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p Class]
'친근한 여동생'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거듭나다
|
큰 키로 성큼성큼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이연희를 보는 순간, 머릿속으로 생각해둔 질문 몇 개를 급히 지웠다. 얼굴이 워낙 작아서 키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언제나 광고나 화보 속에서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는 표정 때문에 소녀 같은 몸가짐과 목소리, 말투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단정 지은 게 문제였다. 그가 자리에 앉아마자 “인터뷰가 많아서 힘들죠”라고 인사 겸 위로를 건네자, “아니요, 대답할 때마다 새로워요”라고 짤막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이연희가 데뷔한 지 10년이 넘은 스물일곱 살의 배우라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
<조선명탐정2>에서 게이샤 역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이하 조선명탐정2)은 이연희가 주연으로 나선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 개봉 직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을 때 그는 “제가 나온 영화 중 관객수가 많이 든 영화가 없어요. 저도 300만, 500만 한 번 만들어보는 게 소원이에요”라고 했다. 3월 초인 현재 <조선명탐정2>는 누적 관객 350만 명을 넘었으니 그의 소원이 이뤄진 셈이다. 이 영화는 2011년 설날 극장가에서 승리를 거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의 속편이다. 주연 김명민과 오달수는 전편에 이어 그대로 나오고, 여자 주인공이 한지민에서 이연희로 바뀌었다. 이 영화를 통해 성숙한 이미지로 변신을 꾀했던 한지민과 마찬가지로 이연희도 이번 작품에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드라마 <미스코리아> 이후로 대본이 여러 개 들어왔는데 그중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위주로 검토를 했다. 전작인 <결혼전야>도 5년 만에 한 영화인데 좀 더 자주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영화 관계자들에게 잊힐 것 같았다”고 했다. “마땅한 게 없었어요. 제 또래 여배우가 할 만한 역할이 별로 없었고, 가끔 나오는 배역은 이미 캐스팅이 됐고. 그러다가 저한테 딱 들어맞는 이 작품을 발견했죠. 1편을 재밌게 봤고, 출연 분량은 길지 않지만 강렬한 이미지를 남길 수 있는 역할이거든요. 이 역할이 여배우나 여자로 넘어가는 과정이 됐으면 했어요. 이제는 성숙해야죠. 저는 오랫동안 여동생 같고, 친근할 수 있을 것 같은 이미지였죠. 이젠 배우라는 느낌이 더 많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지금이 그 전환점인 것 같아요.” <조선명탐정2>에서 이연희는 영화의 중심을 잡아주는 게이샤 ‘히사코’ 역을 맡는다. 정조 19년, 조선 최고의 명탐정인 김민(김명민)은 외딴섬에 귀양을 간다. 파트너 서필(오달수)에게 불량 은괴가 유통되고, 소녀들이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은 김민은 수사를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히사코를 만난다. 히사코는 수사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연 많은 여자로 김민의 수사에 혼선을 준다. 그가 살짝 올라간 눈꼬리로 흘겨보면 김민은 정신을 못 차린다. “장쯔이의 <게이샤의 추억>을 보면서 게이샤의 훈련 과정이라든지 화장법, 행동 방식 등을 참고했어요. 춤추는 장면은 많이 나오지 않지만, 그거 한 달 동안 연습한 거예요. 기모노를 입고 종종걸음을 놓느라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보다는 표현의 방식을 많이 고민했어요. 김민을 유혹하는 척하면서 원하는 물건을 빼돌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거기서 막혔어요. 생각해보니 물건을 뺏는 게 아니라 김민의 혼, 그리고 더 나아가선 관객의 혼을 뺏어야 했어요. 그걸 깨닫고는 좀 더 강하게 밀어붙였죠.” 데뷔 직후부터 인터뷰에서 “웃긴 역할을 맡고 싶다. 자신 있다”고 종종 말해온 이연희는 “이번 영화처럼 코믹한 게 편하고 좋다”고 했다. “여배우는 망가질 때 대중은 코믹하다면서 좋아해요. 그래서 망가져도 상관없어요. <파라다이스 목장>이나 <미스코리아>처럼 코믹한 캐릭터로 나오는 드라마도 그래서 했었고요. 기회가 되면 또 하고 싶어요. 활력소가 된다고 할까요. 진지하고 무게가 있어야 하면 힘들 때가 있어요. 요즘도 제가 코믹해져서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 게 뭘까를 생각해요.” ‘누가 뭐라 하든’이란 생각으로 연기 이연희는 열세 살 때 연예기획사 SM에서 주최하는 ‘청소년 베스트 선발대회’에서 ‘외모짱’ 1위를 수상하면서 연기를 시작했다. 그전까지 그는 길쭉한 몸으로 수영과 단거리 달리기를 잘하는 여자아이였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려 어머니와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다. 세 자매 중 막내인 그는 언니들의 손에 이끌려 선발대회에 나갔다. 춤과 노래를 잘할 줄 몰라서 외모를 겨루는 부문에 지원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부문과 대회 전체 1위를 차지했다. ‘언니들과 얼마나 닮았을지’ 궁금해질 무렵 이연희는 “언니들도 다 예뻐요”라고 싱긋 웃었다. 아이돌 그룹으로 유명한 연예기획사에서 3년간 연습생 훈련을 거친 뒤, 이연희는 드라마 <해신>에서 수애의 아역으로 데뷔했다. 눈에 띄는 외모로 화제가 된 덕분에, 드라마 조연 두 번 만에 그는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과 드라마 <어느 멋진 날>의 주연을 맡았다. 2007년 이명세 감독의 <M>에 출연하면서 첫사랑의 이미지를 굳혔다. 당시 이연희는 “이명세 감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다. 감독이 이끄는 대로 따라서 했다”고 했다. 순수하고 귀여운 스무 살의 이연희는 애써 연기하거나 꾸미지 않아도 영화 속에서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었다. 첫사랑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이연희의 연기는 줄곧 비난을 받았다. 특히 <M>의 이듬해 출연한 드라마 <에덴의 동쪽>에서 호된 성인식을 치렀다. 도식적인 표정 연기와 책을 읽는 듯한 대사 처리 때문에 연기력 논란이 일었고, “난 슬플 땐 학춤을 춰”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대사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논란을 더욱 거세게 타오르게 만들었다. 이연희는 “현장에 선배 연기자들이 많았다. 경력이 짧은 나를 가르쳐주신다고 여러분이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혼돈이 왔다”고 했다. “아무리 열심히 하려고 해도 경직됐어요. 제가 하고 있는 연기가 맞는지, 안 맞는지 계속 눈치를 보게 됐고요. 그런 것들이 티가 나면서 더 어색해진 거죠. 그런데 연기에는 정답이 없더라고요. 연기 잘하는 선배들을 봤더니 다들 자기 생각이 확고하고, 자신의 연기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어요. 그게 결국은 맞는 거고요. 지금은 ‘누가 뭐라 하든’이란 생각으로 연기를 해요.” 2013년 방영한 드라마 <구가의 서>를 기점으로 이연희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극 중에서 이승기의 어머니 역할로 잠깐 출연했지만, 출산 장면까지 연기하면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연희는 사극으로 데뷔를 하고, 전환점을 맞고, 흥행까지 경험한 셈이다. 그는 “주인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원래도 없었다. <에덴의 동쪽>에서도 두 번째 여자 주연이었고, 영화 <어느 멋진 날>에서도 여러 주연 가운데 한 명이었다. 미국 드라마를 보면 여러 명이 주연급을 맡는데 왜 한국에선 주인공 타이틀이 남자 하나, 여자 하나밖에 없는지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망설였어요. 역할의 비중 때문이 아니라 대본을 보니 연기 과정이 너무 혹독한 거예요. 고문을 당하고 출산을 하고. 고생할 게 뻔히 보였죠. 게다가 드라마의 시작을 책임져야 하는 역할이라서 부담이 컸어요. 작가님과 감독님이 제가 그 역할 맡기를 원해서 그것만 믿고 했죠. 이승기보다 제가 한 살 어리지만, 어머니란 설정은 어색하지 않았어요.”
|
“예전에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뭐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잘해야만 할 것 같아서 덤벼들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부족한 거 투성이에요. 제가 자신 없는 부분, 못 하는 부분을 알게 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깨달아가요. 강해지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죠.”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미스코리아> 이연희는 차기작인 <미스코리아>까지 그 긍정적인 기세를 몰아갔다. ‘엘리베이터걸’에서 ‘미스코리아’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이 드라마에서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달걀을 우적우적 씹어 삼켰고, 지하철 안에서 수영복을 입고 워킹을 연습했다. 억척스럽고 엉뚱한 모습을 보여주자 대중은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연희는 “이 작품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성장했다”고 했다. “감독님은 제가 항상 배역을 생각하고 긴장할 수 있도록 숙제를 내주셨어요. 한창 상사에게 구박 받고, 성희롱까지 당하는 장면을 찍고 있을 때 ‘너라면 이런 상사한테 어떻게 대들래’라고 숙제를 내주셨어요. 상사를 제대로 혼내주는 장면을 앞두고 있었거든요. ‘아무도 이연희에게 예상하지 않은 것을 많이 준비해오라’고 하셨죠. 어떻게 하면 사람들 ‘헉’ 소리 나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죠. 그런데 제 성격에 화내봤자 한계가 있어요. 결국은 감독님이 생각해오신 대로 테이블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서 상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퍼붓는 연기를 했어요. 쩍벌, 전 생각도 못했던 건데. 예상밖의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또 배웠죠.” 열세 살 때부터 연예기획사에 소속되고, 열여섯 살에 데뷔한 그는 또래와 같은 학창시절을 보낼 수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수학여행 이후로 학교를 못 갔지만 그는 “아쉽지는 않다”면서 “공부만 맨날 하는데 뭐가 좋겠어요”라고 했다. 연예 활동을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스스로 많이 노력했고,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들과는 여전히 친하게 지낸단다. 그는 “일을 하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은 변하고, 그게 좋은 것 같다. 만약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캐릭터를 맡아서 연기를 하지 않았다면 평생 모를 수도 있었던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뭐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잘해야만 할 것 같아서 덤벼들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부족한 거 투성이에요. 제가 자신 없는 부분, 못 하는 부분을 알게 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깨달아가요. 강해지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죠.”
|
‘환상 속 첫사랑’ 이미지는 이제 그만 이연희에게 일을 하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점이 무엇인지 물었다. “제 사적인 감정을 보이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힘이 들어간 단어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콕콕 박혔다. 더 이상 부연 설명도 없었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 즉 사적인 감정을 보일 수 있는 시간에는 무엇을 하는지 다시 물었다. “오래된 친구들을 주로 만난다”고 하면서 “그럴 때 알아보고 다가오는 분들이 많지만 그게 불편한 적은 없다. 요즘에는 어딜 가도 사인이나 사진을 요청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그것도 신경 안쓴다. 신경 쓰면 더 많은 사람이 알아보고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연희 아니다, 연예인이 아니다’란 생각으로 있는다. 나만 의식을 안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묻혀서 결국 아무도 나한테 신경 안 쓴다. 그게 참 편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20대 후반이란 나이도, 10년이 넘은 경력도 그는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기자와 서로의 나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는 “서른이 넘으면 좀 편해지고 여유를 가질 수 있느냐”고 물으면서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좀 힘들다. 촬영 현장에서 동생들이 깍듯하게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게 불편하다. 차라리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 여행 다니면서 보니까 외국에선 할아버지랑도 이름을 부르면서 친구가 될 수 있더라”라고 했다. 그러고선 “요즘에는 일이 없을 때 여행을 가는 게 제일 좋다”고 덧붙였다. “제 생활 크게 별난 거 없어요. 작품 끝나면 또래들처럼 학교에 갔고, 여행도 가요. 작품을 할 땐 직장인이 출퇴근을 하듯 촬영장을 오가니까. 유럽이 좋아서 런던이든 밀라노든 혼자 가요. 방도, 비행기도 다 혼자 알아보고요. 다른 사람한테 해달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계속 의존하면 나중에 전 혼자서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요. 일은 어쩔 수 없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일상생활은 혼자 하고, 저만의 길을 찾아가려고 해요.” 인터뷰가 끝난 후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소속사 직원들과 함께 온 이연희를 다시 한 번 마주쳤다. 기자의 옆 좌석에 앉은 그는 ‘손만두’와 ‘시래기비빔밥’을 오물거리다가도 직원들의 대화에 맞장구를 치거나 웃었다. 전날 영화시사회가 끝난 뒤 가진 뒤풀이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나 그들의 소소한 일상이 대화의 대부분이었다. 문득 인터뷰 도중 그가 “첫사랑 이미지가 강하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저도 연애를 안 하는 건 아니에요,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라고 말했던 게 생각이 났다. 누가 그를 환상 속의 첫사랑이라고 했던가. 그는 긴 다리를 땅에 굳게 딛고 선 여배우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