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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 니콜라옙스크 사건 = 니항사건) 관련자료
요약편 : 1920년 러시아 내전기 일제 침략군이 전멸한 니항 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개요
장편)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니항사건 :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 (통합본 1)
장편)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니항사건 :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 (통합본 2)
시베리아의 가라유키상 상인 시마다 모토타로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1
시베리아의 가라유키상 상인 시마다 모토타로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2
사할린섬 조선인 여자 매매의 악행 (동아일보1924.09.02.자 2면)
※ 앞의글 : 시베리아의 가라유키상 상인 시마다 모토타로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1
시베리아의 일본인 가라유키상 상인 시마다 (2) 시마다 모토타로(島田元太郎,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2편
가족 관계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서 시마다는 두 아들을 낳았으며 일본 이름과 함께 러시아 이름도 부여했습니다.
첫 번째 아들 (1902년 출생)-테리히샤(니콜라이),
두 번째 아들 (1903년 출생)-바타루(바실리)
시마다 모토타로에게 몇 명의 자녀, 처와 조선인 첩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발생이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권고
시마다는 당연히 극동 지역과 하류 아무르에서 소련(소비에트) 권력의 확립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러시아와 제정 러시아 국민에 대한 전문가로서 그는 당시 일본군 엘리트 대표들에게 조언을 제공했다.
다나카 장군에게 일본 침략군을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에 파견할 것을 권고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최고위급 밀정중 한명이었던 시마다 모토타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사에서는 시마다 모토타로, 안드레예브(니항과 자유시의 군대 부대장중 1명), 바실리 박, 독립유공자 이지택, 독립유공자 김낙현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일본군의 사할린주의 주도인 니항 점령
시마다 등의 권유로
1918. 8. 2. 일경 일본군이 체코군단 구원 등을 내걸고서는 별 관계가 없는 니항과 사할린섬 북부 등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일본 천황에게 시베리아 출병 청원서를 제출한 러시아 백파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당연히 있었다.
일본군의 목적은 세계평화도 아니었고, 러시아 평화는 더욱 아니었다. (일본 용어로는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의 구조 요청, 선량한 사람들의 구원 요청)
일본군은 니항에 병영건물과 위안소,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시마다의 돈벌이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러시아 내전이 백파와 일본 출병군에게 불리해지자 일본군은 사할린 주만큼은 점령하여 괴뢰국가를 건국하고 유전, 광산 등을 확보하고자 대사관 설립까지 획책한다. 이러한 일본군의 목적을 볼 때 니항을 불태운 것을 잘못이라고만 보기는 힘든다)
일본인들이 급속히 증가하여 1920년초 발생한 니항사건 당시 일본인들의 총수를 추측하기 힘드나 러시아 측에서는 대략 850여명 이상으로 보고 있다.
시마다의 밀정 활동과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한 사업 번창
상업만 하는줄 알았던 시마다는 니항 일대와 아무르강 일대의 시베리아 지역, 사할린섬 일대 등을 돌아다니며 밀정활동을 한다.
이 무렵 조선인 배정자 등도 돌아다니며 조선인회, 보민회, 조선인 민회 등의 명칭을 가진 친일 단체를 조직한다.
1918년 9월경 이후에는 백파정권(주로 콜차크, 메르쿨로프, 시묘노프 등)의 지원뿐만이 아니라 이들과 내통한 일본군의 아무르강 하류에 대한 개입과 만주 동청철도 장악, 바이칼호에 이르는 지역까지 점령 등의 지원에 힘입어
시마다는 어업 사업도 크게 확장된다.
1917-18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 지속과 러시아 내전으로 인한 백파계 러시아인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시마다 매장의 이익도 증가하고 있었다.
독일계 회사의 파산
니항에 있던 주요 경쟁사인 독일 회사인 Kunst and Albers의 백화점은 폐업하였다. 독일회사는 적국이었기에 파산이 쉬웠으나, 미국 영국 중국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과는 같은 연합국이었다.
1918년 중반, 하류 아무르 지역에서는 화폐 부족 현상이 나타난다. 이 무렵 극심한 경제난을 겪던 러시아에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및 주변 지역의 주립 은행, 상호 신용 협회, Ust-Amur 협력자 연합, 개별 무역 회사 등에서 인플레이션 등으로 인한 러시아 화폐에 대한 문제가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통화 대체에 관한 문제인 <시마다 지폐> 발행은 역사가들에게는 특히 흥미롭다.
일본인이 러시아 혼란기에 일부 지역에서 통용되는 돈까지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정부의 지원과 일본인들이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같은 1차 세계대전 연합국임에도 불구하고 니항의 중국인들을 식민지배를 하던 조선인과 비슷하게까지 멸시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고 한다.
형식적으로 시마다 화폐는 식품 및 산업용품에 대한 "임시 영수증" 또는 간단히 쿠폰, 혹은 상품권이라고 한다.
이 시마다 화폐의 생산과 통용은 1919년 봄쯤 부터였다.
시마다 화폐 발행 이후 시마다에게는 "아무르의 표트르 대왕"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사람들은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시마다 모토타로가 때때로 자신이 "아무르의 첫 번째 표트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기를 좋아했다고 말한다.
니콜라예프스크 사건(니항사건) 이후
1919년 5월 말, 시마다는 일본 해군부의 요청에 따라 증기선을 타고 일본으로 귀국한다.
그는 일본의 아무르강 하류 지역에서 간섭과 러시아 내전이 악화되는 시기를 보내게 된다.
1920년 3월 12일 일본군의 반자이 기습공격과 4월경의 일본군 재공격으로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이 발생하여 도시 전체가 거의 완전히 불타고 폭파되었을 때 시마다는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
니항 도심의 주택을 포함한 대략 2,107여개 건물 중 35개 건물(대부분 외곽에 있음)정도, 13개 시장 건물, 개울 건너 우측편의 중국인 거주지 내 건물, 4개 부두 등만 남았다. (주택은 대략 1,130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니항 외곽의 거주지들인 츠니르라흐, 마가 등등은 파괴되지 않았으며 니항 도심의 총 건물수 2,100여개소는 오늘날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항구 도심의 1/3정도 수준이다. 그런데도 일부 친일 학자들의 공식도서는 오늘날 인구의 1/3 정도에 해당하는 인구가 아닌 몇 배에 해당되는 3만명까지 거주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많다. 1917년경 니항 인구 조사결과로는 도심 인구는 8천명 내외였다.
러시아 내전 피난민들도 겨울에는 거의 대부분 돌아간 상황이기 때문에 그 정도 수준이 타당하다는 것이 러시아 알파벳도 모르는 일부 몰지각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동의하는 사실이다.)
1920년 6월 4일경, 일본 군함이 사할린과 하류 아무르로 파견되면서 시마다는 니콜라예프스크로 돌아왔다.
일본인과 조선인 여성 90명 이상이 시베리아에 출정한 일본군과 일본인들을 위해 성매매하던 가라유키상 유곽, 일본군 병영, 일본인 집단 거주지 뿐만이 아니라
시마다의 모든 재산과 부동산이 불타게 되는 ‘니항사건’의 결과 러시아인 거주지, 상점, 창고가 불에 탔고 기계 공장이 폭파되었다.
시마다는 완전히 망했다.
니항사건 추모공원
니항사건 추모공원
1919년경 니항 사진 : 시마다의 우편엽서에 나온 사진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 가족과 사진 촬영한 시마다
시마다가 발행한 1루블 화폐
일본제국에서의 시마다의 존재
시마다는 니항사건 이후 자신의 상점들을 재건하고자 한다.
그리고 곧 그는 전쟁관련 부서, 지방 점령 당국, 일본 신용 기관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다시 부활시킨다.
동시대 사람들이 언급했듯이 그러한 일본과 백파의 지원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본 점령군이 러시아 극동 전역에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하류 아무르에 대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시마다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러시아어, 현지 인물, 정치적, 경제적, 시장 상황 등을 볼 때 시마다는 중요한 인물이었고 일본도 이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완전 파괴된 일본군 병영과 일본인 거주지
조선에서의 초혼제 행사. 일본군 충혼탑과 순난자비 건립 주도
시마다와 일본군은 ‘인류 역사에 없었던 민간인 대학살극’이라고 선전하며 조선의 경성에서도 초혼제장을 만들어 놓고 전국적으로 친일 조선인들을 대규모로 동원해 선전에 나섰고
일본 본토와 시베리아에서도 황족, 장성, 일본 수상 등이 나서 시베리아 침략의 근거를 삼기위해 니항 사건을 조작하고 선동질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러시아계 친일파로는 Y.A.구트만, 예밀야노프, 에치 등 외에도 엄청나게 많았고, 당시 일본의 선동이 맞다고 북치고 심심하면 복사 붙여 넣기하고 협조하는 자는 수두룩했던 모양이다.
시마다는 철근-콘크리트로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 높이 15m가 넘는 일본군 충혼탑을 세웠으나 현재는 파괴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혁명세력의 승리로 끝나자, 1922. 10. 2. 일경 일본군은 니항에서 철수한다.
북사할린섬과 조선 평안도로 이주
일본군이 니항에서 철군할 때 시마다는 한때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자원의 보물섬이던 사할린섬 북부로 이주하여 석유 개발업을 시작했으나, 석유개발과 정유업은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사업이었고, 당시 일본의 대기업들이 이미 선점하고 있었다.
1925. 1. 20일경 일소기본조약(日蘇基本條約) 체결되어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에서 삼림•석유•석탄 채굴권 등 획득하며 소련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되고
조선 비적(독립군)의 활동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1925. 5. 14.일경 북위 50도 이상 사할린섬 북부의 일본 군인들은 철군한다.
그러나 1944. 3. 30일경까지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 및 석탄 광산은 활용하였다.
2차 세계대전 전황이 악화되자 소련의 중재와 연합국과의 관계회복을 노린 일본은 결국 북위 50도 이상의 사할린섬 북부에서도 완전 철수한다.
일본군의 북사할린섬 철군 무렵에
시마다는 조선 평안도로 이주하여 여러 차례 금광 사업 등을 하였으나 결과가 좋지 못했다.
결국 둘째 아들이 살고 있는 평안도 평양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한 직후 소식이 두절되었다.
아마 고령으로 인해 일본으로 귀환하지 못한 것 같다.
시마다가 1919년 6월경 조선 진해의 일본군 장성 각하에게 보낸 엽서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일명 : 니항)에서 화폐 발행
50코펙 화폐, 1루블, 3루블, 5루블, 10루블 화폐에 자신의 초상화를 넣고, 뒷면에는 둥근 도장과 서명이 있다.
화폐 수집가들에게 시마다가 발행한 화폐는 가치가 있다. 러시아 내전 시기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여러 종류의 화폐가 발행되었으나, 러시아의 혼란으로 금과 은으로 된 화폐를 제외한 지폐는 제대로 된 화폐역할을 하지 못했다.
시마다가 발행한 화폐는 보존 상태도 우수하고 도쿄의 제본소에서 인쇄되었기 때문에 다른 니항의 지폐들보다 인쇄 상태도 양호하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값어치가 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말엽에는 일본군들이 대량의 군표를 발행했기 때문에 황군 위안부 여성들이 받았던 일본군 군표는 가치가 상실되었고, 오늘날까지 죽어서도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할린섬 강제 징용자중 상당수는 1945년 일본군이 패망 이후 귀국하는 배속에서도 몇시간의 항해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오늘날 러시아에 있는 니항사건 추모공원
결론
한 때 1920년 니항사건을 ‘독립군 3대 승리’로 부르는 사람이 많았으나
요즘은 A.Y.구트만의 책이 아니면 역사 카페에서도 인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니항에서 일본군의 반자이 야습과 집단자살에 동참하지 않았고 포로가 되지 않아 생환한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시마다는 ‘생명의 은인’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니항 일본 영사관의 이시다 토라마츠(Исидо Торамац) 영사대리 부영사는 근래 확인한 바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자살하였다고 한다. 즉 중국군함의 함포 공격으로 죽은 것은 아니다.
시베리아의 가라유키상 상인 : 시마다 모토타로 (2부)
첫댓글 원인 제공은 일본군인데 오히려 니항 사건을 조작하고 선동질했군요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청산리, 봉오동, 자유시 참변보다 더 알려진 사건입니다.
2차 대전이전에는 일본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라고 선전되었고.
2000년대 이후, 백파나 일본측의 자료만을 각종 기념관과 공식도서가 인용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그리고 특히 박일리야 장군 같은 분을 고의적으로 모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일본의 주장이 맞는 것도 있을 수 있지만, 민간인 학살 부분 등에서는 분명 조작되었고, 특히 한국 독립군이 처형한 러시아 민간인은 1~2명 정도에 불과한 사실 등을 고의로
삭제하는 경우도 많아
저도 지속적으로 글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