상(萬章上) 제9장에 '소를 먹여 진 목공에게 등용되기를 구하는 것이 더러운 일이 된다는 것을 일찍이 몰랐다면 그를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 당시에 진나라에 등용되어 목공이 더불어 도를 행할 만한 인물임을 알고 그를 도왔으니 지혜롭지 않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진나라를 도와 그 군주를 천하에 드러내어 후세에 전할 만하게 하였으니 현명하지 못하고서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의 현명함을 인정한 맹자의 평가가 나온다.
백리해(百里奚)는 군주의 패업을 도운 현신이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오랫동안 평민의 생활을 오래 했던 만큼 민생을 위한 정책을 펼쳤고 늘 검소하고 청렴한 모습을 보여 백성들에게 존경 받았다. 그가 죽은 후에 진나라의 남녀노소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전하는 오고대부라는 말은 다섯 장의 양 가죽으로 산 대부라는 뜻으로 중국 춘추시기에 활약한 어진 정치가 백리해(百里奚)를 가리킨다.
[참고] 백리해(百里奚)
춘추 시대 때 사람. 자는 정백(井伯)이고, 우(虞)나라 출신이다. 백리씨(百里氏)로도 불린다. 일설에는 성이 백(百)씨고, 이름은 해(奚)며, 자가 리(里)라고도 한다. 또는 자가 정백(井伯)이라고도 한다.
우나라의 대부(大夫)로 있다가 진헌공(晉獻公)이 우나라를 멸망시키자 포로가 진나라에 들어왔다. 진나라가 목희(穆姬)를 진(秦)나라에 시집보낼 때 배신(陪臣)으로 따라갔다가 초(楚)나라 완(宛) 땅으로 달아났다는데 초나라 사람에게 잡혔다.
진목공(秦穆公)이 소식을 듣고 오고양피(五羖羊皮, 검은 양 다섯 마리의 가죽)을 주고 사와 국정을 맡겼다. 이로 인해 오고대부(五羖大夫)로도 불린다. 이때 그의 나이 일흔이었다. 건숙(蹇叔)을 목공에게 추천하고, 유여(由餘) 등과 함께 목공의 패업 성취를 도왔다.
일설에는 우공(虞公)이 간언을 듣지 않자 진(秦)나라로 갔다고도 하며, 본래 초나라 비인(鄙人)인데 진목공이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자신을 진나라에 팔아 소를 키우다가 목공의 눈에 띠었다고도 한다.
오고대부(五羔大夫)
중국 춘추시대, 우(虞)나라 사람 백리해(百里奚)를 이르는 말이다. 그가 진(秦)나라로 망명할 때 목공(穆公)이 다섯 장의 검은 양피(羊皮)를 초(楚)나라에 치르고 데려왔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중국 우나라의 대부 백리해(白里奚)는 매우 현명한 인물로 소문이 자자했다.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은 그런 백리해가 늘 탐이 났다. 기원전 654년 진(晉)나라의 헌공은 우나라를 멸망시키고 우나라의 대부인 백리해를 사로잡았다.
진(晉)나라에서는 진(秦)의 목공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게 되었는데 백리해를 노비로 딸려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이에 진(秦)의 목공은 백리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백리해가 진(秦)나라로 오는 도중에 도망을 쳐서 초나라의 완(完)이란 마을에 은신했다. 완(完) 사람들은 도망쳐 온 백리해를 억류하였다.
진(秦)의 목공은 공주 일행이 왔을 때 백리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기다렸던 인물인가? 그런데 없다니 목공은 백리해를 찾겠다고 마음먹고 수소문하여 완(完)이란 마을에 억류되어 있음을 알아내었다.
목공은 무력 대신 마을 사람들을 달래어 조용히 백리해를 찾아오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큰돈을 주자니 완 사람들이 의심할까 걱정이 되었다. 목공은 궁리 끝에 사자(使者)를 완으로 보냈다.
사자는 목공의 지시대로 완 사람들과 협상을 했다. "나의 하인인 백리해가 당신들 땅에 억류되어 있다고 하는데, 다섯 마리 양가죽을 줄테니 그를 돌려보내 주길 바라오."
협상 끝에 완 마을 사람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백리해를 목공에게 돌려보냈다. 그렇게 하여 목공은 그토록 원하던 현인 백리해를 얻었다. 백리해가 진(秦)으로 오자 목공은 그를 노예 신분에서 방면하고 함께 국사를 논의하기를 청했다. 이때부터 백리해를 오고대부(五羔大夫: 다섯 마리 양으로 얻은 인물)라 불렀다.
모든 일에는 댓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공짜가 없다. 다만 그 댓가가 서로 불편이 없을 만큼 적절한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국가 간의 협상이건, 개인 간의 협상이건, 일방적인 협상은 없다. 주지 않고 얻는 법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소중한 것 바라는 것을 얻으려면 투자할 마음과 행동이 적절하게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댓가가 무리해서는 오히려 부작용을 유발한다.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는 댓가를 받는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판단해야 한다.
지난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국민의 당 안철수 후보가 사퇴하면서 국민의 힘 윤석열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이를 두고 여당에서는 야합이라고 비난했다. 그 얼마 전에는 김동연 후보가 사퇴하고 이재명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서로 뒷거래는 없다고 하지만 댓가 없는 공짜 협상, 댓가 없는 공짜 거래가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그 댓가가 얼마나 적정하며 향후 그것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있을 것이다.
협상은 세상사의 중요한 이치임과 동시에 힘을 합하고 평화를 얻으며 함께 상생하기 위한 일이다. 따라서 협상과 화합을 비난할 일만은 아니다. 다만 대가를 지불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합리적인가의 문제는 도사린다. 무리하면 사달이 난다. 또 무리하게 많이 요구하거나, 많이 주지 말고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어야 뒤탈이 없다.
다섯 마리의 양가죽은 완 지방 사람들에게는 정말 필요한 것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상대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간파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의를 보여주고 지키는 일이다. 목공은 백리해에게 그 신의를 끝까지 지켰다.
千人之諾諾不如一士之諤諤
천인지낙낙불여일사지악악
천 명의 아첨하는 사람보다 곧은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한 사람이 낫다는 뜻으로, 주변에 알랑거리며 아부하는 사람만 많은 것보다는 충직한 진심을 가진 사람 한 명을 곁에 두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68 상군열전(商君列傳)에 유래하는 말이다. 상군열전(商君列傳)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법가(法家)의 대표적 인물로 진(秦)나라에서 20년간 재상을 지낸 상앙(商鞅, ?~기원전 338)의 열전이다. 진효공(秦孝公)에게 상(商)땅에 봉읍을 받아 상군이라 불리었다.
상군이 진나라 재상으로 있은 지 10년 쯤 되었을 때 조량(趙良)에게 자신의 빈객이 되어 교제해주기를 청하였으나 거절 당하였다. 상군이 "진나라가 전에는 오랑캐 같은 풍습으로 아비 아들 구별 없이 한 집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내가 풍습을 바꾸어 남녀를 구별하게 하였고 노나라, 위나라처럼 궁궐도 크게 지었습니다. 내가 진나라를 다스린 것과 오고대부(五羖大夫)의 현명함 중에 어느 쪽이 낫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조량이 말하였다. "양가죽 천 장이 여우 겨드랑이 가죽 한 장만 못합니다. 네네 하며 아부하는 천 사람의 말이 곧은 말만 하는 한 사람만 못합니다. 무왕(武王)은 바른 말을 하여 창성하였고 은(殷)나라 주(紂)왕은 말을 못하게 해서 망했습니다. 군께서 무왕이 잘못됐다 여기지 않는다면 제가 하루 종일 바른 말만 하더라도 죽임을 당하지 않겠지요. 가능하겠습니까(千羊之皮, 不如一狐之掖, 千人之諾諾, 不如一士之諤諤. 武王諤諤以昌, 殷紂墨墨以亡. 君若不非武王乎, 則僕請終日正言而無誅, 可乎)?"
상군은 조량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전 시대에 역시 진나라 재상을 지냈던 오고대부와 스스로를 비교하였다. 오고대부는 현자 백리해(百里奚)로, 우(虞)나라 대부였으나 우나라가 망하자 초(楚)나라에서 소를 치는 일을 했는데 진목공(秦穆公)이 다섯 마리 양가죽으로 값을 치르고 데려와 그를 등용하였다.
조량은 오고대부의 고사에 따라 양가죽을 언급하며 여우 가죽과 비교하고 아첨의 그릇됨과 직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바른 말을 좋아한 고대 성군 무왕과 직언을 하는 자들을 죽인 천하의 폭군 주왕의 예를 들며, 조량은 자신이 종일 듣기 싫은 올곧은 말만 해도 괜찮겠느냐 물었다.
조량의 이 같은 물음에 상군은 조량의 바른 말을 약으로 삼아 기꺼이 모시고 듣겠다고 하였다. 이에 조량은 백성을 위해 일하지 않고 호화로운 수레와 병사를 거느리며 무기를 앞세우고 호령하는 상군은 후에 쫓겨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상군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몇 달 뒤 새로 등극한 혜문왕(惠文王)에게 반역죄로 몰려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았고 조량의 말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여기서 전하여, '천인지낙낙불여일사지악악(千人之諾諾不如一士之諤諤)'이라는 말은 '천 명의 사람이 네네 대답만 곧잘 하는 것은 한 명의 선비가 기탄없이 바른 말을 하는 것만 못하다'는 뜻으로, 주변에 알랑거리며 아부하는 사람만 많은 것보다는 충직한 진심을 가진 사람 한 명을 곁에 두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참된 군주라면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간신배들보다 어떠한 상황에도 간언을 올릴 줄 아는 충신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 五(다섯 오)는 ❶지사문자로 乄(오)와 동자(同字)이다. 숫자는 하나에서 넷까지 선을 하나씩 늘려 썼으나 다섯으로 한 단위가 되고 너무 선이 많게 되므로 모양을 바꿔 꼴로 썼다. 五(오)는 나중에 모양을 갖춘 자형(字形)이다. ❷상형문자로 五자는 '다섯'이나 '다섯 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五자는 나무막대기를 엇갈려 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나무막대기나 대나무를 일렬로 나열하는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보통 1~3까지는 막대기를 눕히는 방식으로 숫자를 구분했지만 4를 넘어가면 혼동이 생겼다. 이것을 구별하기 위해 막대기를 엇갈리게 놓는 방식으로 표시한 것이 바로 五자이다. 갑골문에서의 五자는 二사이에 X자를 넣은 방식으로 표기했었지만, 해서에서는 모양이 바뀌었다. 그래서 五(오)는 다섯이나 오(伍)의 뜻으로 ①다섯, 다섯 번 ②다섯 곱절 ③오행(五行: 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 ④제위(帝位: 제왕의 자리) ⑤별의 이름 ⑥다섯 번 하다, 여러 번 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떳떳한 도리를 오륜(五倫), 한 해 가운데 다섯째 달을 오월(五月), 그 달의 다섯째 날 또는 다섯 날을 오일(五日), 음률의 다섯 가지 음을 오음(五音), 다섯 가지 곡식(쌀 보리 조 콩 기장)을 오곡(五穀), 다섯 가지의 감각(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오감(五感), 다섯 가지 빛깔 곧 푸른빛 누른빛 붉은빛 흰빛 검은빛의 다섯 가지 색을 오색(五色), 다섯 가지 계율이나 계명을 오계(五戒), 퍽 많은 수량을 나타내는 말을 오만(五萬), 다섯 가지 욕심이라는 오욕(五慾), 사람이 타고 난 다섯 가지 바탕을 오사(五事), 짙은 안개가 5리나 끼어 있는 속에 있다는 뜻으로 무슨 일에 대하여 방향이나 상황을 알 길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오리무중(五里霧中), 오십 보 도망한 자가 백 보 도망한 자를 비웃는다는 뜻으로 조금 낫고 못한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오십이 되어 천명을 안다는 뜻으로 쉰 살을 달리 이르는 말을 오십천명(五十天命), 다섯 수레에 가득 실을 만큼 많은 장서를 일컫는 말을 오거지서(五車之書), 좀 못하고 좀 나은 점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오십소백(五十笑百), 닷새에 한 번씩 바람이 불고 열흘만에 한번씩 비가 온다는 뜻으로 기후가 순조로움을 이르는 말을 오풍십우(五風十雨) 등에 쓰인다.
▶️ 羔(새끼 양 고)는 형성문자로 羙(고)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양 양(羊; 양)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照(조, 고)의 생략형(省略形)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羔(고)는 ①새 끼양(羊) ②흑양(黑羊)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어린 양이나 염소와 양 또는 경대부의 행위가 결백하여 진퇴에 절도가 있음을 이르는 말을 고양(羔羊), 염소와 기러기를 고안(羔雁), 염소의 털을 고모(羔毛), 염소의 수염을 고수(羔鬚), 새끼양의 가죽으로 만든 대부의 예복의 하나를 고구(羔裘), 노루의 새끼를 일컫는 말을 장고(獐羔), 설 같은 때에 양이나 염소 등을 잡아 잔치를 차려 베풂을 일컫는 말을 팽양포고(烹羊炮羔), 시전 고양편에 문왕의 덕을 입은 남국 대부의 정직함을 칭찬하였으니 사람의 선악을 말한 것을 이르는 말을 시찬고양(詩讚羔羊) 등에 쓰인다.
▶️ 大(클 대/큰 대, 클 대, 클 다)는 ❶상형문자로 亣(대)는 동자(同字)이다. 大(대)는 서 있는 사람을 정면으로 본 모양으로, 처음에는 옆에서 본 모양인 人(인)과 匕(비) 따위와 같이, 다만 인간을 나타내는 글자였으나 나중에 구분하여 훌륭한 사람, 훌륭하다, 크다의 뜻으로 쓰였다. ❷상형문자로 大자는 '크다'나 '높다', '많다', '심하다'와 같은 다양한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大자를 보면 양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크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大자는 기본적으로는 '크다'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정도가 과하다는 의미에서 '심하다'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러니 大자는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大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크다'와는 관계없이 단순히 사람과 관련된 뜻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大자가 본래 사람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大(대)는 (1)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 큰, 으뜸가는, 뛰어난, 위대한, 광대한, 대단한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존경(尊敬) 또는 찬미(讚美)의 뜻도 나타냄 (3)큼. 큰 것 (4)큰 달. 양력으로 31일, 음력으로 30일인 달 (5)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크다, 심하다(정도가 지나치다)(대) ②높다, 존귀하다(대) ③훌륭하다, 뛰어나다(대) ④자랑하다, 뽐내다, 교만하다(대) ⑤많다, 수효(數爻)가 많다(대) ⑥중(重)히 여기다, 중요시하다(대) ⑦지나다, 일정한 정도를 넘다(대) ⑧거칠다, 성기다(물건의 사이가 뜨다)(대) ⑨낫다(대) ⑩늙다, 나이를 먹다(대) ⑪대강(大綱), 대략(大略)(대) ⑫크게, 성(盛)하게(대) ⑬하늘(대) ⑭존경하거나 찬미(讚美)할 때 쓰는 말(대) 그리고 클 태의 경우는 ⓐ크다, 심하다(정도가 지나치다)(태) ⓑ지나치게(태) 그리고 클 다의 경우는 ㉠크다, 심하다(다) ㉡극치(極致), 극도(極度)(다) ㉢지나치게(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클 위(偉), 클 굉(宏), 클 거(巨),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작을 소(小), 가늘 세(細)이다. 용례로는 크게 어지러움을 대란(大亂), 큰 일을 대사(大事), 크게 구분함을 대구분(大區分), 일이 진행되는 결정적인 형세를 대세(大勢), 크게 길함을 대길(大吉), 조금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체로 같음을 대동(大同),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큰 규격이나 규모를 대형(大型), 크게 어지러움을 대란(大亂), 사물의 큼과 작음을 대소(大小), 크게 이루어짐을 대성(大成), 크게 웃음을 대소(大笑), 넓고 큰 땅을 대지(大地), 넓혀서 크게 함을 확대(廓大), 가장 큼을 최대(最大), 몹시 크거나 많음을 막대(莫大), 뛰어나고 훌륭함을 위대(偉大), 매우 중요하게 여김을 중대(重大), 마음이 너그럽고 큼을 관대(寬大), 엄청나게 큼을 거대(巨大), 형상이나 부피가 엄청나게 많고도 큼을 방대(厖大), 더 보태어 크게 함을 증대(增大),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크게 될 인물은 오랜 공적을 쌓아 늦게 이루어짐 또는 만년이 되어 성공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대기만성(大器晩成), 넓고 큰 바다에 물방울 하나라는 뜻으로 많은 것 가운데 아주 작은 것이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대해일적(大海一滴), 넓고 넓은 바다에 떨어뜨린 한 알의 좁쌀이란 뜻으로 매우 작음 또는 보잘것없는 존재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대해일속(大海一粟), 거의 같고 조금 다름이나 비슷함을 일컫는 말을 대동소이(大同小異), 큰 의리를 위해서는 혈육의 친함도 저버린다는 뜻으로 큰 의리를 위해서는 사사로운 정의를 버림 또는 국가의 대의를 위해서는 부모 형제의 정도 버림을 일컫는 말을 대의멸친(大義滅親), 뚜렷이 드러나게 큰 글씨로 쓰다라는 뜻으로 누구나 알게 크게 여론화 함을 이르는 말을 대서특필(大書特筆),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중대한 의리와 명분을 이르는 말을 대의명분(大義名分), 큰 집과 높은 누각이라는 뜻으로 웅장하고 큰 건물을 이르는 말을 대하고루(大廈高樓), 크게 깨달아서 번뇌와 의혹이 다 없어짐을 이르는 말을 대오각성(大悟覺醒), 장군의 별칭으로 매사에 겸손하고 말 없이 수고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대수장군(大樹將軍), 큰 재목이 작게 쓰이고 있다는 뜻으로 사람을 부리는 데 있어서 제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안됨을 이르는 말을 대재소용(大材小用), 큰 소리로 목을 놓아 슬피 욺을 일컫는 말을 대성통곡(大聲痛哭), 몹시 놀라 얼굴빛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대경실색(大驚失色), 크게 간사한 사람은 그 아첨하는 수단이 매우 교묘하므로 흡사 크게 충성된 사람과 같이 보임을 이르는 말을 대간사충(大姦似忠), 바라던 것이 아주 허사가 되어 크게 실망함을 일컫는 말을 대실소망(大失所望), 매우 밝은 세상을 이르는 말을 대명천지(大明天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큰 도리나 정도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말을 대도무문(大道無門), 덕이 높고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에 초연함 곧 도량이 넓어서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대인대이(大人大耳), 큰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공명정대하여 잔재주를 부리지 않으므로 언뜻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인다는 말을 대지여우(大智如愚) 등에 쓰인다.
▶️ 夫(지아비 부)는 ❶회의문자로 一(일)은 여기서 상투의 모양이고, 大(대)는 사람이나 어른 또는 훌륭ㅡ한 사람을 나타낸다. 夫(부)는 상투를 튼 어엿한 장부(丈夫)를 말한다. 장부(丈夫)란 지금의 성인(成人)에 해당하는 말이며, 옛날엔 스무 살이 되면 상투를 틀고 관(冠)을 썼다. ❷상형문자로 夫자는 '지아비'나 '남편', '사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夫자는 大(큰 대)자와 一(한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갑골문에 나온 夫자를 보면 사람의 머리 부분에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이것은 남자들이 머리를 고정할 때 사용하던 비녀를 그린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남자들도 머리에 비녀를 꽂아 성인이 됐음을 알렸다. 그래서 夫자는 이미 성인식을 치른 남자라는 의미에서 '남편'이나 '사내', '군인'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夫(부)는 ①지아비 ②남편 ③사내, 장정 ④일군, 노동일을 하는 남자 ⑤군인(軍人), 병정(兵丁) ⑥선생, 사부 ⑦부역(負役) ⑧100묘(畝)의 밭 ⑨저, 3인칭 대명사(代名詞) ⑩대저(大抵; 대체로 보아서), 발어사(發語辭) ⑪~도다, ~구나(감탄사) ⑫다스리다 ⑬많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어른 장(丈),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시어머니 고(姑), 아내 처(妻)이다. 용례로는 남편과 아내를 부부(夫婦), 남의 아내의 높임말을 부인(夫人), 남의 남편의 높임말을 부군(夫君), 덕행이 높아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의 높임말 또는 남편의 높임말을 부자(夫子), 두 암키와 사이를 어울리 엎어 이는 기와를 부와(夫瓦), 남편이 아내에 대하여 가지는 신분이나 재산 상의 권리를 부권(夫權), 부모의 제삿날을 부일(夫日), 남편의 친족을 부족(夫族), 남편과 아내를 부처(夫妻), 남편과 동성동본인 겨레붙이를 부당(夫黨), 국가나 공공단체가 부과하는 노역을 부역(夫役), 남편이 주장하고 아내가 이에 따름으로 가정에서의 부부 화합의 도리를 이르는 말을 부창부수(夫唱婦隨),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됨을 이르는 말을 부위부강(夫爲婦綱), 오륜의 하나로 남편과 아내는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부부 사이에는 인륜상 각각 직분이 있어 서로 침범하지 못할 구별이 있음을 이르는 말을 부부유별(夫婦有別), 부부 사이의 애정을 일컫는 말을 부부지정(夫婦之情), 혼인을 맺자는 언약을 일컫는 말을 부부지약(夫婦之約), 부부의 화합함이라는 말을 부화부순(夫和婦順)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