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tAAoHrTf_w8?si=1VIM-baX3QkcsDNJ
보케리니(L. Boccherini;1743∼1805)의 『기타와 현악을 위한 5중주 4번 라장조, G.448』중 제3악장의 뒷부분 판당고(Fandango)입니다. 판당고란 3박자로 된 빠른 형태의 에스파냐 춤곡을 말합니다. 보케리니는 본디 이탈리아 사람이지만, 파리 체재 중 만난 에스파냐 루이스 황태자의 후원을 받게 되자, 오랜 동안 에스파냐에서 음악활동을 계속할 기회가 생겼습니다.(결국 말년에는 마드리드에 눌러 앉아 버렸다.)
이 곡을 쓴 동기에 대해 보케리니는, "당시 왕실 기타리스트인 바실리오 신부가 루이스 황태자를 위해 스카를랏티의 판당고를 멋지게 즉흥 연주하는 것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그것을 본떠 작곡하였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에스파냐의 민속음악은 확실히 어느 정도 보케리니의 음악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수 있습니다. 첼로 연주에 능숙했던 그가 기타란 악기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디 이곡은 1788년에 작곡한 [두 개의 첼로를 위한 5중주,op.50-2]의 첫 악장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그가 만든 12개의 기타 5중주곡 중 첫 곡 라장조 3악장에서 다시 인용하였다. 3악장 첫머리 서주의 성격을 띠는 그라베 아싸이(Grave assai)에 이어, 빠른 템포의 판당고는 기타의 힘찬 라스기아도 주법과 첼로의 쉼 사이에 타악기인 캐스터네츠를 울려주어 에스파냐 냄새를 더욱 강렬하게 맛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곡에 대한 대표적인 음반으로 우선 에스파냐 출신의 기타리스트인 페페 로메로가 실내악단과 협연한 연주(성음Philips라이선스-LP와 수입직판-CD)가 단연 손꼽히는데, 리드미컬한 캐스터네츠와 기타 연주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그 밖에 예페스의 연주(성음Gm.라이선스 LP와 CD)와 동구권 음반으로 처음 수입 소개된 젠더의 연주(Hungaroton 수입직판-CD)가 있으며, 3악장만을 기타와 하프시코드를 위한 서주와 판당고로 편곡하여 줄리안 브림이 연주(서울RCA라이선스-LP)한 음반도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이탈리아 출신 보케리니가 에스파냐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만든 에스파냐적인 음악-판당고를 들으시면서 첼로 곡 이외의 또 다른 보케리니의 모습을 느껴봅시다. 물론 에스파냐 민속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단편일 수도 있고.
글출처 : 음악과 산책방에서 발췌
Fandango
18세기 초엽에 발생하였다. 플라멩코음악에서도 대표적인 것으로 춤은 대개 캐스터네츠를 손에 든 한 쌍의 남녀가 기타와 노래가 교체되는 반주에 맞추어 춘다. 음악은 빠르거나 또는 보통 속도의 3박자이며 말라게냐(말라가지방) ·그라나디나(그라나다지방) ·무르시아나(무르시아지방) 등은 모두 판당고가 지방에 따라 변화한 것이다. 18세기 후반 글루크가 발레 《돈환》(1761)에서, 모차르트가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1786)에서 판당고의 선율을 쓰고 있으며 근대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 알베니스, 그라나도스, 파야 등이 그들의 작품 속에 이를 많이 도입하고 있다.
Boccherini, Luigi [1743.2.19~1805.5.28] 이탈리아의 작곡가 ·첼로 연주자. 국적 : 이탈리아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루카
콘트라베이스 주자인 아버지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은 후, 1757년 로마에 유학하였다. 그 후 첼로 주자로 독립, 바이올린 주자인 만프레디와 연주여행을 하여 파리 등지에서 호평을 받고 이어 에스파냐의 궁정악사가 되었으나, 1787년 이후는 베를린에서 궁정작곡가로서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위한 작곡에만 전념하였다. 프로이센왕 사후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갔으나 에스파냐궁정의 냉대로 빈곤 속에 마드리드에서 죽었다. 전에는 미뉴에트만으로 알려졌으나 오늘날에는 교향곡, 첼로협주곡, 현(弦) 또는 현과 피아노를 위한 실내악 등의 작품을 통하여 F.J.하이든을 잇는 세대의 고전파작곡가로 높이 평가된다. 보케리니는 이태리의 Lucca에서 성악가와 콘트라베이스 주자였던 아버지 레오폴드 보케리니(Leopold Boccherini)의 일곱 자녀 중 세 번째로 태어나 아버지 밑에서 기초적인 작곡과 첼로를 배웠다.
1757년 공부를 위해 로마에 가 코렐리와 팔레스티나 음악을 접하고 감동을 받는다. 1761년 다시 루카로 돌아와 시 관현악단의 첼로주자로 일하며 당시 바이올린 주자였던 만프레디(Filippino Manfredi)와 같이 빈, 파리등 유럽의 주요 도시로 연주여행을 다녔다. 그들의 연주는 노래하듯한 아름다운 소리라는 반응을 얻으며, 작곡가로서도 명성을 얻는다. 두 음악가는 1769년 스페인의 Madrid로 갔고, 보케리니는 스페인 왕자의 후원을 받게되어 그를 위해 실내악 곡을 남긴다. 왕자의 죽음(1785년) 이후 그는 몇 년간 스페인 왕의 오르간 주자로 일하나 1787년부터 첼로를 연주했던 독일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Friedrich Wilhelm II) 밑에서 궁정작곡가란 칭호를 받으며 1797년까지 봉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 그는 궁핍한 환경에서 작곡생활을 하며 마드리드에서 생을 마친다. 그의 유골은 1927년 출생지인 루카로 옮겨졌고 성 프란체스코(Francesco) 교회에 영예롭게 안치되었다.
그의 작품양식은 전형적인 이태리 기악음악과 당대의 표현 양식을 보여준다. 그는 갈랑 양식의 선율과 비르투오스한 기법을 잘 융합하고 섬세한 다이내믹 기법을 살렸다. 그의 선율은 단순하고 우아하면서도, 힘있고 격정적인 표현도 지니고 있다. 그는 하이든의 영향 없이 독자적으로 현악4중주 기법을 이루었으며, 첼로 부분이 자주 테너 음역에서 부각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후기 현악 4중주는 오케스트라 적으로 확장되고 형식과 조성에서 비관습적인 어법을 보여준다. 그의 현악5중주는 특히 모차르트에게 영향을 미쳤다. 6개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Op.5(1768)는 주제적 소재가 두 악기의 성부에 균형 있게 분포되어 서로 대화하듯 진행한다.
그의 작품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널리 애호되었으나, 빈의 기악음악 양식의 발전과 이태리에서의 오페라에 대한 압도적인 관심의 그늘에 가려져 잊혀지다 20세기에 들어와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되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연구되어지고 있다. 그가 남긴 대략 400개에 이르는 작품은 소수의 오라토리오, 칸타타, 미사와 드라마 등의 성악곡을 제외하고 대부분 기악곡을 위해 썼다. 기악곡 중에서도 실내악을 위한 작품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대략 30개의 심포니, 2개의 8중주, 16개의 6중주, 약 125개의 현악5중주, 18개의 풀룻 혹은 오보에 5중주, 6개의 피아노 5중주, 약 100개의 현악4중주, 약 50개의 현악3중주, 12개의 현악2중주, 6개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나타 등이 있다. |
https://youtu.be/Mdr4nETvFKc?si=_usI36Df592BzTBe
글쓴이 : 베토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