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어느 한 때 박인희의 시 낭송을 방송에서 듣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나 이수익의 <우울한 샹송> 유치환의 <행복>을 들으며 시인을 꿈꾸고, 그래서 시인이 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때는 박인희의 시를 들으면서 사색에 잠겼던 소년 소녀들이 박인희처럼 아름다운 시를 낭송하고 있다. ”좋은 시란 무엇인가?“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살아온 내력이 다르고 저마다 공부한 배경이 다르고, 저마다 감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좋은 시 한 편이나 몇 소절은 사람이 마음의 뒤 흔들기도 하고, 인생의 항로를 바꾸기도 한다. 좋은 시를 읽어야 하고, 좋은 시를 써야 하고, 좋은 시를 낭송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의 자세로 시를 낭송해야 할 것인가?
인류가 이 세상에 살면서부터 시를 지었고, 시를 낭송했을 것인데, 인류 역사상 가장 현명했던 사람, 소크라테스가 <이온>에 나오는 호메로스를 칭송한 글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
”참으로 나는 그대들 음송가의 재주를 부러워해 왔네. 그 까닭은 언제나 화려하게 치장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그대들의 기술에 어울리기 때문이네. 뿐만 아니라 평소에 많은 훌륭한 시인들, 특히 시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가장 신적인 호메로스와 교제하면서 그 말 자체가 아니라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하니, 이런 일이야말로 부러워할 만하지. 그 시인이 말하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도 음송가가 될 수 없는 법일세. 왜냐하면 음송가가 듣는 사람에게 시인의 마음을 전달해야 할 텐데, 시인이 말하려는 바를 알지 못한다면 이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없기 때문이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부러워해야 할 일이지.”
음송吟誦: “시가(詩歌) 따위를 소리 높여 읊음. 또는 소리를 내어 책을 읽음.“ 이라고 <국어사전>에 실려 있는데, 현대인들은 음송을 낭송朗誦이라고 부른다. ”소리 내어 글을 읽거나 외움“이라고 실려 있는 낭송가들이 우후죽순처럼 많은 것은 좋은 현상이리라. 다만 그 낭송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낭송하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오늘 밤에 시 낭송과 문화행사를 곁들인 문화공연이 전주에서 있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며 참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