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거룩한 동정녀의 출산을 통하여 영광의 빛을 세상에 드러내셨으니
저희가 언제나 이 강생의 놀라운 신비를
온전한 믿음과 경건한 마음으로 거행하게 하소서.
제1독서
<천사가 삼손의 탄생을 알리다.>
▥ 판관기의 말씀입니다.13,2-7.24-25
그 무렵 2 초르아 출신으로 단 씨족에 속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마노아였다.
그의 아내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3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그 여자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보라, 너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지만,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4 그러니 앞으로 조심하여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은 아무것도 먹지 마라.
5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기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이다.”
6 그러자 그 여자가 남편에게 가서 말하였다.
“하느님의 사람이 나에게 오셨는데,
그 모습이 하느님 천사의 모습 같아서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묻지도 못하였고,
그분도 당신 이름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7 그런데 그분이 나에게,
‘보라, 너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은 아무것도 먹지 마라.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4 그 여자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삼손이라 하였다.
아이는 자라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
25 그가 초르아와 에스타올 사이에 자리 잡은 ‘단의 진영’에 있을 때,
주님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복음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25
5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6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7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8 즈카르야가 자기 조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의 일이다.
9 사제직의 관례에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기로 결정되었다.
10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다.
11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 제단 오른쪽에 섰다.
12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13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15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16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17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18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19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20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21 한편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은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22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23 그러다가 봉직 기간이 차자 집으로 돌아갔다.
24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25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믿음을 받고 싶으면 손에 쥔 그걸 내려놓아라!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구세주의 선지자가 그에게서 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믿지 못합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
벙어리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조용하고 순응해보라는 뜻입니다. 해보면 알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지 않게 되자 정말로 그 일이 실현됩니다. 만약 계속 자기 생각을 말하며 이 핑계, 저 핑계를 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왜 세상 사람들은 믿어서 손해 볼 게 전혀 없는데도 믿지 않을까요? 믿는다고 크게 손해 볼 게 없습니다. 죽고 나면 알 일입니다. 진짜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믿은 게 얼마나 다행일까요? 하지만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믿음을 버립니다.
『한 번이라도 모든 걸 걸어본 적이 있는가』란 책을 쓴 전성민 씨가 있습니다. 그는 20대를 게임 중독으로 날려버렸습니다. 행정 고시를 위해 공부하다가 게임에 빠져 젊은 시절을 폐인처럼 날린 것입니다. 군대에 다녀오니 서른 한 살이었습니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자신에게 묻습니다.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후회 없이 모든 걸 걸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부모님에게 한 번만 더 믿어 달라고 청합니다. 그는 2년 만에 5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행정 고시와 입법 고시까지 동시에 합격합니다.
우리는 왜 믿지 못할까요? ‘자존심’을 지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믿었는데 하느님이 없으면 창피할까 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자기 자존심과 맞바꿉니다. 사이비에 들어가서 이건 아닌가 싶어 나오고 싶어도 창피해서 못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 자존심이 그만큼 믿음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관계입니다.
노태권 씨는 중졸 막노동꾼이었습니다. 난독증이 있어 글도 읽을 줄 모릅니다. 두 아들은 중학교 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둘 다 자퇴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아들을 대학에 보내겠다고 먼저 공부를 시작합니다. 난독증임에도 막노동하며 틈을 내어 공부한 끝에 2006년 수능 모의고사를 일곱 번 만점 받습니다. 12과목 모든 과목 만점을 맞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을 가르쳐서 맏이는 서울대 경영학과 4년 장학생, 둘째는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수석으로 입학 시킵니다.
노태권 씨가 꿈꿨던 세상은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요? 그가 자존심을 내려놓는 계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IMF 구제금융 시절 서울에서 구두닦이를 할 때였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사흘 동안 한 명의 손님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흘을 꼬박 굶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때 구두를 신은 발 한쪽이 자기 앞에 올려졌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구두에 떨어졌습니다. 눈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려고 울면서 엄청 열심히 구두를 닦았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구두를 열심히 닦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1,000원이나 2,000원을 주며 나에게 구두를 닦아 달라고 발을 내미는 사람에게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다면 그 사람의 자존심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눈물로 다 빠져버린 것입니다. 더는 자존심이 없어서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믿기 쉬워집니다. 이런 사람은 누리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전성민 씨가 처음에 게임 중독이 되었던 것은 시험에 떨어지는 것에 대한 창피함을 이기기 위한 자기 합리화가 더 컸습니다. 핑곗거리를 만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표징’을 달라며 핑계를 댑니다. 사실 표징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존심이 강해서 믿지 못하는 것이면서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하느님이 없으면 존재할 수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기 싫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을 버리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종종 여행을 갔습니다. 이렇게 과거행을 쓰는 이유는 이제 여행을 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좋은 여행을 위해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 여행지에 어떤 것이 있는지, 즐길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풍요로운 여행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여행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공부할 필요 없이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쉼에만 집중하면서 한적한 곳을 찾아갑니다.
성지순례를 갈 때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한 만큼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과의 연관성, 그곳 성지의 역사와 유래 등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그 성지에 다녀왔어도 어디 다녀왔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알려고 노력할수록 많은 것이 보이는 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어떤 신부가 제게 “너희 동네의 그 집 가봤어?”라면서 맛집을 물어봅니다. 처음 들어보는 집이었습니다. “우리 동네에 그런 곳이 있었어?”라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고, 또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갑자기 주님께서 나타나셔도 주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늘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은 하면서도, 주님을 보는 순간에 두려움에 벌벌 떨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의 천사가 사제인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해 말해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성전은 예루살렘에만 있었기에, 사제들을 조로 나누어서 차례로 한 주일 동안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속한 조의 차례가 되면 복음에서 보듯이 제비뽑기하여 분향할 사제를 정했습니다. 바로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서 분향하던 중에 주님의 천사를 만났던 것이지요. 이 상황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루카 1,12)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13)라고 말합니다. 천사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온 존재, 결국 주님을 만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워해야 할까요? 아니면 기뻐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도, 정작 주님 알기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기쁨의 감정보다 두려움의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주님을 아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큰 기쁨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아리스토텔레스).
사진설명: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