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북구 만덕5 주거환경개선지구의 모습. 이곳에 살던 1600여 가구 중 300여 가구는 '이주하라'는 통보를 받고도 오갈 데가 없어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다. 김화영 기자
- 치솟는 집값 못 따라가는 보상가 - 원주민 재정착률 고작 10% 그쳐 - 보증금만 받고 내쫓긴 세입자들 - 부실한 보호대책 속 벼랑 끝으로 - 부산 쪽방 거주자 2년새 57% ↑
- 2009년 '용산참사' 겪은 서울시 - 재개발·재건축지역 원주민 위해 - 임시 거주할 수 있는 주택 건설 - 5개 권역 5000가구 공급 예정 - 부산은 서구에 119가구 뿐
부산의 도시정비사업 예정지는 1월 현재 254곳이다. 전체 주택의 20%에 가까운 19만 가구가 이곳에 사는 것으로 부산시는 추산한다. 전면 철거 형태의 재개발·재건축은 원주민을 내쫓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을 낳는다. 부산발전연구원이 2009년 금정·영도·사하·서구의 뉴타운 예정지 주민(4만5653명)들을 대상으로 가구주의 직업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더니 무직이 부산 전체 실업률 4.3%(2009년 기준)를 크게 웃도는 21.4%에 달했다. 가구당 소득도 100만 원 미만이 27.13%로 나타났다. 도시정비사업장의 원주민 재정착률이 10%안팎에 그치는 이유다.
동의대 강정규(재무부동산학과) 교수는 "부산은 매년 재개발·재건축으로 1만 가구 안팎의 이주민이 쏟아져 나오면서 집값과 전셋값이 동반 상승하고 있다. 재개발이 끝날 때까지 이주민이 살 수 있는 순환형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확대해 최소한의 주거 안전망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잠재적 재개발 난민 19만 가구
지난 16일 오후 부산 북구 만덕5 주거환경개선지구. 굳게 닫긴 현관문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붙인 관리번호가 적혀 있었다. 주민들이 빠져나간 골목길엔 "똥값 보상 웬말인가" "갈 곳 없다! 만덕 주민"과 같은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가 찬바람에 나부꼈다.
한때 1600여 가구가 살던 이곳에는 현재 오갈 데 없는 300여 가구만 남았다. 적은 보상금 탓에 새 집을 구하지 못한 주민이 대부분이다. 만덕주민공동체 최수영(51) 대표는 "부산 아파트 매매가는 3.3㎡당 1000만 원에 육박하는데 이곳의 보상가는 평균 400만 원 남짓이다. 이 돈으로 어디서 집을 구하겠느냐"고 하소연했다. 2011년 LH가 보상금으로 책정한 금액은 총 1659억 원. 가구당 1억 원이 조금 넘는 액수다. 최 대표는 "재개발이 끝나면 원주민이 재정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가 부당한가"라고 반문했다.
세입자들도 반발하기는 마찬가지. 김모(68) 씨는 LH로부터 이달까지 방을 빼지 않으면 강제집행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집주인은 이미 1년 전 이주했다. "전세보증금 2300만 원밖에 없는데 어디를 가겠어. 소득이 없는데 월세를 내고 살 수는 없잖아. 영구임대주택을 알아봤더니 무작정 기다리라고만 해. LH는 공기업이라면서? 정부가 나를 내쫓다니…." 김 씨는 "배신을 당했다"며 가슴을 쳤다.
이곳 주민 상당수는 과거에도 철거를 당한 경험이 있다. 영도·동·남구 고지대에 살다가 1975년 국민주택 건설 정책으로 집단 이주했기 때문이다. 최 대표는 "젊어서 주거 생존권을 지키겠다며 목숨 걸었지만 뜻대로 안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입자 보호정책은 부실하다"고 씁쓸해했다.
지난해 12만 명의 청약자가 몰렸던 부산 금정구 '장전래미안' 재개발지구도 사정은 비슷하다. 세입자 600여 가구는 쫓기듯이 이주했다. 보증금 3000만 원을 빼 이사를 한 최모(42) 씨는 "소득은 그대로인데 전세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나같은 비정규직은 월세 50만 원 주고나면 저축이 불가능하다. 언젠가 쪽방으로 내쫓길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안고 산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새정치민주연합 남윤인순 의원에게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부산의 쪽방 거주자는 2011년 525명에서 2013년 827명으로 57%나 증가했다.
■순환형 임대주택 공급 늘려야
재개발·재건축지역 세입자는 대부분 기초생활보장수급자거나 차상위계층이다. 국제신문이 2009년 12월 현재 부산 재개발사업 예정지 190곳과 기초생활수급자 주거지를 비교·분석했더니 전체 수급자의 86%인 11만8921명이 재개발구역이 속해 있는 74개 읍면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낙후된 노후불량 주택을 끼고 사는 빈곤층이 그만큼 많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재개발 난민을 위한 대안 중 하나는 순환형 임대주택이다. 서울시는 2009년 '용산참사'가 발생하자 이듬해 재개발이 끝날 때까지 원주민들이 임시로 거주할 수 있는 순환용 임대주택 건설에 나섰다. 올해까지 5개 권역에 5000가구가 공급될 예정이다. 순환형 임대주택은 국민임대아파트처럼 월소득이 도시근로자 소득의 70% 이하인 가구주에게 입주권을 준다.
부산에서 순환형 주택은 2013년 완공한 서구 남부민동 '남부민 폴리페 아파트' 한 곳뿐이다. 전체 782가구 중 119가구가 순환형 주택이다. 임대료는 36㎡형 기준으로 보증금 1660만 원에 월 임대료 23만 원이다. 보증금을 많이 내면 임대료가 내려간다. 최근 서구 동대신동과 서대신동의 재개발 사업이 활기를 띠면서 지난해 12월 40가구가 추가 계약을 하는 등 순환형 주택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동서대 김종건(사회복지학) 교수는 "부산도 4, 5개 권역으로 나눠 순환형 주택을 추가 공급해야 한다. 대규모 순환주택 공급이 어렵다면 부산 사상구의 디딤돌하우스처럼 빈집을 리모델링해 철거민들에게 임대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부산발전연구원 이정헌 선임연구위원은 "재개발을 주민 중심의 도시재생으로 전환해야 한다. 주택 정책도 '자가 보유'에서 벗어나 선진국처럼 '임대 활성화와 세입자 보호'로 전환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 재개발 사업장 임대주택 비율 35% 줄인 부산
- 공공임대 비중 전국 최하위, 저소득 세입자 주거권 뒷전
공공임대주택 공급 방식은 크게 임대주택 건설과 기존 주택 매입으로 나뉜다. 재개발 사업장에서도 임대주택 수요가 발생한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따르면 국가나 자치단체는 재개발 가구수의 5~20%(연면적 기준 3∼15% 범위)를 건설사로부터 매입해 임대주택으로 공급해야 한다. 재개발 사업장이 많으면 재정 부담으로 연결될 수 있다.
2011년 당시 재개발지구가 184곳이던 부산시는 도시정비법 개정에 나섰다. 국토교통부에 8.5%(광역시 기준)이던 임대주택 의무 건립 비율을 5%로 낮춰달라고 요구했다. 개정안은 2012년 국회를 통과했다. 그 결과 부산의 재개발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임대주택이 2만 가구에서 1만2941가구로 35% 정도 감소했다.
당시 부산시는 '저소득 세입자들의 주거안정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임대주택 전체 매입비는 2조 원가량으로 추산되지만 적립된 도시정비기금은 1600억 원에 그쳐 어쩔 수 없다"고 해명했다.
정부도 주택 건설경기가 위축될 때마다 임대주택 건립 비율을 손봤다. 지난해 '9·1 부동산 대책'에서는 임대주택 연면적 기준을 폐지했다. 또 재개발 임대주택 가구수 기준도 가장 높은 비율을 5%포인트씩 낮췄다.
부동산서베이 이영래 대표는 "임대주택 의무공급 비율을 줄인 것은 사업성을 개선해 건설사의 참여를 유도하겠다는 의도로 보이는데 그 정도로 재개발·재건축 시장이 활성화될지 의문"이라며 "오히려 서민층의 주거안정을 해치게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사회복지연대 박민성 사무처장은 "공공임대주택 비중이 전국 하위권인 부산시가 역주행을 한 셈"이라면서 "재개발로 쫓겨난 세입자들이 살 곳이 사라지면 사회 불안이 가중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