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지 2
고개지는 귀족 가문의 출신답게 벼슬길로 나아갔다. 환온의 밑에서 참군의 벼슬을 하였으나 환온이 죽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때는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벼슬로 나아가기를 반복하였다. 아마도 은거를 할 동안에 그림을 그리지 않았나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림의 이론서를 남긴 것도 이때 였으리라고 말한다. 그는 화론(畵論), 모탁묘법(摹석妙法), 화운대산기(畵雲臺山記)의 저서를 남겼다.
53세 때는 형주자사 은중감의 참군이 되었다. 은중감이 황현에게 패하야 전사하자 그는 다시 좌절에 빠졌다. 2년 뒤에는 산기상시의 벼슬에 올랐지만 2년 뒤에 즉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405년)
이 시대의 미술 공부는 전문적인 양성 기관이 없었다. 선생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도제 제도에 의하여 그림을 배웠다. 자연히 스승의 기법을 익히고, 스승의 화풍을 따르는 사승 관계가 형성되었다. 고개지의 경우를 보면 조불흥 - 위협 - 고개지 - 육탐미를 사승 관계에 의한 계보로 본다. 아마도 그림의 양식도 닮았으리라 추정한다.
고개지의 제자인 육탐미도 명성이 아주 높았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육탐미의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림도 남아 있지 않다. 인물화를 잘 그렸다고 전해온다. 이 시대의 그림을 알기 위해서는 고개지의 그림을 중심으로 공부를 해보자.
고개지의 작품으로 전해오는 것은 여사잠도(女史箴圖), 낙신부도(洛神賦圖), 열녀인지도(烈女仁智圖)가 있다. 세 그림은 모두 두루마리 양식이다. 두루마리 양식은 고개지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양식이라고 말한다. 이중에 산수화의 배경을 그리므로 중국 산수화의 시원으로 일컫는 그림은 낙신부도이다. 그러나 고개지의 그림에서는 인물화 중심인 다른 그림도 다루어보겠다.
고개지가 그림을 그릴 때의 붓 사용법에는 춘잠토사(春蠶吐絲)라는 묘사법을 만들었다. 선의 굵기가 일정하고 가느다른 선이 마치 누에가 실을 토하는 듯 하다 하야 븥인 이름이다. 고개지는 인물화를 그릴 때 끝이 뾰족한 붓을 사용하여 가느다란 선을 그었다. 특히 옷의 주름을 표현할 때 많이 사용하였다. 불교가 유행하면서 사원 벽화를 많이 그렸다. 불화에는 인물화를 많이 그렸으므로 고개지의 선묘법은 육탐미와 더불어 사원 벽화에 하나의 양식을 만들었다.
고개지의 그림으로 전하는 여사잠도와 열녀인지도에는 춘잠토사의 선묘를 많이 사용하였다. 이를 또한 철선묘(鐵線描)라고도 하였다.
線描 -- 그림을 그릴 때의 기본은 線과 色을 사용한다, 線으로 그리는 그림이라 하겠다,
鐵線描 -- 그림을 그린 線이 철사처럼 굵기가 일정한 것
춘잠토사 -- 봄 누에가 토한 실처럼 그림을 그린 선이 굵기가 일정하고, 길게 이어지는 선묘법이다.
고개지 뿐 아니고, 인물화는 주로 선묘법으로 그린다. 이후 계화라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