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라는 호칭은 임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 송시열의 정적들-예론의 대가 허목 자의대비의 복제가 서인들의 주장대로 1년으로 결정되어 시행되고 있던 현종 1년 3월 한 남인 논객이 논쟁에 뛰어들어 예송논쟁을 재연시켰다. 정4품인 사헌부 장령 미수 허목이었다. 허목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나이 50이 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로, 초야에 묻혀 제자백가에 대해 연구하다가 다시 예학에 몰두하여 이 방면의 일가를 이루었다. 그가 학문의 고명함을 인정받아 조정에 나온 것은 효종 8년(1657), 그의 나이 만62세 때였다. 자신의 호대로 눈썹이 긴 늙은이 일때 조정에 나온 것이었다. 그는 처음 정5품 사헌부 지평을 제수받았다가 이듬해 장령으로 승진했다. 그가 현종 3년 3월 고향에서 올린 상소문이 논쟁을 재연시켰다. "신이 국상 성복의 예에 있어, '예관이 맡은 일이고, 당연히 예로부터 내려온 국가 전례가 있겠지'라고 여겨, 다만 동료들과 함께 국상의 잘못만을 논했었는데, 시골로 돌아온 후 본현을 통하여 대신들이 의논하여 정한 이어시(새 임금이 즉위하는 시기)의 절목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대왕대비께서 기년 복제를 입으시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초상 때라서 너무 황급한 나머지 예를 의논한 들이 혹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그러한 실수가 있었던 것인지요?" 자의대비의 1년복이 당황한 대신들의 실수가 아니냐는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허목의 논의는 크게 보아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왕가의 예법은 일반 사대부와 다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자가 죽으면 본처 소생의 차자가 장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의례' 주소에서 정현은 '장자는 위아래로 통하는 호칭이다. 적자라는 호칭은 오직 대부. 사에게만 해당되지 천자와 제후에게는 통하지 않고 또 태자라고 말하여도 위아래로 통하지 않는다. 장자로 적통을 세운다고 한 것은 적처가 낳은 자식은 모두가 적자로서, 만약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을 세우고 즉시 장자로 명명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만약 적자라고 말하면 이는 오직 첫째 아들에게만 해당되지만, 장자라고 말하면 적통을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통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장자는 위아래로 통하는 호칭이다' 라는 말은 장자가 맏아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후사를 이은 사람을 뜻한다는 말이다. 더구나 적자라는 칭호는 사대부에게나 통하는 말이지 임금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니 장자와 서자, 또는 적자의 구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이었다. 자의대비의 1년복이 원천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지적이다. "적자에서 적자로 이어졌을 때 그를 일러 '정체'라 하여 3년복을 입을 수 있고, 중자로서 계통을 이은 자도 같습니다. 서자를 세워 후사를 삼았을 때는 그를 일러 '체이부정'이라 하고 따라서 3년을 입을수 없는데, 그는 첩이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장자'이기는 일반인데 장자로 적통을 세웠을 때는 3년, 서자를 세워 후사를 삼았을 때는 1년을 입는 것은 적자에서 적자로 이어지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뜻입니다." 허목은 송시열 등 1년복으로 정한 서인들의 아픈 곳을 찔렀다. "소현이 세상을 일찍 뜨고 효종이 인조의 둘째 장자로서 이미 종묘를 이었으니, 대왕대비께서 효종을 위하여 재최 3년을 입어야 할 것은 예제로 보아 의심할 것이 없는 일인데, 지금 강등을 하여 기년 복제로 한 것입니다. 대체로 3년의 복은 아버지를 위하여 입는데 아버지는 지극히 높기 때문이고, 임금을 위하여 입는데 임금도 지극히 높기 때문이며, 장자를 위하여 입는데 그가 할아버지 아버지의 정통을 이을 사람이고 또 앞으로 자기를 대신하여 종묘를 맡을 사람이므로, 그것을 중히 여겨 그런 것입니다. 지금 효종으로 말하면 대왕대비에게는 이미 적자이고 또 조계를 밟아 왕위에 올라 존엄한 '정체'인데, 그의 복제에 있어서는 '체이부정'으로 3년을 입을 수 없는 자와 동등하게 되었으니,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한 일인지 신으로서는 모를 일입니다." 그의 논리는 본처 자식과 첩의 자식을 구분하는 말이 적자, 서자이고, 맏아들이 죽어 둘째 아들이 승중하면 그가 장자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효종은 당연히 장자이고 또 임금이니 당연히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국가의 큰 상사는 사체가 중하고 예제도 엄하니, 비록 말절에 불과한 의식일지라도 그를 문란하게 행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3년을 규정하는 예제이겠습니까...바라건대 예관자 유신들로 하여금 예에 어긋난 복제에 대하여 그를 뒤좇아 바로잡게 하소서. 지금 대상사의 연제 (1년 후에 지내는 소상)가 다가오고 있는데, 연제를 마치고 나면 기년복은 끝나는데 그때 가서는 비륵 후회한들 어쩔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음달이면 효종이 승하한 지 1년이 되는 소상을 지낸 후 자의대비가 탈상을 하게 되어 있었다. 막판에 다시 이의가 제기되자 서인들은 당황했다. 더구나 자의대비의 기년복은 효종을 '체이부정'으로 본 것이라는 허목의 지적은 서인으로서는 뼈아픈 것이었다. 송시열이 정태화와 나눈 대화는 왕통은 비록 효종에게 있을지라도 종통은 소현세자에게 돌리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었다. 송시열은 분명 효종을 인조의 서자, 즉 체이부정으로 본 것이었다. 현종은 대신과 유신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게 했는데, 기년복을 주장한 송시열이 반박에 나서야 했으나 그때 향리에 있었으므로 좌참찬 송준길이 나서서 허목의 이론을 반박했다. "...이번에 장령 허목이 상소문에 경전을 인용하고 의리에 입각하여 매우 장황한 논설을 하였습니다. 신이 그외 논설에 대하여 비록 감히 할 말을 다해 가면서 서로 힐난할 수는 없으나, 의심되는 곳이 없지 않습니다. [의례]에서,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라고 한 것은 위아래를 통틀어 한 말입니다. 만약 허목의 말대로라면 가령 사대부의 직처 소생이 10여 명인데. 첫째 아들이 죽어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3년복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죽으면 그 아비가 또 3년을 입고 불행히 셋째가 죽고 넷째, 다섯째, 여섯째가 차례로 죽을 경우 그 아비가 다 3년을 입어야 하는데, 아마 예의 뜻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허목은 다시 상소를 올렸다. 허목은 한술 더 떠 '의례주소'의 '장자를 위한 상복도'를 첨부하여 올렸다. 그는 여기에서 3년복을 입지 못하는 4가지 경우 '사종지설'를 비롯한 여러 복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의례주소'의 상복도까지 첨부한 허목의 상소를 본 현종은 현재의 1년복이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느꼈다. 현종은 송준길이 면대를 청해 시사를 말하자 이렇게 물었다. "좌참찬이 헌의한 후에 허목이 또 상소를 하였는데 그 소문을 보았는가?" "신은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우승지 이은상이 "허목 상소문부터 먼저 아뢸까요"라고 하자 현종은 그러라고 하여 송준길은 허목이 올린 상소문과 상복도를 보았다. 송준길이 입을 열었다. "신 등의 주장은 비록 적처 소생이라도 둘째부터 '서자' 라는 것이 허목의 주장은 서자는 '첩자'라고 하기 때문에 말이 그렇게 서로 상반되고 있는데, 신과 시열은 둘째아들이 비록 왕통을 계승하였더라도 3년의 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같은 '의례' 주소가 보는 견해에 따라 그렇게 틀리다는 말인가?" "지금 허목이 그의 상소문에서 항목을 조목조목 다 나열해 놓았지만...체이면서 정이 아닌'체이부정' 것은 적처 소생의 둘째아들을 이름이며, 정이면서 체가 아닌 '정이부체'것은 비록 적손이기는 해도 체는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의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대부 사이의 일뿐만이 아니고 제왕의 집까지 통틀어서 말한 것입니다." 자의대비 복제가 뒤늦게 문제되자 예조판서 윤강은 당황했다. 그는 '체이부정', '정이불체'같은 엄청난 말들이 횡행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논쟁에 잘못 끼어들다간 자칫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느꼈던 것이다. 윤강은 복제를 재론하는데 송시열이 빠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다시 끌어들였다. "당초에 예법을 의논할 때 우찬성 송시열이 대신들과 함께 의논했습니다. 지금 그가 밖에 나가 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현종은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는 다시 살아났다. 허목이 상복도까지 첨부해 거듭 상소를 올리자 기년복을 주장했던 서인들도 당초 주장에서 한발 물러섰다. 영돈녕 이경석은 "다시 널리 묻고 알아보셔서 행하심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물러섰다. 판중추 원두표는 아예 당초의 기년복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했다. "신이 원래 예법에 어두우므로 여러 대신과 함께 전례에 따라 헌의했던 것인데 지금 허목의 상소를 보면 모두 경전에 분명한 근거가 있는 글이니 어찌 다른 의논을 하겠습니까. 신은 당초 잘못된 주장을 고집해서 두 번 다시 막중한 예법을 그르칠 수 없습니다." 영의정 정태화도 한발 물러섰다. "당초에 신은 다만 '국제'를 들어 말씀드렸던 것뿐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겠습니까. 오직 다시 예법에 밝은 신하에게 물어 처리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예종이 돌아가셨을 해 정희왕후가, 또 인종이 돌아가셨을 때 문정왕후가 입으신 상복제도를 아울러 자세히 살펴서 정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정태화도 1년복이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예종은 효종처럼 세조의 차자였고. 문정왕후는 자의대비처럼 인종의 계모였으므로 이 두 경우를 아울러 참조하도록 권한 것이었다. 이경석과 원두표, 정태화 등이 이처럼 자의대비의 복제에 문제가 있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나선 것은 이들이 '체이부정설' 이 갖는 위험성을 감지한 까닭도 있었지만 이때만 해도 허목의 문제제기를 정치 공세라기보다는 학문적 견해의 차이로 여긴 때문이기도 했다. 경전 해석이 3년설이 옳다면 굳이 1년설을 고집하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영의정 정태화마저 기년복이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자 복제 변경 여부는 송시열에게 달려 있게 되었다. 송시열이 다른 신하들처럼 "예법에 어두워 잘못 헌의했습니다"라고 말하게 되면 자의대비의 기년복은 참최복, 즉 3년복으로 다시 결정나는 것이고 곧 상복을 벗을 예정이던 자의대비는 늘어난 기간 동안 더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예학의 정통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송시열이 예법에 어두워 기년복으로 의정했다고 자인할 수는 없었다. 우찬성 송시열이 헌의했다. "허목은 상소에서 많은 말을 했으나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장자가 죽으면 제2장자를 세워서 역시 장자라 이름하여 부모가 그 제2장지에게 3년복을 입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자를 세워서 후사를 삼으면 3년복을 입을 수 없는데 이것은 첩의 아들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송시열은 일개 장령이 자신이 틀렸음을 공박하고 나온 데 자존심이 상했는지도 모른다. "신이 일찍부터 의심하여 알고자 하던 것도 바로 이 조목에 있었습니다. 허목이 이 조목에 분명한 근거를 댔으니 지금이야말로 신이 의혹을 풀고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이 자신의 잘못을 자인한 것이 아니라 허목에 대한 조롱임은 다음 구절을 보면 명확해진다. "'장자가 죽으면'이라고 했으나 언제 죽은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성인이 되어서 죽은 것이라면 그 아버지가 이미 참최복 3년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런 후 다음 적자(차적자)를 세워 장자라 하였는데, 그 차적자가 죽으면 또 참최복을 입어야 합니까? 그렇게 되면 '두 정통이 없고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는 예의 원칙은 어떻게 됩니까? 아마도 그것은 장자가 어릴 때 죽어서 아버지가 복을 입지 않아 적통을 이루지 못한 경우일 것입니다." 송시열의 반론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허목의 말대로 한다면 두번 참최복을 입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론이었다. 송시열은 참최복을 두 번 입을 수 없다는 자신의 견해를 예를 들어 설명했다. "만약 장자가 성인으로 죽었는데 차자를 장자로 이름하여 3년복을 입는다면 적통이 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 된 자로서는 한 몸에 참최복이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만약 세종대왕이 오래 사셔서 문종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면 세종이 3년복을 입고, 제1대군을 세워서 후사를 삼았을 것인데 제1대군이 또 불행히 세상을 떠나면 또 참최복을 입고 또 제2대군을 세우고 이렇게 해서 제8대군에 이르기까지 모두 참최복 3년을 입는다면 이것은 문종을 포함해 27년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평민이라도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존귀한 제왕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문제는 장자가 죽었을 경우 뒤를 이은 차자에게 장자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예송논쟁 1백여 년쯤 후에 남인 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문제를 정리한 것을 보자. 정약용은 '상례외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자로 책봉한 장자가 죽으면 부모는 부득이 3년복을 입는다. 그 후 차자를 세워 태자로 삼는다면 적자라 이름하는 것은 괜찮지만 장자라고 이름할 수는 없다." 정약용은 송시열이 영수인 노론에 의해 축출당한 남인 정치가이자 학자였다. 그는 송시열과 허목이 논란을 벌였던 '의례주소' '가씨소'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주장을 펼쳤다. "'가씨소' 원래 양면성이 있다. 하나는 장자의 이름으로서 차자나 삼자도 가 하다고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자가 전중을 한 것을 체이부정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모순으로서 양자는 반드시 서로 통할 수 없다. 우암 송시열은 뒤의 설을 취한 것이고, 미수 허목은 앞의 설을 취한 것이다." 소현세자의 비상한 죽음이란 특수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특정한 정치적 의도를 배제하면 그리 다툴 문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둘이 싸운 내용은 정약용의 말대로 같은 책의 서로 다른 조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한 세기 후의 해석이고 당시는 송시열과 허목, 그 누구도 물러설 수 없었다. 송시열은 첩의 아들이기 때문에 3년복을 입을 수 없다는 허목의 주장에도 강하게 반박했다. "소위 서자가 후사가 되면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것은 첩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본래 '의례소'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첩의 아들이기 때문'이란 말은 허목 자신이 붙인 것으로서 의례소에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의례소'에는 '서자는 첩의 아들이나, 적자의 제2자도 같이 서자라 이름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효종대왕을 인조대왕의 서자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서 라는 것은 천한 칭호가 아니라 여럿을 의미하는 중의 뜻입니다. 이는 대저 신이 의심하면서 결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송시열의 말에도 분명한 논리가 있었다. 서자란 말은 첩의 아들이란 뜻과 장자 이외의 모든 아들이란 두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자신은 후자를 말한 것이라는 반론이었다. "대게 제왕가는 사직을 중히 여기기 때문에 옛날에도 장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법을 만들 때에는 장자와 차자의 구별에 주의했습니다. 주나라 문왕이 장자인 백읍고를 버리고 무왕을 세웠지만 주공이 예법을 세울 때는 반드시 장자와 차자의 구별에 힘썼습니다. 오늘 논란이 된 것도 바로 이 예문인데 주공이 예법을 정한 의사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송시열은 소현세자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없었지만 소현세자가 인조의 적장자임을 비유로 설명했다. "'의례'가씨의 소는 제1자가 죽은 경우만을 말하고 제1자가 후손 없이 죽은 경우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아마도 제1자가 미성년으로 죽었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허목은 소의 본뜻을 자세히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기'에 나오는 단궁의 문도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궁의 말은 공의중자라는 사람이 장자가 죽었을 때 장손이 있음에도 차자를 세운 것을 비난한 것이다. 곧 인조가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을 두고 효종을 세운 것이 잘못이라는 비유였다. 송시열은 후세 예가들의 심판을 기다리자는 휴전 제의로 상소를 마쳤다. "옛날 이황이 군신의 복제를 수숙으로 하였다가 기대승의 반박을 듣고 놀라 소견을 고치면서 '만일 기대승이 아니었다면 천고의 죄인이 될 뻔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신이 허목에게 바라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대저 시비가 엇갈리는 곳은 정주(장자와 주자)와 같은 큰 안목과 역량이 없이 한때의 의견만으로 결단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의심나는 곳은 그대로 남겨 후세의 예가들이 바로 잡기를 기다리고, 우선은 명백하여 의심이 없는 곳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사관은 현종에게 실록을 참조해 덕종. 인종. 순회세자(13세에 죽은 명종의 세자)의 장례 때 복제를 적어 바쳤다. 조 선은 원래 아들의 장례 때 3년복을 입는 제도가 없었다. 따라서 모두 1년복을 입었던 것인다. 정태화, 심지원 등은 모두 의논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고 실록에 실린 대로 따르자고 말했다. 현종은 "여러 대신의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할 수 밖에 없었다. 송시열이 나름대로 근거를 세워 3년설을 반박했으므로 서인 대신들은 다시 송시열의 의견에 따라 1년복이 맞다는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현종은 드디어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자의대비의 복제를 원래대로 기년복으로 결정하였다. 서인은 이것으로 예송논쟁이 종지부를 적은 것으로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탄 이는 착각이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왕가는 사가와 다르다는 윤휴와 허목의 주장에 대해 정확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 점에 주목해 윤휴, 허목에 이어 예송논쟁에 뛰어 든 또 한 명의 남인 논객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고산 윤선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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