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이 사내의 육중한 몸놀림에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지자 사내는 고의임이 분명이 드러나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실수로 그랬다는 듯 어색한 헛기침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진 여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듯 부드럽게 왼손을 뻗어내리지만 이미 사내의 속내를 파악하고 있는 여인은 사내의 손은 거들떠보지도 않은채 더러워진 치맛자락을 털어내며 홀로 일어섰다.
고운 보랏빛 치맛자락이 흙으로 더럽혀진것이 기분을 상하게 만든것인지 여인은 새침맞게 사내의 눈을 흘깃 노려보며 이내 그 눈길을 거두고는 발걸음을 돌려 사내의 눈에 그녀의 등이 담기게 하였다.
기분이 상하기는 사내 또한 마찬가지 였다.
여인에게 거절당한 무안함에 얼굴이 시뻘개진 사내는 콧대높던 자신의 자존심을 무너뜨려버린 저 여인에게 이상한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여랑!"
사내의 거친 대답에 여랑이라는 여인은 마치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응시하였고 한낱 여인에게 멸시의 눈길을 받은 사내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사람의 성의를 그리 무시해도 되는 것 이오?"
사내의 말에 여랑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누가 봐도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지나가던 시정잡배가 보아도 사내가 여인에게 관심을 끌기위해 일부러 부딪혀 넘어뜨려놓고서는 손을 내밀어 인연 한줄기라도 만들려는 속셈이 훤하였는데 성의를 무시해도 되는 것이냐고 반문을 하다니 여인의 입장에서는 기가 찰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랑은 그 모든것을 자애롭게 인내하고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그저 자신의 길을 가려 묵묵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불같은 성정을 지닌 사내는 무례하게 짝이 없이 여랑의 손목을 휘어잡았고 사내의 무력을 그녀에게 행사하자 팔목이 뻐근하게 아려오는 고통에 여랑은 하얀 미간을 찌푸리며 사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리 무례하게 굴어도 되는것이오?"
사내의 눈빛은 이미 수치스러움에 가득 젖어 이성을 잃고 행동하고 있었다.
"길가던 여인을 일부러 넘어뜨리는것은 무례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사내의 불타오르는 눈빛에도 전혀 굴하지 않은채 너무 강하지 않게, 허나 너무 순해보이지 않게 위엄있는 말을 사내에게 또박또박 내뱉는 그녀에게는 총명한 기가 넘쳐 흘러보였다.
"뭐, 뭐라?"
여랑에게 자신의 속내를 들킨 사내는 뜨끔하여 도둑이 제발 저리듯 오히려 성을 내었다.
"내가 언제 너를 일부러 넘어뜨렸느냐?"
이미 머릿속에 생각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사내는 여인에 대한 예를 지키지 않고 막말을 내뱉으며 자신의 속내를 알아차린 여랑의 말에 괜히 속이 상해 억지로 우겨대었다.
"배우신 선비이시라면, 최소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부정은 하지 마셔야지요"
여랑의 말에 할말을 잃어버린 사내는 한낱 여랑따위에게 멸시를 당하고 굴욕을 당한것이 억울하고 분하여 여리고 여린 그녀에게 막말을 마구 퍼부어댔다.
"고작 역관 따위의 여식인 주제에 좌의정의 장남인 내게 대들다니, 네가 니 부모 돈만 믿고 날뛰는구나!"
여랑의 선홍빛 입술이 하얀 치아의 의해 맞물려져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신분의 굴레에 속할수 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뜨거운 한맺힌 핏방울이 그녀의 가슴속에도 맺힌다.
여랑은 신분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꺼낼수 없어 그거 조용히 침묵만 유지할 뿐이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내 첩이나 되거라!"
"싫사옵니다"
여랑은 좌의정의 장남인 민서후 때문에 요새 계속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단지 허상뿐인 자신의 외상의 반한 민서후는 그녀에게 계속된 애정공세를 펼치고 있었고 그녀는 돈으로만 모든것을 해결하려는 그가 싫었으며 좌의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누군가에 대한 배려따위는 눈꼽만치도 찾아볼수 없는 무례한 그가 죽기보다 더 싫었고, 자신의 신분으로 하루 이틀 넘게 희롱하는 이 사내의 자태는 정말 꼴보기 싫었다.
그의 첩이 될바에야 차라리 길가던 시정잡배 아무나 한놈 잡고 자신의 몸을 내어줄것이라고 그녀는 수없이 다짐했다.
"어찌하여 항상 나를 거부하려 드는게야!!"
사내는 주변사람들이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려 여린 두팔을 자신의 팔로 옭아매고 그녀의 얼굴을 한손으로 우악스럽게 잡았지만 어떻게든 그에게서 벗어나려 도리질 치려는 그녀와 실랑이가 벌어졌고 지나가는 이들은 대놓고 바라보지는 못해도 힐끔힐끔 그들을 곁눈질로 쳐다보고 있었다.
여랑은 수치스러웠고 또 당황하였다.
이 사내가 아무리 무례한 사내라고는 하나 그래도 명문가의 자식이어서 자신을 힘으로 제압하려고 하지는 않을거라 그리 판단했고 또 여태까지 그런 일은 없었기에 이러한 추잡스러운 짓까지 할꺼라고는 생각 못했지만 이 사내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례하고 추잡스럽기 그지 없는 사내였다.
"싫어!"
마음속으로 누군가에게 제발 도와달라고 간절히 외치고 있는 그 순간 푸른 도포에 검은갓을 쓴 사내가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났다.
"이리 벌건 대낮에 여인을 희롱하는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고 봅니다만."
낮고도 위엄있는 목소리가 여랑의 귓가를 간질였다.
여랑은 사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간질 간질
마음 한 구석이 이상스레 간질거림을 유발하며 답답함을 토로하는것만 같았다.
그 선비의 목소리에 사내는 여랑을 희롱던 것을 멈춘채 분노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사내를 주시하지만 선비는 여유롭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려 사람을 깔보는 듯한 미소를 지은채 사내에게로 한발짝, 한발짝 다가간다.
"거, 고 여인의 손 좀 놓으시는 것이 어떨지?"
선비의 상당히 반항적인 말투에 사내는 여랑을 내팽겨진채 선비에게 달려가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휘어잡지만 선비의 키는 6척이 넘는 장대한 키로 사내는 되려 선비의 멱살을 잡는것이 힘에 부쳤다.
"네놈이 뭔 상관이야!"
선비는 자신의 멱살조차 잡는것이 힘에 겨워보이는 사내의 아등바등거리는 모습이 그저 웃음만 나올뿐이었다.
"내 멱살도 좀 놓아주고"
선비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을 건넸지만 사내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자 선비는 자신의 멱살을 쥐어잡고 있는 사내의 손을 떼어내려 하는것인지, 그가 사내의 손을 움켜쥐자 사내는 손이 바스라지는듯한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지만 선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의 손을 꺾어버린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사내는 담습을 엄습해 오는 고통에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거, 그러게 처음에 놓으라 할 때 놓았으면 이리 되지도 않았을것을..."
선비는 안타깝다는듯한 표정으로 바닥에서 구르는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손에 더러운것이 묻은 취급하며 손을 탁탁 털어낸다.
그런 선비의 모습에 겁을 먹은것인지 바닥을 구르던 사내는 이미 36계 줄행랑을 달려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여랑은 짧은 순간안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하고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것만 같았다.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것도 벌어졌지만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간질대는 느낌에 더욱 머릿속이 모두 지워진것만 같았다.
"괜찮은 것이오?"
선비가 한발로 땅을 지탱하며 몸을 돌려 여랑을 쳐다보자 둘은 서로를 마주하였다.
선비는 여랑을 보고는 숨이 멎는듯만 하였다.
풍성한 보름달처럼 자리 잡은 고운 이마, 날카로운 얼굴선과 콧날은 새침한 여인의 자태였으며 아리따운 뺨에는 은은한 붉은 노을빛이 어리어 있었다.
호수처럼 동그란 눈동자로 상대방을 깊게 응시하는듯한 심연의 밝은 눈동자는 물결에 비친 가을 햇살과 같았으며 부드럽게 자리한 입술은 꼭 베어물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맑은 선홍빛이었다.
게다가 정갈히 정리된 고운 머리칼에 옥과 산호로 조각한 매화옆꽂이는 너무 화려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너무 수수하지도 않고, 보랏빛숙고사치마와 백자처럼 하얀 물항라 저고리는 순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천연스레 수려하고 찬란한 미모에 한층 빛을 발하였다.
여랑또한 선비를 보고는 숨이 멎는듯만 하였다.
옥골이 장대하며 기품있는 풍채가 넉넉하여 당당하였고, 옥으로 깎은듯한 날렵한 콧대와 서늘한 턱선, 길게 위로 솟은 속꺼풀에 봉황같은 눈매가 수려하기도 하였으나 사내다운 외모라고 하기보다는 아름답다고 칭송해야할 것 같았다.
또, 외상이 하얗고 입술이 붉어 아름다워 보인다고 말할수도 있었으나 꼭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하늘의 기운인 천기(天氣)가 얼굴에 서려있었으며 저절로 고개를 조아리는듯한 서릿발같은 당당한 총기를 품은 매서운 눈빛이 한나라의 한신같은 사내다움이 묻어나오기도 하였다.
서로를 보고 넋 놓아 허공으로 부서지던 눈빛들이 교차되자 둘은 수줍음을 타는지 서로 반대쪽으로 고개만 살포시 돌리며 괜한 헛기침을 해댔다.
"흠! 저, 도와주신것에 대한 은혜를 갚고자 하옵니다."
"혹,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면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도와드리겠나이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나 따질것은 조목조목 따지고 후환 없게 만드는 언사까지 덧붙일줄 아는 여랑의 총명함에 선비는 내심 감탄한다.
무언가 이 여인의 총명함을 더욱 엿보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선비의 마음에 피어올랐다.
"그럼, 사흘뒤 미시에 이곳으로 나와 주실 수 있으신지..."
"오기만 하면 되는것으로 충분히 소저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만"
두번의 만남을 청하는 이 선비의 청에 보통 같았으면 거절하였겠으나, 자신을 구해준 일때문인지 선비에게 믿음이 생긴 여랑은 흔쾌히 제안을 수락한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여랑은 선비에게 간단한 목례를 마치고는 뒤돌아서 자신의 본디 갈길을 하려하였으나 선비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건지 그녀를 불러세운다.
"잠시만!"
선비의 말에 여랑은 고개를 돌려본다.
"내 이름은...명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소?"
선비의 말에 여랑은 싱긋웃으며 그를 쳐다보는데, 그 자태가 실로 기이한 것이 새벽의 이슬보다 가녀리나 모란꽃처럼 흐드러지게 피는듯한 아름다움에 온마음이 내려앉는듯한 야릇한 기분을 선비는 느꼈다.
첫댓글 여인은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