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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이사 25,6-10ㄱ
복 음 : 마태 15,29-37
그때에
29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30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31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3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33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36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3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축제인생
-지상에서 천국을 삽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아마 예수님은 예언자들 중 이사야를 가장 좋아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사야 예언서로부터 많은 영감과 삶의 지침도 배웠으리라 봅니다.
바로 이런 점을 교회는 전례에 결정적으로 참고한 듯합니다.
주님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첫째 부분이 끝나는 날 12월16일까지
계속 이어지는 제1독서는 이사야서입니다.
모두 대림시기 하느님의 꿈인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하느님의 꿈은 복음의 예수님뿐 아니라 대림시기 오늘의 우리를 통해서도 실현됨을 봅니다.
이사야가 꿈꾸는 하느님의 꿈은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운지요!
분명 이사야가 살았던 현실은 엄혹한 연옥 같은, 지옥 같은 현실이었을 것이나
이런 현실에서도 하느님을 꿈꾸며 천국을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말 그대로 이런 생생한 하느님의 꿈이, 비전이 있을 때 절망적 현실에 무너지지 않고
지상에서 천국을 살 수 있을 것이며 역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참으로 연옥 같은 현실에서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위태위태하게 하루하루 외롭고 힘겹게 살아갑니다.
하여 휴가를 간다 해도 참 마땅한 거처 찾기가 힘든 것이지요.
이런 현실에 압도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성령의 힘으로
지상에서 천국을 살았던 이사야 예언자요 모든 성인성녀들이었음을 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 역시 그 좋은 증거입니다.
‘기뻐하라’고 많이도 강조한 것도 그의 옥중서간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하느님의 꿈, 이사야의 영감에 넘친 시는
얼마나 원대하고 깊은지 놓치고 싶지 않아 전반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풀리라.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주목되는 말마디가 ‘모든 민족들’, ‘모든 겨레’로 종파를 초월하여
온 인류가 하느님의 구원 대상임을 알려 줍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소망을, 꿈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이사야 예언자요,
그 꿈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
또 지금 거행하는 미사잔치를 통해서 서서히 실현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사야의 하느님 꿈을 실현하여 사시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요,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에서 하느님의 꿈을 앞당겨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하느님의 꿈, 궁극의 미래는 얼마나 고무적이고 아름다운지요.
하느님의 완전 승리로 이룩하신 우리의 영원한 천상 본향인 진짜 천국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이미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은연중 감지되는 천국의 현실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저자도 분명 여기서 영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역시 전 인류의 구원이 하느님의 목적임은 ‘모든 사람’, ‘온 세상’이라는 말마디에서 드러납니다.
이런 현실을 앞당겨 체험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은 미사잔치를 통해 우리의 무지와 병고의 너울과 덮개를 없애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시고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하느님의 소망과 꿈은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 신바람 나게 실현됩니다.
역시 산에 오르시어 자리를 잡고 연옥 같은 지상 한복판에서 천국을 체험토록 하십니다.
불암산을 배경한 우리에게는 더욱 실감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1부는 영육의 치유요, 2부는 영육을 배불리시는 내용입니다.
‘고쳐 주시고 먹이심’으로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하여,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 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은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제1독서 이사야의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어 마치 이들을 구속했던
무지와 병고의 너울과 덮개를 거두시어 자유롭게 하시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지와 병고의 너울과 덮개에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지요.
하여 복음에서와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무지와 병고의 너울과 덮개를 없애 주시지만,
궁극의 온전한 자유는 천상 잔치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주님의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그대로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의 반영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미사잔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은 군중에게 나눠줍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합니다.
그대로 풍성한 미사은총을, 지상에서의 천국 체험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주목 할 바는 예수님이 아닌 제자들이 군중에게 빵을 나눠줬고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기적에 대한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에 감동한 군중들이 숨겨 가진 것들을 다 내놓고 나누니 부족함이 없었다는 해석은
이미 고인이 되신 성자라 일컫는 무위당 장일순 님의 해석이자 어제 읽은 주석의 내용입니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기적에 대한 풀이입니다.
군중을 감동시켜 마음을 열고 가진 것을 다 나누니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진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필요를 위해선 지구 하나로도 충분하지만,
인간의 탐욕을 위해선 지구가 서너 개 있어도 모자란다.”는
20세기 초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의 말도 생각이 납니다.
하느님께 청하기 전 받은 것에 감사하며 가진 것을 함께 나누는 삶이 더 우선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대림시기,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사야의 하느님의 꿈을 실현하여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지상에서 천국을 살게 하십니다.
이사야서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바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이 불암산 위에 머무르신다.”(이사25,9-10ㄱ).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지에서 제가 진행하는 전례가 자기 본당과 다르다면서 항의(?)할 때,
또 제가 쓰는 글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듣게 될 때면 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제 생활을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벌써 20년이 넘었는데, 전례에 어긋난 것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쓴 글이 자기 생각과 다를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항의나 부정적인 말을 듣게 되면 제 안에서 교만이 움터 나오는 것만 같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을 때 겸손한 사제가 되게 해달라고 주님께 그렇게 기도했으면서도 말입니다.
사실 이런 제가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바리사이들은 자신을 선택받은 사람으로 간주해서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다윗 왕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
겸손한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교만의 시작은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라는 생각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다르다는 생각에 교만이 나오고, 이 교만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없게 만들지요.
그런데 성경을 잘 보면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 나 자신이 구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군중이 갖가지 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을 주님께 데리고 옵니다.
군중이 주님께 이들을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의사도 이 병자를 고칠 수 없지만,
예수님만큼은 다른 의사와 달리 병자를 고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병자들의 믿음보다도 군중의 믿음으로 병자들의 병이 낫습니다.
심지어 별 뜻 없이 주님의 발치에 온 사람들도 병이 낫게 됩니다.
아픈 당사자가 아닌, 믿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서 아픈 당사자가 큰 혜택을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흘 동안 굶주리고 있는 군중을 가엾이 여기셔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시지요.
그들은 빵 일곱 개와 조금의 물고기를 내어놓았습니다.
그 결과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습니다.
병자들의 믿음보다 군중의 믿음으로 병자들이 나을 수 있었고,
군중이 가져온 양식보다 제자들의 가지고 있었던 모든 양식
(비록 그 양은 빵 일곱 개와 약간의 물고기로 아주 적었지만)을 통해
모두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구 때문에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교만의 자신을 만들어야 할까요?
그들이 나의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말입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나 있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대림시기”는 자신의 갈망과 마주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갈망으로 목마른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 산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 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마태 15,30)
갈망을 품고, 타인들의 손에 이끌려 산 위에 올라와 있는 이들입니다.
스스로 올라오지도 못해 이끌려와 예수님의 발치에 놓여 있지만,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슴 속에 당신의 음성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또 다가와 면전에 나와 있지만,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불어 넣으십니다.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시고,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단지 고쳐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못 다한 말도 다 들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이르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군중이 치유는 받았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치유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도움이 필요함을 보셨습니다.
마치, 당신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강도 맞은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줄 뿐만 아니라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루카 10,35)라고 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깊고 깊은 사랑의 신비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먹이시고, 미처 바라지도 못했는데도 이미 용서하시고,
뒷날까지도 가엷게 여기시는 그 저린 마음의 사랑을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을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태 15,34-3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있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단지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러니 그것을 우리는 우리에게서 “찾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제자들에게는 빵이 이미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 더하여 물고기도 조금 있었습니다.
“일곱”은 완전함의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것들이 있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또한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광야를 순례하면서, 자꾸만 스스로를 ‘아는 사람’인 양 여깁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찾는 사람’이 순례자입니다.
“참된 빵”인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 그가 진정한 순례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광야”에 있지만, 방황하는 이가 아니라 빛을 따라 길을 걷는 순례자로,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들”(베네딕도의 수도규칙 58,7)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저 군중이 가엽구나.”(마태 15,32)
주님!
당신은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마저도 다 들으시니,
제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비추소서.
제 안에 가엾이 보는 마음을 주소서
제 마음이 당신의 마음이 되게 하소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사랑에는 가치를 부여하는 아가페(십자가)적 사랑이 있고,
가치를 추구하는 에로스(선악과)적 사랑이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와 지성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과 같아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얻기 위한 사랑, 채우기 위한 사랑은 더 큰 갈증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얻어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게 되고,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옷을 입었지만 벌거벗은 양심 때문에 부끄러워집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사랑 때문에 오셨습니다.
사랑하는데 부끄럽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데 원망과 분노가 생긴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이 신앙으로 드러나면 우리는 그것을 영성이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가진 것을 모두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함께 지냈습니다. 영성의 시작입니다.
교회는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감옥에 갇혔고, 바오로 사도는 매를 맞고 버려지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박해를 피해서 이방인에게로 갔고, 이방인들에게 신앙을 전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신자들의 삶을 보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교회는 이것은 선교영성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이방인들 사이에 교회가 커지면서 시기와 박해가 생겼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박해가 커질수록 신앙을 지키려는 열정도 커졌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순교영성이라고 합니다.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기도 했고, 순교자들의 무덤을 찾아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이 성지가 되었습니다.
박해가 끝나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사는 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독신으로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전례를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수도원의 영성은 교회가 세상에 영합할 때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중심을 잡아 주었습니다.
수도원의 영성은 교회가 세상을 부정할 때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주었습니다.
영지주의가 세상에 영합하는 영성이라면, 거짓 종말론과 극단적인 금욕을 강조하는
몬타누스와 마르치온 사상은 세상을 부정하는 영성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의 영성은 악습을 끊어버리고, 향주삼덕과 복음삼덕을 추구하는 영성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면 영성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례와 성사에 충실하다면 영성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면 영성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랑을 식별할 수 있다면 영성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예수님께서도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두려울 것 없습니다.
우리가 영성생활을 충실하게 한다면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에게 위안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태 15, 30)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야할 길이
우리에게는 있다.
밀가루가 아프다고
마냥 주저앉을 수는 없다.
대림의 길은 치유이며
빵이 되는 기쁨의 길이다.
길을 긍정하게 만드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사랑은
치유를 지향하고
치유는
사랑으로 다시 뜨거워진다.
주고받는 것이
사랑이고 치유이다.
서로를 보게 하는 것이
사랑이고 치유이다.
사랑으로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통해
대림의 여정은
소중한 여정이 된다.
소중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신다.
소중한 관계는
건강한 관계이다.
건강한 관계는
소중함의 의미이다.
삶의 의미를
되찾아 주는 것이
고쳐 주시는 사랑이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바라보고
만나는 시간이 대림의 시간이다.
대림은
소외가 아닌 소중함으로
사랑을 배우는 시간이다.
사랑은
아픈 데를 싸매주고
고쳐 주고 나누는
빵의 삶이다.
빵이 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고쳐 주신다.
치유는
빵이 되는
만남임을 믿는다.
기적의 시작: 한 번에 안 되면 하나씩이라도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빵 7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였는데도
남은 빵이 7 바구니에 가득 찼다는 내용입니다.
나누면 부족해져야 당연하지만 나누고 났더니 가졌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아진 상황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풍족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만약 오늘 복음 말씀이 맞는다면 더 많은 이들을 먹이려는 마음이 있으면
더 많은 것이 남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누면 가난해진다는 믿음이 강해서 좀처럼 가진 모든 것을 나눌 줄은 모릅니다.
그러면 이 기적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자들처럼 우리는 그런 기적을 할 믿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해지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우리도 그러한 기적을 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빵 7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수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데 그 적은 양의 음식을 들고 어떻게 감사를 드리실 수 있으셨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의 이러한 마음을 깨닫는 것이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인천 ‘민들레국수집’의 서영남 베드로 대표는
코로나로 무료급식소가 문을 닫는 지금은 250인분의 도시락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모든 운영은 자발적인 기부로 이루어집니다.
서영남 베드로 대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벌려놓기만 했지 정작 예산이라든가 인력이라든가 신경을 하나도 안 썼거든요.
왜냐하면,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거니 했는데,
하느님이 걱정하시기 전에 주변에 착한 분들이 먼저 더 걱정해주시고
십시일반 도와주시고 하니까 넘치지는 않지만 모자라지 않게
우리 손님들에게 나눠드릴 수 있고 그렇습니다.”
서영남 대표는 수도회에 들어갔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다시 사회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수중에 가진 돈은 300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2003년 국숫집을 만들어 식탁 하나에 간이 의자 6개를 놓고 나눔을 시작했습니다.
17년이 지난 지금은 하루에 4~500명의 노숙자, 도시 빈민들에게 무료 음식을 제공합니다.
현재 ‘민들레국수집’, ‘민들레 꿈 공부방’,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 ‘민들레희망지원센터’,
‘노인분들을 위한 무료 국수집’ 등의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옷가지들도 나누어주고 매 월요일엔 모든 노숙인에게 식사와 함께 적게나마 용돈도 줍니다.
더 나아가 민들레국수집의 나눔은 현재 필리핀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서영남 대표는 쉬는 날이면 교도소를 찾아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영치금도 넣어주는 선행을 베풉니다.
그는 말합니다.
“벌써 17년이 흘렀는데 매일매일 고마운 사람을 만나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의 기적은 300만 원에 실망하지 않고 적게나마 가난한 사람과 식탁 하나 놓고
국수 한 그릇 나누고 싶은 작은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처럼 수많은 사람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으로 함께 나눌 소수의 몇 명을 보았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 적은 돈에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복음에서 배고픈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그들에게 음식을 배불리 먹이고 싶다는
예수님의 말에 제자들은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이들은 수많은 군중을 바라보았습니다.
한사람만이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보다는 ‘수많은 사람을 어떻게 다 먹일까?’만 고민하였습니다.
그렇게는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 능력으로 감사하며 나눌 수 있는 사람만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빵 7개를 드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안나의 집’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는 김하종 신부는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매일 체험한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5천 명을 먹이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저희가 하루 7백여 명씩 일주일 음식을 나누면 5천 명이 됩니다.”
김하종 신부는 이렇게 가면 하루에도 5천명도 먹일 날이 올 것입니다.
처음엔 5명이라도 먹이려는 마음으로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큰 기적을 할 용기가 없으면 5천분의 1이라도 하려고 노력해봅시다.
그렇게 5천일이 지나면 5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한 명에 대한 사랑이 기적임을 인정할 때 5천 명에 대한 사랑의 기적도 가능해집니다.
1명을 먹이는 기적을 할 수 있다면 5천 명을 먹이는 기적도 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한 명과 감사히 나눌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