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金龍澤)-섬진강 32
문득
잠에서 깼다.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은 어머니 생각으로 정신이 번쩍
든다.
어머니의 뒷말을 찾던 아내는 옆에 잠들어 있다.
기운 달빛은 마을을 빠져나가고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는 소슬바람 결을 따라
풀벌레 울음소리가 끊긴다.
문득 생이 캄캄하다.
별빛 하나 없는 밤에도 강을 건너
콩밭의 경계를 찾아 더듬거리던 뿌리를 거두어들이며
어머니가 강가에 선다.
아가, 강 저쪽이 왜 저리 어둡다냐.
강물이 내 발밑에 와서 죽어나가는구나.
어머니, 밭들이 다 묵어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 이제 나도 돌아갈 일만 남았다.
물이 흐르는데, 물이 흐르는데, 강을 건널 힘이 없어
이제 내 눈이 저 건너 강기슭에도 가닿지 못하는구나.
저 밭, 내 생이었던 저 밭의 곡식들, 내가 내 눈에 가물거
리는구나.
밭을 매던 동네 사람들은 다 어디 갔다냐.
내 살을 허물어준, 내 손톱을 가져간 저 밭에 자갈들이
뒹굴며 나를 부르는구나, 숨이 차다.
아무것도 회수할 수 없는 삶이 이리 허망하다.
퍼낼 수 없는 오래 묵은 생의 슬픔이 고인다.
그러나 무엇이 슬픈가.
슬픔도 환하게 강에 비운다.
잠든 어머니의 강가에는
구절초 꽃이 피어 있다.
이 발걸음으로 앞선 저 물살을 어찌 따라잡을까.
일생이 강이었던 어머니의 옛 강에 나는 누웠다.
새벽이다.
*김용택[金龍澤, 1948. 9. 28.~. 전북 임실군 진메마을(장산리) 출생] 시인은 1982년 창작과비평사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에 ‘섬진강1’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고, 평생 자신이 태어난 부근의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부박한 모더니즘이나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아름다운 자연을 삶의 한 복판으로 끌어들여 절제된 언어로 직관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표현하여 김소월, 백석을 잇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시인은 순창농고 출신이었는데, 어려서 소설책과 만화책을 즐겨 읽은 것이 정서적으로 자연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시인이 되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되고, 시인의 시집으로는 “섬진강” “꽃산 가는 길” “맑은 날” “강 같은 세월” “그 여자네 집” “그래서 당신” “누이야 날이 저문다” “나무” “수양버들”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는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오래된 마을” “김용택의 어머니”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 등이 있으며 “콩, 너는 죽었다”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등의 동시집을 출간하였습니다.
*시인은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윤동주상 문학대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위 시는 김용택 시집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창비시선 360)”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