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10,080시간 후 - 시작은 결혼식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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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라고라도 말할걸 그랬나.."
한 남자가 검게 변한 휴대폰 액정을 엄지손가락을 톡톡치며 홀로 중얼거렸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서재.
그리고 그 서재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남자가 자신의 의자에 기대어 홀로 고민하고 있다.
"이제...다 끝난건가."
몇분의 정적을 이어가던 서재 안 조용히 울려퍼지는 남자의 마치 다 포기했다는 듯한 말이 듣는이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한때는 사랑한다 믿었는데...쿡..."
그 말을 내뱉는 남자의 시선이 자신의 책상 서랍을 향했다.
열쇠로 열어야 열리는 굳게 잠겨져있는 책상 서랍을 한참 바라보던 남자는 자신의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왜!!왜!!왜!!!"
방음이 철저한 서재 안이라 그렇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분명 밖까지 들렸을 커다란 목소리로 늘 차분하기만 할 것 같던 남자가 소리를 지르고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져 버렸다.
휴대폰이 어딘가에 부딪혀 나뒹구는 소리만이 마치 폭풍전야 같은 서재 안에 울려퍼졌다.
"한시은...한시은...젠장."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손톱을 물어뜯는 남자.
이것은 그가 정말 급박하고 초조할때 나오는 습관이다.
한시은이 생각하기에는 현재 누구보다 행복할것 같다는 그, 아니 여다진이 초조해하고 있다.
어째서..어째서..어째서..모든게 그의 바람대로 되었을 터인데.
그때 서재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여자.
정말 바람불면 날아갈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녀린 여자가 서재안에 들어왔다.
"아..."
"다진아...내가 무리하지 말랬잖아. 그냥 다시 그녀에게 가."
가녀린 여자의 말에 여다진이 정신을 차렸는지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의 입술을 손으로 매만진다.
하지만 그것뿐 그는 그녀에게 키스하지 않는다.
"네가 이러는 것 나나 그 여자나 둘다 고통스러워. 한가지 말해줄까. 너 지금 이혼 24시간째야. 고작...고작 24시간...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고..그런데도...그런데도...이러면서.."
여인의 음성에 남자의 눈동자가 미친듯이 흔들렸다.
"하루나 지난거야."
"여다진, 너는 이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사랑으로 가득찬 남자의 눈빛이 아니야. 너는 이제 그녀를 보면 사랑으로 가득찬 남자의 눈빛으로 변한다고...정신차려."
여자의 말에 남자는 결국 소리를 지르며 책상을 쳤다.
여자는 남자를 안쓰럽게 바라보다 서재를 나섰다.
여자의 눈은 슬프게 빛나고 있었다.
"아...악!!!"
여다진은 소리를 지르고 의자에 몸을 파묻고 한시은을 만난 첫날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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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음식냄새가 가득 퍼지는...언뜻보면 행복하게 보일수 있는 너무나도 넓은 집.
여자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옆에 없는 남자를 그리워하고 찾고 있었다.
그러다 현실을 깨닫고는 생기없는 눈동자로 남자의 흔적을 찾았다.
여자의 눈동자는 한 커다란 인형에 멈추었다.
못생긴 인형.
하지만 여자의..아니 한시은의 눈에는 그 어떤 인형보다 귀여운 인형에 그녀의 눈동자가 멈추었다.
한시은은 그 인형의 검은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여다진과의 첫날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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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추운 겨울이 점차 사그라져가고 새 생명이 태어날때인 3월 5일 그 날이 한시은과 여다진의 비극적이지만 행복한 운명의 공식적으로 시작된 날이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고 턱시도를 입은 신랑은 세상 그 누구보다 잘생겼다.
그야말로 선남선녀로 칭송하는 하객들.
하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하나도 기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나 아직 내 신랑 얼굴..한번도 못 봤다고!! 아빠, 나 이 결혼 파탄내고 갈거야."
"아주 잘 가봐라. 단에 올라와서는..."
3월 5일 나 한시은은 오늘부로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간다.
파릇파릇한 26살에 나이에...조강지처가 될수는 없겠지만 되라고 강요받으면 시집간다.
그것도..비지니스 때문에...
비지니스 결혼이야 아주..
지금 나의 눈에는 내가 신랑에게 걸어갈때마다 박수를 쳐대는 저 하객들 조차 가식적이고 돈 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보인다.
"쳇..먹고살만큼만 있으면 되지...뭘 더 잘 벌겠다고 딸까지 파시는지..."
"한시은 계속 중얼거리지 말고 남편한테 잘 해라."
아빠의 반협박이 좀 무서워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면사포를 뒤집어써서 아무도 모르겠지만.
"여사장..내 딸 부족하지만 데려가줘서 고맙네."
"아빠..."
면사포 너머의 아빠를 째려보았지만 아빠는 뒤도 안 돌아보고는 나를 처음보는 남자에게 넘겨주고 갔다.
하...우씨..이 결혼 다 뒤엎고 가버릴까.
"신부..신부님!"
"아 씨...아..아니 이게 아니고 네."
아 씨라고 한 순간 난 보았다.
순간 당황해 모두가 얼음이 된 그 순간.
"끄...끅..끄.."
옆을 보니 남편이 소리 죽여 웃고있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게..
그렇다. 내 남편은 나보다 3살이나 어렸다.
23살.
파릇파릇..웬지 자라나는 새싹을 꺽어버리는 것 같아 기분 더럽지만 뭐 나도 팔려가는거라고!
"신..신부님...그..저..신랑을 평생 사랑하실겁니까."
"음...네."
핫 나 5초나 뜸들였다.
남편은 바로 대답했는데.
나 좀 대단한가봐.
그거 대답하고 좀 있으니 이제 슬슬 결혼식이 마무리 될려고 한다.
하지만...아주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신랑, 신부 그럼 맹약의 키스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의 결혼식을 숨죽여 지켜보던 기자들의 카메라가 갑자기 번쩍거리려고 준비하기 시작한다.
아..우리 남편도 대단한집 자제분이다.
우리나라의 1위, 2위 정도의 재벌.
나는 그 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기업의 소중한 딸이랄까.
그렇기에 이 결혼식에서 까딱 잘못하면 저 기자들의 손에 우리는 꼭두각시가 되어 굴러다녀야 된다는 것이지.
아무튼 나 정말 키스를 해야하니...
일단 남편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긴 한데.
웬지 침삼키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나의 남편은 어떡할지 고심하는듯 꼼지락 거리고 있다.
에이씨, 어차피 남편인데 뭐..
그런생각으로 나는 내 면사포를 입술위까지 걷어올리고 나보다 좀 더 높은 남편의 입술에 입술을 맞댔다.
남편은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정상으로 돌아온다.
입술을 떼고 셔터소리와 사람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며 우리의 결혼식은 끝났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 악연, 인연 이 3가지 단어 중 하나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