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이 조선 한복 변천의 변곡점이었다.
먼 길이라면 먼 길을 다녀왔다. 아침 7시 30분 전주를 출발, 아홉 시에 대전복합 터미널에 닿았고, 9시 40분 차를 타고 옥천, 보은 화서를 거쳐 경북 상주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50분이었다.
승용차를 타고 가면 두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를 네 시간 20분이 걸렸지만 가는 길 내내 안개공화국이기도 하고, 무르익은 가을 공화국에다가 상주감이 노랗게 익어가는 풍경, 천천히 가는 버스 여행의 보너스였다.
경상북도 한복문화진흥원(원장 박후근)에서 개최한 2024년 한복포럼의 토론자로 참여하기 이해서였다. 국립대구박물관장인 김규동, 상주박물관관 관장인 윤호필씨의 발제 후 작가이자 서평가인 김미옥씨의 사회로. 전통염색작가인 한광석씨와 내가 토론자로 참여한 것이다.
한복은 우리 민족의 고유의 복식이자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런 한복을 좋아하지만 전통한복은 평상복으로 입기는 불편하기 때문에 나는 30년 전부터 생활 한복을 입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상복으로 나처럼 생활 한복을 입거나 한복을 입는 경우가 드물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또는 어떤 행사 때에만 한복이나 두루마기를 입는다.
2006년에 내가 쓴 <택리지> 가 KBS <TV 책을 말하다>에 선정되어 문경과 상주 일대에서 방송을 촬영하는데, 담당 PD가 방송국 세트장에서는 양복을 입으면 좋겠다며 양복을 사주겠다고 했다. 오랜 나날 생활한복만을 입어서 오히려 불편하다는 내 생각을 피력했고, 결국 절충해서 비싼 두루마기를 맞춰서 입었다.
그런 경우가 또 한 번 있었다. 모 방송국의 시청자 위원을 오래 했는데, 모 대학의 총장이 위원장이었다. 총장님이 방송 출연을 할 때는 양복을 입고 하는게 좋겠다며 양복을 맞춰주겠다고 해서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던 경우가 있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에 나오는 구절같이 우리가 보존하고, 입어야 할 한복을 연구하는 사람들 조차 평상복으로 입지 않는 시대에 어떻게 한복문화를 발전시킬까에 대한 이야기 속에 조선시대 당쟁이 우리나라 의복의 변천사에 크게 기여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조선시대 당쟁이 가장 극대화되었던 영,정조 시대에 <택리지>를 썼던 이중환의 글에 그 시대의 의상에 대한 글이 나온다.
당색에 대한 강인한 집념은 당색에 따라 옷의 디자인이나 헤어스타일도 달리하는 했다고 한다. 노론 가문의 부녀자는 저고리의 깃과 섶을 모나지 않고 둥글게 접었으며 치마 주름은 굵고 접은 수가 적으며, 머리 쪽도 느슨하게 늘어서 지었다.
이에 비해 소론 가문의 부녀자는 깃과 섶을 뾰족하고 모나게 접었다. 이처럼 모난 디자인을 ‘당唐코’라 불렀으며 소론 가문을 당코로 속칭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치마 주름 수도 많고 잘며 머리 쪽도 위쪽으로 바짝 추켜 지었고 이 같은 옷매무새나 머리모양은 그들 당의 정신과 너무나 잘 부합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곧 노소론의 분당 원인은 주자학朱子學을 둔 보수적 해석과 혁신적 해석 때문이며, 곧 보수혁신이 그 분당의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당코처럼 날카로운 디자인, 잔주름 많은 치마, 바짝 올려붙인 머리 쪽이 혁신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고, 완곡한 옷깃, 굵은 치마 주름, 느슨한 머리 쪽은 보수적 이미지를 물씬 나게 한다.
그러한 당색들이 오늘날까지도 줄기차게 이어져 이 당黨 저당으로 무늬만 바꾼 채 계속 유지되고 있다.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은 파란색의 옷을 입고, 국민의 힘은 빨간색 옷을 입는다. 조선시대 당쟁 이후 옷의 변천이 시작되었고, 사람의 마음까지도 변화를 시킨 것이다.
“나하고 생각이 같으면 군자君子고 나하고 생각이 틀리 면 소인小人이다.‘ 라는 말이 하나도 변형되지 않고 진행 되어 왔다. 그래서 제 눈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만 보인다는 속담이 무색하지 않은 세상이 되고 말았다.
동인 서인에서 노,소론과 남인,북인으로 갈라져 왔고, 지금은 우파네. 좌파네 하며 서로의 등을 떠밀며 날 선 칼을 겨누고 있다. 그러한 세상 속에 당신과 나도 있다.
나는 그 토론회에서 고조선과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의복을 만들어서 진열하고, 조선 시대 당쟁의 시대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의 옷, 노론과 소론의 옷, 그리고 해방 이후에 당들의 옷을 진열하면 정치인들이나 정치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가 찾는 나라 안의 명소가 될 것이라고 강변했다.
또 하나 나라 안의 가장 번성했던 나루였던 낙동나루(의성과 상주를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는 관수루 가 보이는 곳, 이규보, 김일손, 이황등이 지나간 곳)에서 <낙동강 축제>를 개최하면서 조선시대 과거를 보러 가는 사람들, 일반인들, 보부상들의 옷을 입고 낙동강을 주제로 한 축제를 열 것을 주문했다. 강원도 태백에서 부산에 이르는 천 삼백리 낙동강에 기대에 사는 사람들의 큰 축제가 되지 않을까?
끝나고서 다시 귀로에 올라 집에 도착한 시간은 밤 열시 10분이었다.
2024년 10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