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떻게 밥을 먹고 사는가?
지구라는 별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생김새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음식도 다른데, 그 음식을 먹는 법도 다르다.
고산자 김정호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하도록 독려했던 조선 후기의 실학자 최하기崔漢綺의 글에 우리민족의 구성원들이 생각했던 음식과 그 음식을 먹을 때의 방법이 실려 있다.
“음식은 오장 육부에 양분을 대주고 한 몸을 지탱시키는 것이니, 기혈氣血이 이를 의뢰하여 생겨나고 성명性命이 그것에 힘입어 존재하게 된다. 지나치게 탐내면 병이 일어나고, 적게 먹으면 기氣가 쇠잔해진다. 여럿이 모인 곳에서 밥상을 대하는 얼굴은 태연해야 하며, 혼자 있는 방에서도 밥 뜨는 숫가락에 절도가 있고, 침착해야 한다. 먹을 적에는 말하지 말고 씹을 적에는 성내지 말고, 삼킬 적에는 소리 내지 말고, 씹을 적에도 소리 내지 말아야 한다.
밥을 적에 먹으면서 살찌는 사람은 성품이 너그럽고, 밥을 많이 먹으면서도 마른 사람은 성품이 어지럽다. 천천히 마시는 사람은 성품이 화평하고, 적게 마시는 사람은 기가 짧으며, 입을 오므리고 먹는 사람은 순박. 화평하고, 입을 벌리고 먹는 사람은 게으르다.
음식의 되는 바깥에 있는 체모는 큰 것이고, 자기의 구복口腹을 채우는 것은 사소한 것이니, 불의의 물건을 취해서 음식은 장만하는 것은 흉한 일이요.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주어서 남을 먹이는 것은 길한 일이다.
온 천하의 사람이 경영하는 일은 이 음식을 위한 것이 아님이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주어서 남을 먹이는 것은 기특한 일이다. 귀천 길흉의 판단을 이 음식을 먹고 마시는 데서 결정하지 않고, 밥상을 대하는 행동으로만 판별하려 한다면 이는 진실로 안 되는 일이다.“
최한기의 <음식>이라는 글이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기도 하지만, 오늘의 시대에는 별로 부합되지 않는다.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청나라 때의 장영張英은 <반유십이합설飯有十二合說>에서 조선 사람들의 밥짓는 것을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조선 사람들은 밥 짓기를 잘한다. 밥알에 윤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향긋하고 또 솥 속의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다. 밥짓는 불은 약한 것이 좋고 물은 적어야 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아무렇게나 밥을 짓는다는 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물건을 낭비하는 결과가 난다.“
그렇다면 그 시대를 넘어선 1960년대나 70년대, 그리고 요즘의 밥상풍경은 어떨까?
누구나 어렸을 적, 밥상을 앞에 두고 어른들에게 들었던 말이 한두 가지는 있을 것이다.
나는 손을 방바닥에 짚고 밥을 먹는 버릇이 있었다. 어머님을 그런 나를 보고 땅에 손을 짚고 먹으면 기껏 이루어놓은 일이 다 땅으로 새버린다고 똑 바로 앉아서 먹기를 권했고, 할머님은 나에게 밥 먹을 적에는 말을 하면서 먹지 말라고 하셨다.
‘밥 한 알이라도 흘리지 마라’ ‘소리 내면서 먹지마라’
옛날을 돌아보면 어린 시절 우리에게 주입되었던 문화는 ’에비‘의 즉 ’금기‘가 많은 문화였다. ’에비‘ ’그렇게 하지 마라’ ‘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많았던 문화가 우리 문화였다. 자유스럽게 말하고 웃고 떠들며 밥을 먹어도 괜찮은 서구 민족과 달리 우리나라의 식문화는 해서는 안 될 것이 많은 민족이었다. 그뿐인가, 세상의 모든 일이 그랬다. 금기禁忌를 깼던 사람들의 생은 비참했다.
문득 폴 엘뤼아르의 시< 커브>가 생각난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 된 것을,“
이 시를 제목으로 썼던 소설가가 양귀자였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밥을 먹는가?
2024년 10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