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끌어 안고서 흐르는 강이다.
아버지와 내가 화해라면 화해고,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인정하게 된 것은 1981년 12월 31일 새벽이었다.
누구에게나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순간만 떠올리면 잊혀지지 않고 되살아나는 슬픈 장면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도, 또는 세상을 달관한 듯이 산 사람이라도 누구에게나 그런 슬픔의 기억이 한두 가지쯤은 있을 것이다. 1981년 늦 여름 나는 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뀐 안기부에 끌려갔었다. 후에 그 사실을 아신 아버지는 내가 하루만 집에를 안 가도 저녁 내내 잠을 못 이루셨다.
가을이 가고 겨울에 접어들면서 몇 년 동안의 병마에 지쳐 쇠잔해 버린 아버님은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고 있었다. 그 무렵 하던 사업은 거의 문을 닫을 형편이라 저녁에 임실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가 아침 일찍 전주를 올라오는 나날의 반복이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의 한 구절처럼,
“아무리 보아도 헛수고만 하고 허탕만 치는 하루,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소용이 없고 보람도 없는 나날, 아무리 살펴보아도 허무하기 짝이 없고 공전만 거듭하는 희망”
그 때 나는 그런 절망 속에서 그저 허우적대고만 있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28일이던가, 아버님이 나를 불렀다.
“정일아, 소주 한잔만 마시고 싶구나.”
예상치 않았던 아버지의 말이었다. ‘간경화에는 술이 안 좋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때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들어오는 길에 소주 한 병을 사 가지고 와서 따라 드리니 한 잔도 못 드시고
“못 먹겠구나.” 하셨다.
그 다음날인 29일은 내 생일이었다. 아버님이 위독해지기도 했지만 어머니도 마음이 심란해서였던지, 내 생일조차 잊으셨는지 아침상엔 미역국도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내 생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밥을 뜨는 둥 마는 둥하고 있는데,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이 한 마디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나 꿈꾸었는데, 이빨이 우수수 다 빠져버렸어,” “그래, 나 죽을 랑 갑다.” 아버지의 힘없는 말씀에 당황한 어머니가 한 마디 거들었다.
“아니, 그런 꿈은 아주 재수 좋은 꿈이라더라.”
아버지는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12월 30일 아침 7시쯤, 토방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의 기어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일아 오늘은 빨리 돌아오너라.”
나는 그 말을 못들은 체 신발만 신고 있었다. 아버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정일아 오늘은 빨리 돌아오너라.”
집을 나서며 나는 예감했다. 오늘 아버님에게 무슨 일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건성으로 “예”하고 대답하고서 집을 뛰쳐나왔다. 그날따라 통학열차의 경적 소리가 왜 그리 서글프게 들렸는지 모른다. 거리는 송년준비로 떠들썩했지만 내 마음은 어수선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하루 종일 가게에서 죽음에 관한 음악만 들었다.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곡 <죽음과 소녀>와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교향곡>중 2악장인 장송 행진곡 그리고 슈베르트의 <장송소나타>와 포레. 모차르트. 브람스의 <독일 진혼곡>브라암스의 <4번 교향곡> 등이 그날 내가 들었던 음악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날 집에 간다는 사실 자체가 어찌나 싫었던지, 집에 갈 시간이 되어도 음악을 끄기가 싫었다.
동생에게 “네가 오늘 하루만 갔다 오거라.”하고 말했지만, 동생 성현이는 막무가내로 안 간다고 하는 것이었다. 미적거리다가 겨우 막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시간은 10시를 넘겨서였다. 내일 아침 통학차를 탈 돈을 남기자,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귤 세 개 살 돈만 남아 있었다. 겨우 세 개를 사 가지고 뛰어가다시피 해서 집에 들어섰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이제 막 잠드셨다. 너 안 왔냐고 자꾸 찾드만.”
그 때 흑백 TV에선 ‘금난새’가 지휘하는 송년음악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의 선율이 아버지의 잦아드는 숨소리밖에 없는 밤의 적막을 지우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손을 부여잡자,
“이제야 네가 왔구나.” 하고 눈을 뜨셨다. 나는 아버님을 부축해 앉게 한 뒤 사온 귤을 까서 드렸다. 한 쪽을 겨우 드셨을까.
“눕고 싶다.”
그 말씀이 아버님이 이 세상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아버님이 다시 혼수상태에 빠져드는 시간에 TV에선 마지막 악장인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졌다. 나는 그 때 깨달았다.
‘온갖 고난과 절망의 질곡 속에 한 세상을 사셨던 우리 아버님이 고통의 세월을 거두시고 환희의 세상으로 가시고 있구나.’
그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오직 크나큰 상처를 통해서만 우리 내부로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 맞는 듯싶다.
아버지는 내게 누구인가? 나를 태어나게 했고, 내가 어려울 때마다 나를 다독여주고, 힘을 주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겨우 어머니가 행상으로 마련한 내 중학교 등록금을 두 번씩이나 노름판에서 날린 아버님 때문에 결국 나는 어린 날의 꿈을 접고 험난한 세상의 파고 속을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내게는 앙금으로 남아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럴 기회가 없었던지 몰라도 아버님과 한 번도 속 터놓고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건강하실 때 술 한 잔 따라 드리지도 못한 아버지,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몇 마디 말들을 속 시원하게 하지도 못한 채 아버님이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을 맞고 계셨다.
그 순간, 내가 아버님과 화해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때 내 유년 시절부터 청소년기를 지날 무렵까지 아버님과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파도가 덮쳐오듯 복받쳐 올랐다. “마침내 고통은 간신히 울음에 길을 터준다.”고 노래했던 베르길리우스의 시 구절처럼 나는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버님!”
그 때 그 힘들었던 세월이 어제 일 같은데, 벌써 사십 몇 년여의 세월이 훌쩍 지났다. 그런데도 나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인<합창>을 들을 때마다 그날 그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그 때마다 나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잔하게 밀려오는 슬픔에 눈자위가 붉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기쁨에 대한 추억은 이제 기쁨이 아니다. 하지만 슬픔에 대한 추억은 언제나 슬픔이다.”라는 바이런의 말처럼 정녕 슬픔의 기억은 언제까지고 지워지지 않는 것인가 보다.
다음 날 새벽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시간에 아버지는 결국 이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먼 나라로 가셨다. 당시만 하더라도 집에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전화가 있는 집에 가서 친척들과 동생들에게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세상에 살면서 가장 난처한 경우가 내게 닥쳤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에 대해 슬퍼할 사이도 없이 가장 선행되어야 할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장례 치를 돈조차 없는 한심한 일이 닥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버지가 저축을 했던 신용협동조합이 생각났다.
그 날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뿌옇게 밝아오는데 집을 나서자 웬 눈은 그리도 펑펑 내리고 있었던지, 온통 마을도 길도 눈으로 덮인 그 길을 아버지의 장례 치를 돈을 빌리러 가던 그 날, 그 길, 길에서 길을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그 뒤 오랜 세월이 흘러 아버지와 내가 나눈 추억들을 한 편의 시로 남겼고, 여원 시낭송회에서 배우 하형래씨에 의해 낭송될 때, 세월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끌어 안고서 흐르는 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쌀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내 어린 시절
매일 책만 읽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너는 강태공이 될라고 그러냐.
책에서 쌀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아무 말 없이 책장만 넘기는
내 귓전에 틀리던
한숨 소리.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제 자리를 못 잡고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시기만 했다.
걱정스럽던
그 눈빛에서 묻어나오던
침묵 속의 그 소리!
“책에서 쌀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그리고 아버지는 조금 이른 쉰 일곱살 나이에
내가 책을 써서 자리를 잡는 것,
지켜보지도 못하신 채
훌훌 먼 곳으로 길 떠나셨다.
문득 그 시절이 생각나
먼 곳을 응시하며
“아버지! 책 써서 밥은 먹고 삽니다.”
말씀드려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아무 말도 없으신 나의 아버지. “
하여간 지난 세월이지만 아픈 세월이었다.
2024년 10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