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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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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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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습적인 성의 자유를 상상하고 실천했던 아방가르드 영화의 전통은 언제나 레즈비언, 게이 섹슈얼리티와 함께 하였다. 1920-30년대의 유럽의 아방가르드 영화들 역시 퀴어 정체성에 대한 탐색과 분리될 수 없지만(특히 장 콕토나 장 주네의 작품들) 미국의 아방가르드영화야 말로 관습적 이성애정체성으로부터의 탈주를 꿈꾸었던 상상력으로 포만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우리는 감히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의 역사를 퀴어영화의 계보적 상상을 통해 다시 쓸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스탠 브래키지, 조나스 메카스 그리고 마야 데렌과 같은 본격 모더니즘적인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의 창립자들의 작품에서부터 팝 아트의 심미적 담론 안에서 미국적 생활양식에 대한 냉소적이면서 긍정적인 비평을 수행한 앤디 워홀과 폴 모리세이의 기괴한 아방가르드 혹은 B급영화에 이르기까지,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는 언제나 퀴어들의 그림자에 파묻혀 있었다. <쾌락의 셀룰로이드 궁전 : 케네스 앵거, 잭 스미스 그리고 미국 언더그라운드 영화
Celluloid Dome of Pleasure : Kenneth Anger and Jack Smith in American
Underground Films>는 풍문으로만 떠돌던 미국 언더그라운드 영화의 두 거장인 케네스 앵거와 잭 스미스 감독의 작품들을 최초로 한국의 관객들에게 소개한다. 케네스 앵거의 영화들은 마틴 스콜세지, 데이비드 린치, 라이너 베르느 파스빈더를 비롯한 감독들에게 주목할만한 영향을 미쳤으며 규범적인 성 정체성의 위반을 꿈꾸는
모든 영화들은 언제나 잭 스미스의 영화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아방가르드 영화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추문과 열광을 받았던 이 작품들은 아방가르드 영화를 심각하고 따분한 자기반영적인 형식 실험의 영화로만 알아왔던 관객들에게 새로운 체험의 기회가 될 것이다. 아울러 퀴어 영화의 계보에서 망각되어온 아방가르드 영화의
흐름을 소개하고 알리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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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recto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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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상태에 머물었거나 유실된 영화를 제외하면 모두 9편에 이르는 그의 작품들은 서사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혁신을 꾀함은 물론 시각적인 면에서 그 어떤 영화보다 강렬함이 넘치는 작품을 제작하여 왔다. 특히 그의 첫 공식 상영작이자 끊임없는 압류와 처벌의 위협에 시달렸던 <불꽃>을 통해, 그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문화적 의례와 상징을 대담하게 채용하며 하위문화의 상상력과 아방가르드 영화의 만남을 개척하였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불꽃>은 사도마조히즘적인 동성애적 관능을 대담하게 재현하며 이성애주의적인 규범이 결코 억압할 수 없었던 성애적인 충동을 황홀하게 재현한다. 한편 이 작품으로 인해 케네스 앵거는 장 콕토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파리로 이주하여 다양한 작업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프랑스 체제 동안 그가 제작했던 작품들은 여러 가지 문제(제작비 조달이나 판권 문제 등)로 인해 중단되거나 공개가 금지되고 말았다. 그가 미국으로 귀환한 후에 제작했던 일련의 작품들은 그의 일관된 이교적인 상상력을 연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관된 특성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차 초기 헐리우드 영화의 시각적 환영과 종교적 상징으로부터 점차 벗어나 미국 대중문화에서 찾아낸 다양한 이미지와 대상들을 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걸작으로 알려진 <전갈의 등장>은 폭주족과 대중음악, 나치즘을 숭배하는 청소년 하위문화 등을 연결시키며 미국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그의 탁월한 반성과 향유의 모습을 보여준다. 잭 스미스 Jack Smith 분명 잭 스미스의 영화들은 부박하고 화려한 캠프적인 취미에 흠뻑 빠진 채 어떤 윤리적 명령의 강요도 영향을 미치는 순진무구한 관능과 열정 사이로 유영하는 현대 영화의 괴물들이다. 잭 스미스는 그 스스로 공공연한 게이였으며 자신의 영화에서 당시의 하위문화로부터 비롯된 게이 정체성, 특히 드랙 퀸과 이성복장착용자들, 성전환자들의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을 인용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가 자신의 영화를 통해 재현한 인물들에 대한 그 스스로의 정의였으며 그의 작품 제목에 빈번히 등장하기도 하는 ‘피조물(creatures)’은 매우 시사적이다. 느와르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디즘적인 범죄자나 팜므 파탈이 동성애 정체성의 은유로 전유되었거나 아니면 공포 영화에서 괴물의 이미지를 통해 배제된 자, 비천한 존재로서 자신을 재현했던 동성애자들과 유사하게 잭 스미스 역시 자신의 불법적인 섹슈얼리티를 기괴한 모습의 인물들을 통해 표상한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에서의 비극적이면서도 모호한 존재인 범죄자, 요부, 괴물들과 달리 잭 스미스는 매우 유쾌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이들의 삶을 일종의 문화적 인공물로 가정한다. 즉 잭 스미스는 우리 모두의 삶을 장식과 수사, 색채와 양식화된 몸짓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간주한다. 잭 스미스는 영화 감독일 뿐 아니라 다른 아방가르드 영화 감독들의 배우로서, 사진작가, 연극 연출자, 디제이, 열정적인 의류 수집가, 비평가이기도 하였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현재 잔존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복원이 완료된 <황홀한 피조물>을 비롯한 5편이 상영될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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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은 장 주네의 <사랑의 찬가>와 더불어 퀴어 영화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도발적인 영화적 백일몽으로 볼 수 있다. 초현실주의적 영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앵거는, 이 작품에서 해병에 대한 성적인 환상, 크루징(crusing), 그리고 구타와
성적인 환희의 몽상을 숨막히게 표현한다. <갈색의 순간>은 헐리우드를 강박적으로
숭배했던 앵거의 자취를 보여준다. 영화가 다음 세상의 도래를 알리는 저주의 전조로 확신했던 앵거는 이 작품에서 현실의 피안이자 환상의 전당인 헐리우드를 찬미한다. <인공 연못>은 18세기 풍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휘황한 깃털 머리장식을 얻은 난쟁이와 과장과 장식으로 찬란한 바로크식 연못정원, 비발디의 사계, 이 모든
지극히 캠프적인 요소들을 혼합한다. <악마 형제의 주문>은 아마 앵거의 작품 가운데 가장 악마적인 작품일 것이다. 베트남에 상륙하는 미군병사들의 모습과 나체 소년들의 이미지를 교차시키면서 앵거는 미국 자본주의의 욕망의 정치학을 넌지시 암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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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궁전의 창립>은 앵거가 평생 사로잡혔던 알레스터 크롤리의 신비주의의 의례를 재연한다. 혼란과 분열의 힘을 향한 서원(誓願), 그리고 이를 통해 신과 여신을
영접하고 보다 상승된 자아를 찾으려는 의례를 통해 앵거는 마법의 영화라는 자신의 믿음을 실천한다. 그리고 성 정체성을 의식과 변장(passing)의 행위로 바라보는
그의 게이적 감수성을 새겨 넣는다. <전갈의 등장>은 아마 <불꽃>과 더불어 앵거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자 또한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그의 대표작이다. 장 콕토의 초청으로 오랜 기간동안 프랑스에 체제하다 미국으로 돌아온 앵거는 이 작품에서 청소년문화의 화신인 오토바이 폭주족을 그린다. 게이 포르노그라피나 당시
성행하던 게이 육체미잡지의 이미지들을 인용하고, 페티시즘적인 의상들(가죽자켓,
청바지, 징, 벨트 등)을 탐미적으로 응시하면서, 또는 유행하던 록큰롤 사운드 트랙을 화면의 내용과 무관하게 끼워놓으며 관능이 넘치는 사회적 풍경을 만들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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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의 달>은 즉흥적인 가면희극과 일본의 신화를 결합한 우화적인 작품으로, 최근 타계한 미국 아방가르드영화의 거장 스탠 브래키지는 이 작품이 앵거 자신의 자전적 묘사로서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작품이라 극찬하였다. <루시퍼의 등장>과 <교수형을 원했던 사람>은 앵거가 열광했던 신비주의의 연장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각적인 음악으로 불리기도 하는 <루시퍼의 등장>은 기독교의 루시퍼에
대한 인식에 도전하며 범신론적인 풍자를 행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종교극과는 전연 무관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향연일 뿐이다. 10년에 걸쳐 재편집된 이 작품을 통해
앵거는 강박과 광기에 가까운 자신의 이교적 상상력을 동원하며 탈기독교적인 세계의 신화를 상상한다. 마리안느 페이스풀과 앵거 자신이 출연한다. 최근작인 <교수형을 원했던 사람>은 알레스터 크롤리에 대한 전기적 비망록이라 할 수 있다. 그를
둘러싼 추문과 증오, 그리고 숭배와 열광의 기록을 통해, 앵거는 그가 숭배했던 사제의 영혼을 다시 불러내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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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치 테이프>는 쓰레기더미의 도시에 대한 잭 스미스의 심미적 애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기에서 잭 스미스는 훗날 링컨 센터가 들어서게 된 장소를 어슬렁거리며 보여준다. 물론 이 작품은 물리적 장소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현대의 폐허에 대한 시적인 콜라주이다. <과잉자극>역시 잭 스미스의 다양한 카메라 작업의 편집본으로 “착란의 영화”를 꿈꾸었던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 작품 역시 상영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 공연을 위한 재료였음은 물론이다. <황홀한 피조물>은 아마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의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저주와 축복의 작품일 것이다. 미국 의회의
청문회의 대상이었으며 미국 전역에서 금지와 압류 처분을 받았고 항의 상영과 시위, 청원이 잇달았던 이 작품은 물론 영화의 역사상 가장 추앙받은 컬트 중의 하나이다. 캠프적인 미학을 응축하고 있는 이 전무후무한 이단적인 작품은 도착적이며
비순응적인 정의불가능한 성의 주체들의 사육제를 극화하며, 저속하면서도 또한 극한적으로 숭고한 그러나 표면만이 존재하는 실낙원의 인물들을 재연한다. 아마 모든 캠프적 영화들은, 요컨대 <핑크 플라멩고>에서 <헤드윅과 앵그리 인치>까지, <황홀한 피조물>에 진 빚을 갚지 못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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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잭 스미스의 영화는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그가 카메라로 촬영한 기이한 영화들을 영화에 대한 우리의 표준적인 지식에 따라 영화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귀신과도 같은 솜씨로 극장에서 자신의 영화들을 매번 상영회마다 재편집하여
상영했으며, 또한 다양한 퍼포먼스와 사운드를 그에 덧붙였다. 이런 그의 영화에 대한 비상한 접근은 또한 영화의 활용을 염두에 둔 독특한 영화의 촬영과 제작, 편집을 가능케 하였다. <노 프레지던트>는 그가 즐겨 사용했던 평면회화적 영화이다. 이
작품에서 잭 스미스는 미국 대통령 후보였던 웬델 윌키( Wendell Willkie)에 관한 기록 필름과 뉴욕 언더그라운드 스타들의 연기를 뒤섞으며 그의 캠프적인 감수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나는 남자 이본느 드카를로였다> 역시 잭 스미스의 라이브 퍼포먼스와 슬라이드 쇼에 사용되었던 작품이다. 이본느 드카를로는 평생 동안 잭 스미스가 숭배했던 헐리우드의 여배우 마리아 모네츠의 적수였던 유명한 여배우를 가리킨다. 이 작품에서 잭 스미스는 스스로 이본느 드카를로 역을 맡아 연기한다. 잭
스미스는 미국 언더그라운드 연극(오프-오프-브로드웨이로 불리는)의 유명한 배우이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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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골드밀로우는 <로이 콘/잭 스미스>에서 기괴한 인물의 대구법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론 보우터(Rawn Vawter)의 같은 이름으로 공연된 연극을 영화적으로 재연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론 보우터는 로이 콘과 잭 스미스를 번갈아 연기하며 이
두 인물의 대조적인 삶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로이 콘은 미국의 가장 악명높은 극우보수주의자이며 또한 벽장 속에 숨어지냈던 게이. 매카시 선풍을 주도했으며 빨갱이 사냥의 선두에 섰고 가족계획협회의 만찬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자식들인 동성애자들에게 벼락이 떨어질 것이라고 일갈했던 측은한 괴물. 그러나 그 역시 처신에 능한 변호사로서 그리고 정치모리배이자 협잡선동꾼으로서 미국의 동성애혐오적인
우익 남성으로 변장하며 지냈던 드랙(drag)이었을 것이다. 반면 아방가르드 감독이자 예술가였던 잭 스미스는 그런 이성애적 정체성에 포획되고 동일화되기를 저항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가장했던 드랙이었다. 이 두 인물의 가장 속에서 질 골드밀로우는 전연 다른 두 인물의 행적을 관류하는 20세기 성의 정치를 폭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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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벽두부터 지하 세계의 게이들에게 열광과 소문의 대상이 되어 떠돌았던
저주받은 걸작 <핑크 나르시수스>는 이제 그 실명을 되찾으며 20세기 퀴어 영화의
고전의 목록에 등재되었다. 아울러 소문과 억측에 휩싸였던 감독 역시 최근 “제임스 비드굿”이란 인물 임으로 판명되었다. <핑크 나르시수스>는 이제 그 어느 누구도 능가하기 불가능한 캠프적인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아라비아의 이국적인 음악, 복종적인 노예와 그들의 춤과 음악 그리고 황홀한 성적인 시중, 그리고 세상의
모든 반짝이는 것들을 수집하고 전시한듯한 로코코적인 실내의 세트, 그리고 주인공인 허슬러, 바비 켄달의 눈부신 몸 등은 줄곧 숭배와 인용의 대상이 되었다. 캠프적인 것이 무엇인지, 퀴어적인 감수성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 모든
답변을 제공해주는 걸작 혹은 미학적 편집증. 서울퀴어아카이브에서는 현재 남아있는 프린트 본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부득이하게 비디오를 상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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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제측의 사정으로 시간표나 상영작이 변동될 수도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