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11월 30일 월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1독서 : 로마 10,9-18
복 음 : 마태 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믿음의 여정
-부르심, 버림, 따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11위령성월의 마지막 날이자 또 대림 제1주간 월요일인
오늘 11월30일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베드로의 동생으로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한 안드레아 사도의 그리스어 이름 뜻은
‘사내다움’, 또는 ‘용기’라 합니다.
형과는 달리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로 러시아에 최초로 복음을 전했으며
러시아는 물론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오늘 아침 성무일도 두 번째 아름다운 후렴이 안드레아의 인품을 잘 묘사합니다.
“안드레아는 꽃다운 향기와 같아, 주님이 사랑하셨도다.”
특기할 것은 동방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60년경 그리스의 파트라이에서 X자형 십자가위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안드레아는 형장에 끌려갔을 때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쳐들면서 기도를 바쳤다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올려 주님의 곁으로 가게 해 다오.”
바로 여기에 근거한 오늘 아침성무일도 즈카르야 후렴입니다.
사도의 십자가 X자형은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 글자이고
자기는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를 택할 수 있는 자격이 없기에 X자형 십자가를 택했다 전해지며,
스코틀랜드의 국기나 영국 국기에 새겨진 X는 수호성인인 안드레아를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안드레아를 포함한 어부 넷이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이들의 예수님과의 만남이 참으로 운명적이요 결정적입니다.
이들을 보자 첫눈에 반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곧바로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믿음의 여정에 오릅니다.
부르심, 버림, 따름이 일거에 이루어집니다.
마침 지난 토요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8개국에 걸친 13명의 추기경을 임명했는데
강론은 마르코 복음 중 야고보와 요한에 대한 일화였습니다.
즉 교황님은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르기를 원한다.
그러니 추기경들 역시 복음의 제자들처럼
내 길이 아닌 언제나 주님의 길 위에서 머물러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스승이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자들의 순종이 뒤 따랐고,
둘째 제자들은 주님의 협조자와 하늘나라의 증인으로,
또 그분의 수확의 일꾼으로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런 믿음의 여정을 통해 제자들은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짐으로 주님을 닮아 주님의 현존이 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따름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나 이제나 예수님의 제자됨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됩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 충실한가 묻게 됩니다.
한 두 번의 부르심이, 자기를 버림이,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 살아 있는 그날까지 깨어 부르심, 버림,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의 여정을 통해 주님과 우리의 사랑의 우정도 날로 깊어질 것이며,
사실 주님과 깊어져 가는 우정의 사랑 관계보다 더 소중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드레아도 제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따랐으며
이런 순교의 죽음은 늘 우리를 감격케 합니다.
추기경들의 붉은 옷이나 모자도 순교의 붉은 피를 상징합니다.
오늘 제1독서 바오로의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여정 중에 매일 미사 중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공부하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말씀공부와 더불어 튼튼해지는 믿음이요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오로의 믿음에 대한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1. 믿음은 설교자들이 선포하는 구원의 기쁜 소식에 대한 응답이다.
2. 믿음의 본래의 대상은 그리스도의 신비이다.
3. 믿음은 복음에 대한 지적 동의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순종이다.
4.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런 믿음을 통하여 사람을 의롭게 만드신다.
5. 믿음을 통한 의화에서 아브라함에게 내린 약속이 완수된다.
6. 믿음을 통하여 받는 의로움은 동시에 죄의 용서이고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이다.
7. 믿음은 참다운 깨달음이기는 하지만, 이 지상에서는 완전히 빛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중에 가서야 분명히 볼 수 있게 된다.
그때를 기다리는 동안 믿음은 희망과 연결되어 사랑으로써 움직이며,
믿음의 여정은 동시에 희망의 여정, 사랑의 여정이 된다.
주님과 우정이 깊어지면서 우리의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날로 깊어질 것이다.
믿음의 뜻이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복음의 네 제자들이나 우리의 성소는 순전히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성소는 우연이 아니 필연적인 하느님의 섭리이기에 부질없는 가정이자 상상입니다만,
만일 복음의 네 제자들이나 우리가 부름 받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런지요.
새삼 주님은 우리의 운명이자 사랑이요 우리 구원의 유일한 출구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성소를 부단히 새롭게 하시고,
당신과의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하시며,
믿음의 여정에 우리 모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터넷에서 배우 차승원 씨와 배정남 씨의 패션쇼 런어웨이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두 분은 모델로 연예계를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일까요? 이들의 런어웨이 장면은 정말로 멋졌습니다.
그런데 이 영상에서는 무대 뒤의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사람,
무대 설치를 담당하는 사람, 진행 담당을 하는 사람 등이 보였습니다.
또 이 패션쇼를 위한 옷을 만든 디자이너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이 패션쇼를 보고 있는 객석의 관객들도 있었습니다.
참 많은 사람이 이 패션쇼를 위해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그 모든 사람이 있기에 빛나는 패션쇼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아무리 카리스마가 있고, 능력이 뛰어나도 해도
온전하게 이 패션쇼를 진행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 도중에 “도저히 못 하겠다.”라고 소리치며 도망칠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일은 함께 이루어져야 더 멋집니다. 그리고 의미도 생깁니다.
종종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실제로 혼자 다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의 힘으로 혼자만 빛나는 때는 없습니다. ‘함께’의 중요성을 다시금 새겨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신데 혼자서 못하시겠습니까?
혼자서 충분하십니다. 오히려 인간 제자들로 인해서 더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 뜻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이럴 바에는 예수님 혼자서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함께’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사람을 제자로 뽑으신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나약함이 가득한 사람을 제자로 뽑으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배와 그물을 버리고 또 가족도 뒤로 하고 따라갑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제자단이라는 공동체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렇게 ‘함께’ 하기 위해서는 속된 욕망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세속적인 행실, 물질적 재산, 육신의 부모라는 애착을 버린 제자들의 모습에서
‘함께’ 하기 위해 지금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것만을 챙길 수 있을까요? 또 자기만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심과 이기심을 모두 내려놓아야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한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내려놓지 못해서 함께하지 못하고, 꽉 움켜쥐고 있어서 분열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는 공관복음에 따르면,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마태 4,19)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인 베드로와 함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특히 <마르코복음>에서는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는 장면에서 등장하며(마르 1,29-30),
예수님께서 성전파괴를 예언하셨을 때에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느냐며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마르 13,3-4).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번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요한 1,35-40).
그리고 형인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소개하고,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요한 1,40-42).
또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는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드렸으며(요한 6,8-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예수님을 만나 뵈러 온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기도 합니다(요한 12,20-22).
한편, 초기의 동방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 사도는 <요한복음> 1장 40절에 근거하여
“맨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프로포클레토스’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흑해 주변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리스의 아카이아 지역인 ‘파트라이’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그는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해지며,
그래서 안드레아의 성화나 성상에는 X자 형의 십자가와 함께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스코틀랜드의 국기에 새겨진 X자는 그 나라의 수호성인인 안드레아를 상징합니다.
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에 모셔져 오다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서 그리스 정교와의 화해의 표시로
그의 순교지인 ‘파트라이’에 모셔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그렇다면, 고기를 낚는 어부와 사람을 낚는 어부는 어떻게 다를까?
고기를 낚는 어부는 살아있는 고기를 죽이기 위해 잡아들이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죄로 죽은 영혼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잡아들입니다.
또 고기를 낚는 어부는 고기를 골라서 낚아 올리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고기가 좋든 나쁘던, 곧 전교대상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낚아 올립니다.
또 고기를 낚는 어부는 자신의 그물을 치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성령의 그물을 칩니다.
곧 자신의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가라는 데로 가며,
그물을 던지라는 쪽으로 던지며, 그분이 명령하는 방식으로 그물을 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고 하신 예수님께 자신을 내맡기고,
먼저 “사람 낚는 어부”로 양성 받아야 할 일입니다.
곧 안드레아 사도가 예수님께서 머무르는 곳에서 밤을 묵어가며 양성 받았듯이,
우리도 먼저 그분과 함께 머물며 그분 안에서 양성을 받는 그분의 제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주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그물이 아니라, 성령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위험하더라도 깊은 곳, 당신이 원하신 곳에 그물을 치게 하소서.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한 사랑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입맛에 맞는 것만이 아니라, 주신 모두를 거두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동생인 안드레아는 요한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형인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아와 베드로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요한 1,42)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름이 ‘반석’이라면 안드레아 사도의 이름은 ‘남자다움, 용기’입니다.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들 또한 용기를 가지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30년 동안 변함없이 바오로 사도의 말을 실천하는 단체가 있습니다.
‘복음화 학교’입니다.
저는 1991년에 복음화 학교와 인연을 맺었으니 29년이 되었습니다.
2002년에서 2005년 그리고 2011년에서 2018년까지 10년 동안 담당 신부로 함께 하였습니다.
복음화 학교는 1단계부터 5단계의 과정이 있습니다.
매월 기도회 미사와 후원회 미사가 있습니다.
단계를 마치면 피정과 미사가 있습니다.
저는 미사에 함께 하였고, 성지순례를 같이 다녀왔습니다.
복음화 학교의 각 단계는 모두 평신도 강사들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졸업생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사람은 강사로서의 교육을 다시 받습니다.
자신이 들었던 복음의 기쁨을 학생들에게 전하는 강사가 됩니다.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강사들은 세상을 향해 던졌던 그물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화 학교는 원하는 곳이 있으면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까지 가서 학교를 열었습니다.
봉고차 안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성당에 가서 복음화 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면 새벽1시가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피곤하다며 힘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다면 못할 일입니다. 돈을 준다고 해도 못할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기쁨이 크기에 먼 길을 기쁘게 다녀 올 수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의 열정과 헌신에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복음화 학교와 함께한 시간은 제게는 기쁨이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려는 평신도들의 열정과 헌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복음화 학교에서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생활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고마워하면 고마운 일이 생깁니다. 기뻐하면 기쁜 일이 생깁니다.”
20,000명이 넘는 사람이 복음화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분들은 기도하는 신앙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봉사하는 신앙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에파타(열려라)”라고 하셨을 때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탈리타쿰(일어나라)”이라고 하셨을 때 소녀는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화 학교를 통해서 닫혔던 신앙의 문이 열렸습니다.
어둠과 절망에서 일어났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복음화 학교와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복음화 학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해 줄 것입니다.
지난 30년처럼 앞으로의 30년도 주님의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복음화 학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큰 바위 얼굴처럼, 동네에 있던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언제나 복음화 학교와 함께 하시는
정치우 안드레아 선생님께도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마태 4,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신앙의 삶을 산다는 것은
안드레아 사도처럼
변화의 삶을
새롭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 이 모두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다.
버리지 않고서는
가벼워질 수 없고
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다.
버린다는 것은
가장 좋으신 주님을
우리가 기억한다는 것이다.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따른다는 것은
방해되는 이 모든 것들을
버린다는 것이다.
버려야 얻을 수 있는
복음의 참된 기쁨이다.
버린다는 것은
내려놓는다는 것이다.
제대로 보기위해
곧바로 내려놓는
오늘의 기쁨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는 버리며
주님을 따라간다.
낡은 감정과
낡은 거짓을 버리고
새롭고 더 나은 삶을
주님 안에서 산다는 것이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버리는 삶이며
따르는 삶이기 때문이다.
얼음은 얼음을 녹이지 못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성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사도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첫 두 제자 중 하나가 됩니다.
분명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무언가 배웠을 것이고
그 단계를 넘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마지막 변화된 모습은 순교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를 선교하던 안드레아는 엑스 모양의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보통 십자가에 못이 박혀도 며칠은 산다고 합니다. 만약 물을 주면 더 살 수도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안드레아 사도는 십자가에서 일주일 넘게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 증언에 수많은 사람이 회개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총독은 창으로 찔러 더는 설교를 못 하게 했습니다.
안드레아 성인이 한 설교 중에 이 십자가에서 한 설교가 가장 감동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감동적인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말이 있고 같은 말이라도 잔소리로 들리는 말이 있습니다.
왜 어떤 힘이 있고 어떤 말엔 힘이 없을까요?
예수님은 안드레아 사도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하시며 믿음을 주셨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나를 따라라”라는 한 마디로 그물을 버리고 따르게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의 한 마디는 이처럼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요?
정신과 의사 ‘다카하시 가즈미’의 『그래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란 책이 있습니다.
다카하시 선생은 ‘사람의 생각은 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 책을 시작합니다.
많은 학자의 의견은 사람은 20세가 되면 생각의 변화가 멈춘다고 합니다.
생각의 변화란 ‘정체성’의 변화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
부모와 형제, 학교, 사회로 확대되며 20세가 되면 성장을 멈춘다는 것입니다.
20세 이후의 삶은 사람의 변화라기보다는 20세 때 형성된 정체성이 성숙하는 과정이라 합니다.
그러나 공자와 같은 분들은 50세가 되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되어 더욱 성장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옳을까요?
다카하시는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우울증을 앓는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여러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스트레스는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이 평상시엔 괜찮은데 술만 마시면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고 했습니다.
술만 마시면 가족에게 마음의 상처를 남기는 남편을 바꿔보려 했지만 잘 안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카하시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시켰습니다.
사람은 변한다는 책을 쓰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마음을 접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그 여인에게 술을 마시다가 남편이 죽어도 간섭하지 말라고 설득했습니다.
그 사람은 어차피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결국 남편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뭉친 근육도 풀리고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 여인의 남편도 술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사람은 물과 같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얼음이고, 어떤 사람은 물이고, 어떤 사람은 수증기입니다.
얼음이 얼음을 녹일 수 있을까요? 얼음은 얼음을 녹일 수 없고 자신 안에 품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먼저 알아야 자신이 얼음을 품을 수 있는 물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물이 된다면 얼음을 녹여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경우는 나도 그 사람과 같은 수준이면서 바꾸려 하기 때문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라서 냉병을 앓고 있던 여인이 남편에 의해 병이 치유된 사례도 있습니다.
고아원에서 자라 사랑을 받지 못한 여인은 온 세상이 겨울이었고 자신의 마음도 그랬습니다.
아마 그것이 냉병의 원인일 것입니다. 한여름에도 방에 난로를 켜 놓아야 했습니다.
남편은 땀띠가 나면서까지 아내와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에 몸이 녹아내렸습니다.
한여름에도 치아를 부딪치는 추위를 느꼈던 그녀가 봄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는 이미 따뜻한 삶을 사는 남편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같은 수준이라면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나 먼저 변하고 상대를 받아들이면 내 안에서 그 사람은 변하게 됩니다.
얼음이 물이 되어도, 물이 수증기가 되어도 분자구조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성질이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열이 가해져야 합니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과 열, 이것이 물의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은총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만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태양이 없으면 모든 것은 얼음으로 변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과 진리를 입은 사람은 안드레아 사도처럼 십자가를 진 사람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하는 말은 누군가의 마음을 녹여 새로운 사람으로 재탄생시킵니다.
얼음은 얼음을 녹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진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따뜻함만이 누군가의 마음을 녹일 힘이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