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4월 12일 이경현의 비극
고3때 하숙을 했다. 아침 등굣길의 경우 40분이 족히 걸리는 거리의 학교에 배정받은 터라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우리 집은 ‘교대앞’ 전철역에 있었다. 교대는 부산 교육대학교, 부산교대를 의미한다. 일요일 집에 왔을 때 바람 쐰다는 핑계로 캠퍼스도 거닐어 보고, 축제 때는 구경도 가서 이름으로 뿐만 아니라 풍경으로도 기억되는 학교다. 크지는 않지만 아담한 캠퍼스, 남자보다는 여자가 많아 고딩을 들뜨게 했던 그 평화로운 학교도 80년대를 빗겨나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86년 2월까지는 시위 한 번도 없이 잠잠했지만 졸업식에서 전단이 뿌려지고 그 해 말에는 10여일의 수업거부라는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고 6월항쟁 때에는 교생 실습 나간 4학년들까지도 신분상 불이익을 무릅쓰고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1989년.
1988년까지는 이른바 유화국면이었다. 물론 백골단들의 무자비한 폭력이야 여전했지만 전반적으로 몽둥이의 각도는 낮았고 방패의 날은 둔했다. 그러나 89년 초 현대중공업 파업 사태와 문익환 목사님 방북 등으로 공안당국이 조성되면서 상황은 변했다. 학생들을 잡아채는 손아귀에 인정과 사정이 사라졌고 심지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위협 사격을 벌이는 일까지도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 경찰이 들어온 것을 89년도에 처음 보았거니와 부산교대처럼 여학생 많은 학교의 경우 경찰은 스스럼없이 군홧발을 들이밀곤 했다.
1989년 4월 12일도 그런 날이었다. 4월 7일 서울교대생 남태현이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다. 부산 교대에서는 남태현 학생에 대한 추모 집회가 열렸고 그 집회가 거의 끝날 즈음, 교대 전철역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전경 대열은 교대 교문을 박차고 들어가 학생들을 덮친다. 일단 물리력에서 상대가 안되는 싸움,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백골단도 혼비백산한 양들의 목줄기를 물고 늘어지는 늑대처럼 사방을 내달렸다. 그 와중에 한 여학생이 쓰러졌다. 그리고 머리에 강력한 타격을 받았다. 전경이 방패를 내리치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경찰은 부인했고 넘어지며 돌에 부딪쳤다고 주장했다. 그 애매한 정황은 법정 판결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도망가는 원고 이경현을 뒤쫓던 진압경찰 중의 누군가가 이 사건 발생 지점에서 이경현의 오른쪽 아래 부분의 신체 일부를 가격하거나 심하게 밀어 버렸고, 같은 원고는 그 충격으로 중심을 잃고 길바닥에 넘어지면서 길바닥과 그 곳에 널려있는 깨어진 돌조각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혀 이 사건 상해를 입었다고 추단된다.”
86학번으로서 부산교대 윤리교육학과 4학년이었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행복한 교사 생활을 꿈꾸던 이경현은 그 길로 뇌사 상태에 빠져든다. 경찰의 막가는 진압이 부른 비극이었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꼼짝없이 누워 있던 그녀의 곁으로 역사의 격류는 사정없이 흐른다. 바로 내가 다닌 고등학교 옆에 있던 동의대학교에서는 5.3사태로 전경들이 죽었고, 조선대에서는 이철규가 죽었다. 그 와중에 열사의 시신 부여안고 평양에 가자고 왈츠를 췄고 통일의 꽃은 평양에서 피어났다. 동유럽이 무너지고 서른 잔치는 끝나버렸다. 그녀의 동기들은 선생님이 됐고, 이윽고 새까만 후배들도 학사모를 쓰고 교단에 섰다. 하지만 그녀는 누워 있었다.
10개월이 지나고서야 겨우 눈을 떴지만 이미 발생한 뇌손상과 후유증으로 그녀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지능은 서너 살 정도에 오른쪽은 마비됐다.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그대로 넘어져 버려 깨진 안경 유리에 눈을 잃을 뻔 하기도 했다. 문재인 변호사의 도움으로 국가에 손배소를 내기도 했지만 법정은 “방패로 찍었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불법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국가의 손해를 35%만 인정했다. 억울했지만 상고할 여력이 없었다. 그 돈이라도 받아 병원비를 해야 했다. 그 기막힌 세월 동안 이경현은 꾸준히 그림을 그린다. 마비된 오른손을 대신한 왼손으로.
그래도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교대생들은 해마다 4월 12일이 되면 4.12의 비극을 상기하며 이경현의 이름을 곱씹었고 이경현을 돕고자 만든 ‘참빛교육사업회’ 동기 후배들은 학교측에 이경현에게 명예 졸업장이라도 주자는 청원을 한다. 그 청원이 받아들여진 것이 2007년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지만 얼굴을 움직여 그녀의 기쁨을 표현하기에는 그녀는 너무 굳어 있었다.
그러나 부산교대 학군단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칼을 세워 만든 문을 통과하면서, 전시된 자신의 그림들을 보면서, 그리고 이제는 어엿한 중견 선생님이 된 친구들 사이에서 그녀는 엷은, 때로는 짙은 웃음을 얼굴에 그렸다. 그 서글프게 흐뭇한 풍경과 오른손을 잃은 그녀가 왼손으로 그린 정성스런 그림들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 “이경현 명예 졸업”을 구글링하시면 된다.
그 이후 6년 동안 그녀의 삶은 검색되지 않는다. 6년 전에는 활발히 가동된 듯 보이는 홈페이지도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는지 없는 주소로 나온다. 그즈음 한겨레신문 2월 14일자에 나온 아버지의 인터뷰는 그래서 짠하다. “병실에서 사경을 헤매던 경현이를 보고 갔던 3명이 대통령이 됐지만 경현이는 아직도 군사독재정권과 싸우고 있다...... 참여정부가 끝나면 민주화보상 심의조차 받을 수 없는게 아닌가 걱정된다.” 그때가 2007년 그 다음해에는 삽질하면 생각나는 그 사람이 왔고,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어떤 시대가 올 것인가를.
어머니는 “나와 남편이 죽고 나면 경현이는 누가 돌보느냐”며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그리고 기사에 따르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어머니와 어버지의 말을 곁에서 듣고만 있던 이씨의 눈에서도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았는데 그 상처가 이룬 영광을 휘감은 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그들을 뒤로 하고 바삐 길 달려온 많은 친구들은 그들을 어떻게 기억할지. 그냥 슬픈 날이다. 2013년 4월 12일 부산 교대에는 4.12를 상기하는 플래카드가 나붙어 있었을까. 하나라도 걸려 있었다면 다행이겠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