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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22,3-16
그 무렵 바오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4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5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6 그런데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7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8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9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10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11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나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12 거기에는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13 그가 나를 찾아와 앞에 서서,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14 그때에 하나니아스가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15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16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6,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소명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세 번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비그리스도인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유대 군중에게 자신의 소명을 밝히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맹렬히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교사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유대인이며 바리사이의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 대한 열성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골수분자였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의 의지나 타인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나자렛 예수님과의 초자연적인 만남을 통해서였음을 말합니다.
곧 다마스쿠스로 인도되어 하나니아스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때 하나니아스는 바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도 22,14-15)
이 말 속에는 신앙생활의 원리가 세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택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곧 바오로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한 바람에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으로 우리는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분을 뵙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삶을 신앙생활의 원리로 삼아 살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그분이 들려주시기에 들을 수 있고, 보여주시기에 볼 수 있고, 깨우쳐주시기에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듣고 본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파견한 분에 속한 이가 우리의 신원이요, 파견한 분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복음 전파가 우리의 사명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원의식>
오늘 축일의 독서인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가 자기의 회심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일종의 연설인데 그 첫 마디가 이렇습니다.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바오로의 회심은 유다 사람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바뀐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저와 연결하여 성찰하니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하던 것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좋아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결혼한다면 한국 여자와 결혼하고 아이들을 한국 사람으로 키우지, 결코 다른 나라 사람으로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모든 면에서 참 좋은 나라이고, 다른 나라보다 좋은 나라이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고,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문제가 많습니다.
국민은 1류인데 정치인은 3류, 4류라는 생각이 큽니다.
그런데도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좋아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좋은 면에서는 저의 태생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순종하기 때문이고, 나쁜 면에서는 제가 국수주의자 내지는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점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넘어서 세계인이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합니다.
전에도 제가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얘기한 바 있지만, 제가 그분을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그분이 민족주의자이고 가톨릭 신자여서가 아니라, 그분의 사상과 신앙이 민족과 종교를 넘어서 보편적이기 때문이고, 보편적인 분이기에 말 그대로 진정한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이란 아시다시피 보편적이라는 뜻인데, 가톨릭 신자 중에 저처럼 무늬만 가톨릭이지 실제로는 보편적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저에 비해 안중근 의사는 참 가톨릭 신자이고 세계인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의 회심과 연결하여 보면, 한국 사람에서 세계인이 되는 것보다 한국 사람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 낫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유다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것이 너무도 넘치고 확신에 차서 유다 정통에서 벗어났다고 생각되는 그리스도인들을 열성으로 박해까지 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그가 이제는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로” 또는 “그리스도의 종인 나 바울로”라고 자기의 모든 서간에서 자기를 소개합니다.
사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자기 나라와 민족을 뛰어넘는 세계인이 될 수밖에 없고, 다른 나라와 민족의 사람들도 차별은 물론 구별도 없이 그리스도인으로 그리고 형제로 초대할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성인의 회심은 기념하지 않고, 베드로 사도나 다른 사도의 회심은 기념하지 않고, 유독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특별히 축일로 지내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애국자가 되지 말고 애교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애국자도 되어야겠지만, 그것을 넘어 그리스도와 가톨릭 교회를 진정 사랑하는 애교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원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오늘은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신원 의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회심은 방향 전환>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박해를 하였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모든 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필리 3,7-9)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필리 3,13)
아마도 지난 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며 죄를 짓게 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나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합니다.
혹 바른 길을 걷고 있지 못하다면 서둘러 방향을 바꾸기를 바랍니다.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 이므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입니다.
따라서 헛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향을 가려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바쁘게 서두르다가 그만 목적지와는 다른 방향의 차를 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기차를 갈아 탈 생각은 하지 않고 기차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청소를 하고, 노약자를 도와주고, 배고픈 이에게 음식을 사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기차 안의 승객들은 그의 선행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종착역은 그가 목적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기차 안에서 선행을 베풀 것이 아니라 기차를 갈아탔어야 했습니다.
회심은 바로 방향 전환입니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실한 삶의 방향을 바꾸었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눈에 들도록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하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소명을 확신한다면 몸을 희생하더라도 또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교에 마음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합니다.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였다(1코린 9,23)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와 함께 복음 선포의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1코린 9,23-22)
그야말로 눈높이에 맞추어 접근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방법으로 더 분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우리에게도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회심이 필요합니다>
초세기 교회의 성장과 관련해서 바오로 사도처럼 큰 기여를 한 인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여러 방면에 끼친 영향력은 예수님의 12 직제자 그룹 전체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토록 위대한 인물이요 대성인인 바오로 사도에게도 흑역사가 있었습니다.
한때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 섬멸의 선봉장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달려가서 철저하게 색출해내고야 마는 유다인 중의 유다인이었습니다.
그날도 다마스쿠스란 도시에 그리스도교인들이 비밀집회를 지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기탱천한 그는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 자신의 애마(愛馬)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말달리던 어느 순간 그는 갑작스런 몸의 이상증세를 느끼며 낙마(落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강골이었던 그는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체험과 동시에 두 눈이 멀어버리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인생의 밑바닥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갑작스럽게 닥쳐온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와 대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생일대의 전환점, 다시 말해서 회심의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사실 ‘바오로’라는 이름의 뜻은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당시 하층민들이나 종들이 애용하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원래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란 ‘크고 위대한 사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가에서나 사용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위풍당당하던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낙마한 후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면서 바오로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스스로를 귀족, 잘 나가던 사람으로 여겼던 사울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체험하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아, 정말이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구나. 티끌이요, 종이요, 작은 자, 무(無)였구나.” 하고 깨우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란 의미의 바오로로 바꾼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으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낙마(落馬)한 바오로를 향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책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이렇게 예수님을 박해하던 그였는데, 그 역시 3일간의 깊은 바닥 체험 끝에 그의 내면에서는 심오한 삶의 이동, 결정적인 회심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박해자에서 바오로 사도로 새로이 태어났습니다.
악질 중의 악질 고발자였던 사울이었는데 이제 베드로 사도 못지않은 사도가 되어 우리 교회를 든든히 뒷받침하고 계십니다.
그토록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못살게 굴며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는 이렇게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이 모든 것들을 다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태생적 한계, 근원적 결핍으로 인해 수시로 죄와 악습, 하느님으로부터의 멀어짐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우리이기에 수시로 되풀이해야 할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회심입니다.
한번 두 번, 열 번의 회심이 아니라 천 번, 만 번의 회심, 매일 매 순간 우리 삶의 심오한 이동이 필요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준비>
예수님의 기적들 가운데에서 가장 놀랍고 가장 위대한 기적은 ‘부활’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이고, 핵심이고, 중심입니다.
그다음으로 놀라운 기적은 사도들의 변화입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예수님을 증언하려고 자신들의 인생과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들의 증언과 선포로 그리스도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오로’로 변화된 일도 ‘사도들의 변화’ 라는 기적에 속한 일이고, 예수님께서 직접 일으키신 놀라운 기적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활동으로 그리스도교가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고, 그의 활동은 온 세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만 보면, 박해자 사울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갑자기’ 변화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의 회심이 정말 그렇게 갑작스럽게 ‘수동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을까?
자신의 자유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마치 전쟁에서 붙잡혀서 포로가 되는 것처럼 된 일이었을까?
물론 바오로 사도 자신은 그렇게 말하기는 합니다.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코린 9,16-18)
이 말은 원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에게 붙잡혀서 억지로 사도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유와 권리도 모두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낮춘 말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라는 말은 선교활동은 자신이 행복해서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삯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 자체가 기쁨이고 삯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고, 그것을 찾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5)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고, 찾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 1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1티모 1,12-16)
여기서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라는 말은 ‘바오로’ 라는 사람이 사도가 될 만한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즉 준비되어 있음을 예수님께서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몰라서 한 일이라는 뜻인데, ‘참된 구원’을 어디서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를 몰랐다는 말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죄인들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이라는 말은 자기가 한때 박해자였음을 고백하는 말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크게 갈망했던 사람이었다는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보기’로 삼으려고 바오로 사도를 선택하셨다는 말은 그렇게 큰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본보기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왜 하필이면 박해자 사울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바오로 사도 자신의 답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원래 바리사이였습니다(필리 3,5).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가장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바리사이들과 같은 위선자는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진리를 찾는 열성적이고 경건한 사람이었는데,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선 것도 그의 열성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그는 그것이 구원의 진리를 찾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의식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마음속에 어떤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랬는데 스테파노 순교자가 순교 직전에 했던 설교와 순교 모습이 하나의 씨로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이 바로 그 씨에서 싹이 트는, 즉 박해자가 사도로 변화되는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회심 뒤의 과정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갈라 1,16ㄴ-18)
바오로 사도는 부르심을 받은 뒤에도 갑자기 사도로 나선 것이 아니라, 삼 년 동안 아라비아 사막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면서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준비된 사람이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응답을 실행하게 됩니다.
구원의 은총은 자동적으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응답하고 실천하는 생활을 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회심(回心)의 여정 - 만남, 회심, 선포>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요한 15,16)
요즘 들어 최고의 강추위지만 오늘 밤하늘은 참 청명(淸明)하여 별들도 유난히 영롱합니다.
마음 하늘의 믿음의 별, 희망의 별, 사랑의 별도 저리 맑고 밝았으면 좋겠습니다.
회심한 마음 하늘의 별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자 제 서원 37주년이 되는 날이라 감회가 깊습니다.
감사(感謝)와 더불어 회심(回心)하는 마음이 됩니다.
1982년 수도원 입회하여 1985년 한해 수련을 마치고 1986년 1월25일 첫서원을 했고, 1988년 요셉수도원에 부임했으며, 다음해 1989년1월25일 종신서원을 했으니 요셉수도원 1호 종신서원자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영성생활에 회심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요!
문득 요셉수도원의 제1호 순교자와도 같은, 배밭 노동 중 불의의 사고로 2013년 8월17일 선종한 정훈만 요한 세례자 수사가 생각납니다.
바로 수도원 정자를 지날 때마다 요한 수사의 작품인 '회심정(回心亭)'이란 현판 글씨를 만나게 됩니다.
앉아 쉴 때마다 회심하라는 회심정이란 명칭이 참 기발합니다.
제 좌우명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하루단위의 삶을 살아가는 상징적 표현이 서품 이후 하루하루 날마다 봉헌한 미사에 써온 강론입니다.
또 2주 단위로 토요일마다 삭발하니 2주 단위로 사는 느낌이며, 매월 첫 수요일 병원 진료차 가니 1개월 단위로 사는 느낌입니다.
저절로 이 날을 감사와 더불어 회심의 계기로 삼게 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수도원의 일과표는 그대로 ‘회심의 시스템’과도 같습니다.
평생 하루하루 매일 여덟번 성전에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러 갈 때 마다 찬미와 감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회심의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공동전례기도의 은총이 회심의 일상화, 회심의 생활화를 이뤄주니 참 감사한 일이지요.
제가 요즘 특히 강조하는 바, “선택-훈련-습관”입니다.
날마다 회심을 선택하여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이 영성생활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요.
회심도 의식적 훈련입니다!
도대체 훈련 아닌 것이 없습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감사도 기도도 모든 수행이 훈련입니다.
마침내 훈련으로 습관화될 때 성격도 운명도 바뀌어 점차 주님을 닮게 되어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은총충만,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작년 12월에 이어 2023년 1월까지 제가 면담 고백성사 시 써드리는 보속 처방전 말씀 역시 참 좋은 영성 훈련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님(자매님)!”
(필립4,4)
써드린 후 “1. 화내지 말고, 2. 기쁘게, 3. 웃으며, 4. 감사하며, 5. 평화롭고, 6. 행복하게 살라”고 권고합니다.
이 또한 의식적 노력의 선택이자 훈련으로 습관화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제의 각별한 체험도 길이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제 애송하는 행복기도 첫 연에 “주님” 다음 “참회합니다”를 붙였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행복기도가 완성된 느낌이었습니다.
반드시 “주님” 다음 “참회합니다”가 나와야 합니다.
첫 연을 다시 나눕니다.
“주님,
참회합니다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성 바오로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이유는 사도의 회심이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큰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방인들의 사도로 변화시켜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이미 10세기 말경부터 축일을 지내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바오로를 눈여겨 봐온 주님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전격적인 주님과 바오로 사도의 만남의 은총이 참 신비롭습니다.
은총의 만남에 자연스럽게 뒤따른 바오로의 회심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인 사울의 다른 이름입니다.
마치 사울이 바오로로 바뀐 것처럼 잘못 이해해선 안됩니다.
주님과 바오로의 만남의 장면이 너무 눈에 보이듯 실감적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대하여 거기에서 누가 일러줄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주님과의 만남과 회개가 참으로 전격적으로 이뤄집니다.
바오로만 몰랐지 이미 주님의 계획표에는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아마 우리의 경우도 그럴 것입니다.
주님의 계획표대로 전개되는 주님 섭리 은총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섭리 은총에 잘 화답할 수 있도록 침묵과 경청, 그리고 순종의 겸손한 자세가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위의 주고 받은 대화 중 주님의 다음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주님을 믿는 제자들 하나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한 주님이시니 제자들에 대한 박해는 바로 주님께 대한 박해라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웃 하나하나가 주님의 현존이니 얼마나 존엄한 품위의 사람인지요!
이어 바오로는 주님의 사람, 하나니아스를 만나 회심에 이어 그를 통해 주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이제 예전의 사울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난 사울이요 바오로 사도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그대로 바오로를 통해 실현되어 이제 회심에 이어 본격적 복음 선포의 삶이 펼쳐집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모두가 바오로일 수도 없고 바오로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바오로처럼 비상한 회심 체험에 비상한 선교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그 회심과 복음선포의 양상은 다 다릅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내 삶의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요, 주님과 만남의 자리이자 회심의 자리이며,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한 두 번으로 끝나는 주님과의 만남이나 회심이나 선포가 아니라 평생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과 만나야 하고, 회심해야 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자들의 삶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 회심의 여정, 선포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이 만남의 여정, 회심의 여정, 선포의 여정에 항구할수 있게 해주는 주님의 미사은총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날마다 새하늘 새땅을, 영원한 삶을 살게 해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
(시편 117,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 당신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이렇게 예수님의 유언에 따라 복음을 선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가 회심 체험을 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체험하였듯이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크게 마음을 고쳐먹는 체험을 통해 참 기쁨을 체험하여야, 그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크고작은 회심 체험이 있답니다.
세례를 받게 되었을 때의 체험, 수도원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의 체험,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 결혼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의 체험, 술이나 담배, 도박을 끊게 되었을 때의 체험, 이 길 저 길을 망설이다가 기도로 길을 찾게 된 체험, 죽을 고비를 넘긴 체험...
이런 크고 작은 체험들을 통해 그것이 우연이 아니고 운명이요 기적임을 확인하게 되면, 그 사건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하느님 체험이 됩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이구나.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만들어 낸 기적이구나." 고백하게 됩니다.
오늘 수련 시작을 하게 되는 우리 바오로 벗에게도 오늘이 또다른 하느님 체험, 또다른 회심 체험의 기회가 되기를 빕니다.
저나 바오로 벗이나 사도 바오로의 이름을 지니고 있기에 오늘이 더 특별한 축일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회심 체험을 세 번이나(사도 9,1-19; 22,3-22; 26,12-18)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 있어 일생일대의 전환기를 가져오게 만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강력한 하느님 체험이었기 때문이겠지요.
실로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근처에서 큰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고 그 빛 때문에 눈이 멀었으며, 다른 사람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사도 22,6-9)
영적인 것을 보려면 육신의 눈이 멀어야 되고, 비로소 육신의 귀에 들리지 않는 성령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 체험은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가 열림으로써 그동안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그제서야 그동안 내가 보고듣고 경험한 것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건 아무것도 아닌 껍데기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크게 회심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마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나병환자를 무섭고 싫은 사람으로만 여기다가 회심 후 그를 영혼과 육신에 달콤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통을 지는 참 그리스도인이라 보게 된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이 하느님 체험은 출발점에 불과하였습니다.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가 되는데는 하느님의 기묘한 개입 외에도, 하나니아스(사도 22,12)라는 신앙의 선배와 바르나바(사도 9,27)라는 훌륭한 도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협력자들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당신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니아스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는데, 그가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말하자 바오로는 그 순간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됩니다.(사도 22, 12-13)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고(사도 11,24) 바오로가 위기에 처하게 되고, 제자들마저도 두려워하며 그를 받아들이기를 꺼려할 때, 그를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그의 회개여정을 설명해주며 변호해줌으로써 한 형제로 받아들여지게 해줍니다.(사도 9,27~)
그는 또한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로서 마음껏 활약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지원해 준 최고의 협력자요 참사도였습니다.
이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사도 바오로는 없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우리가 되어 있음에도 이같이 하느님의 섭리와 그 섭리의 도구로 협력자가 된 신앙의 선배요 도반들이 있었을 겁니다.
오늘 나의 하나니아스는 누군지, 또 나의 바르나바는 누군지 한번 돌이켜보고, 그에게 마음으로 깊이 감사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나도 그 누군가의 하나니아스요 바르나바가 되어 주기를 다짐하는 날이 되길 축원합니다.
이제 바오로 벗은 세속의 옷을 벗고 수도복으로 갈아입습니다.
이제 육의 자녀가 아니라 영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율법의 자녀가 아니라 복음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입게 됩니다.(갈라 3,27; 로마 13,14)
수도복이 수도자를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수도복은 이제 그리스도를 옷입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종임을 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복은 옛부터 십자가 형상의 苦服이라 불리었습니다.
이제 수련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배우기를 시작합니다.
수련기는 그래서 '시련기'라 불립니다.
다른 벗들은 오늘부터 바오로 벗에게 시련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시련들을 다 겪고 이겨내어야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의 서원을 발할 수 있게 됩니다.
승리를 위해 고된 훈련을 사서하는 운동선수들을 생각하십시오.
게으르지 말고 적극적으로 투쟁하십시오.
얼마나 힘들게 훈련을 했는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회심의 여정은 열정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도 바오로를 택하신 이유도 그의 열정 때문이었을 거라고 이야기들 합니다.
축구 대표선수를 뽑는데 열정이 없는 사람을 뽑겠습니까?
하물며 하느님 나라의 대표선수를 열정과 투신이 없는 사람을 뽑겠습니까?
우리 모두 새롭게 시작합시다.
새로운 열정으로 회심의 삶을 삽시다.
사도 바오로, 저희의 회심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신부님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면서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지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물렀던 ‘Notre Dame of Jerusalem Center’는 주님의 무덤 성당에서 가까웠습니다.
매일 새벽 성지에서 조배하고 미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주님의 무덤 성당으로 찾아갔습니다.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의 눈빛은 경건함과 진실함으로 빛이 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빈 무덤을 향해서 달려갔던 것처럼 신부님들과 함께 무덤성당을 방문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순례의 여정 중에 신부님들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신부님들의 열정과 경건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4명이 왔기 때문에 단체로 오면 가기 힘들었을 성지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들이 기도하였던 ‘St. George's Monastery’를 순례하였습니다.
자동차의 바퀴가 4개이기 때문에 자동차는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것처럼 함께했던 4명의 신부님들이 모두 주님께로 가려는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순례의 피곤함도 잊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사제가 된 신부님이 이런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신학생 때 교구장님과 대화할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신학생이 교구장님께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주교님, 신학교의 규칙을 완화하면 더 많은 신학생들이 사제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주교님께서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교구장님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10사람의 불성실한 사제는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10사람의 교만한 사제는 공동체에 깊은 상처를 줍니다.
10사람의 욕심 많은 사제는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불성실과 교만 그리고 욕심을 비난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본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성실한 사제는 교회를 성장시킵니다.
한 사람의 겸손한 사제는 공동체에 큰 위로를 줍니다.
한 사람의 청빈한 사제는 교회를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합니다.”
그러자 신학생은 규칙을 잘 지키는 신학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업에서도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여러 상품이 아닙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특정한 상품이 매출을 선도합니다.
지난 12월 31일에 선종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도 이러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문제는 신자 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사라지고 있기에 위기가 생기고, 기도와 전례에 대한 미지근한 태도가 나타나며, 선교를 등한시합니다.
참된 개혁은 토착화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개혁은 내적인 각성, 불타오르는 마음입니다.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할 일은 그리스도께 대해 확실히 깨닫고, 믿을 수 있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타협과 무기력과 같은 모든 유혹에 맞서 하느님 말씀의 위대함과 순수성을 유지하고 지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과 계명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다.
세상 끝날 까지 율법과 계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에 친교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경건함이 없는 친교는 참된 신앙의 길이 아닙니다.
성지순례인지 여행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면 그것은 이미 성지순례가 아닙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몇 번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를 이끌었던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방인을 위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과 헌신은 사도행전과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 권력에 대한 유혹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본과 재물에 대한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세상과 타협하려는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권력이라는 우상을 섬기려는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내 안에 있는 나태함과 교만을 끊어내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주님께 대한 열정이 뜨겁게 타오르도록 청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좋은 인간관계? 직장에서 좀 더 많은 권한과 자유? 더 나은 새 직장? 좀 더 자상한 배우자? 아기의 탄생? 회춘? 공부 잘하는 자녀? 질병이나 장애의 치유? 더 많은 시간?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알아내는 것? 등등….
대부분 이런 문제가 해결되면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의 연구 결과는 이런 요소들로는 행복해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행복해지길 바란다는 점에서 볼 때,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마틴 셀리그만 교수는 우울증 환자에게 행복감을 높이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그날 있었던 좋은 일 세 가지씩을 기억해서 적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94%가 증세의 호전을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찾는 첫 단계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에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좋은 일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즉, 일상의 삶 전체가 자기 행복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굳게 믿고 열정을 키우는 것입니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소로 유전적 요소, 환경적 요소, 의지적 활동을 뽑습니다.
이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50%의 유전적 요소입니다.
그리고 의지적 활동이 40%, 환경적 요소가 10%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인 60%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40%인 의지적 활동으로 나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침팬지와 99% 유전자가 같지만 다른 1%의 유전자의 차이로 침팬지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40%라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비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바꿀 수 없는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에 계속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의지적 활동을 열정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짜 행복을 일상 삶 안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그는 초대 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지요.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지만, 회심한 뒤에 열정적으로 주님을 세상에 선포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의 주님 말씀을 가장 잘 실천하는 사도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유전적 요소, 환경적 요소에 매여 있지 않고, 의지적 요소에 열중해서 주님을 굳게 믿고 따랐기에, 하느님 나라에서 큰 영광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의지적 요소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듯 진정한 회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유전적 요소, 환경적 요소에 매이지 않고, 열정을 다해 자신의 의지를 세워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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