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미치겠어 너 때문에
다행히 상영시간이 얼마 안남은 영화표를 살 수 있었고 팝콘과 콜라를 들고 우린 상영관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은성이의 표정은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지만 난 지금 너무나 두근거렸다.
그래. 이제 얼마 안남았는데 쪽팔리고 자시고 뭐가 있겠어!! 제대로 대쉬해보는 거야!!! 하지만 과연 내가 잘 할수 있을까...?
“갑자기 왠 영화야?”
“빨리도 물어본다.”
“니가 물어볼 시간도 안주고 끌고 왔잖아.”
“그냥. 갑자기 땡기는데 옆에 있는게 너길래.”
“지금 막 퇴원한 사람을 이렇게 끌고 와도 되는거야?”
“그러게 누가 하루아침에 완쾌하래?”
“아, 진짜. 송하나 넌 내가 건강한게 싫냐?”
실없는 말장난을 조용조용하며 광고가 끝나길 기다렸다. 이런 사소한 것도 지금의 나한텐 너무나도 소중했다.
은성아 난 니가 항상 건강했으면 좋겠어. 한번 아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질리도록 건강했으면 좋겠어. 니가 더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은성아.
니가...항상 웃었으면 좋겠어.
“아니. 퇴원 기념이지.”
“너 그게 말이 된...야 잠깐.”
“어?”
“너...이런 취향이었어?”
“그게 무...”
오 마이 갓뜨...잠깐만. 이건 아니잖아. 그제서야 난 상영관 전체를 한바퀴 쓱 훑었다. 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까...
“엄마 코끼! 코끼!”
“승우야 저건 토끼야 토끼. 깡총깡총 뛰는 토끼.”
상영관이 잠시 환해진 틈을 타 제빨리 영화표를 확인했다.
<동물친구들의 수수께끼 대모험!>
이 유치하다 못해 치가 떨리는 제목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쪽팔림에 얼굴이 붉게 물들여졌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왜 교복을 입고 들어온 우리를 계속 쳐다봤는지 이해가 갔다. 젠장 그래서 입구쪽에 있던 직원이 썩소를 지었던 거구만.
“...너 알고 예매 했어?”
“미쳤어?! ...그냥 지금 빨리 나가자...”
쪽팔린다. 정말 쪽팔려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까 나한테 이 영화표 쥐어준 여직원...내가 7일안에 목따고 만다. 정말 쥐구멍을 만들어서라도 숨고싶었다.
찌익- 찍-
상영관을 빠져나오자 마자 가차없이 영화표를 찢었다. 분이 풀리지 않는다. 아니 그 직원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이런 표를 쥐어준거야?! 매표소앞에서 눈을 굴려 봤지만 그 직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걸리기만해 죽여버리겠어.
아깝다. 내 돈이 너무 아깝다. 젠장. 손에 쥐어진 팝콘과 콜라가 괜시리 짜증난다. 저딴거나 볼라고 이렇게 준비했다니...만원이 넘는 돈을 한순간의 선택으로 날려버렸다. 절대 주식은 하지 말아야지.
“너, 풉! 아, 내가 이 일은 큭! 아, 아무 한테도 말 안할게 푸흡!”
“됬어. 그냥 웃어.”
“아냐, 풉!”
영화관을 빠져나오면서 은성이는 웃음를 참지 못하고 계속 큭큭 거렸다. 난 덕분에 사과보다 더 빨개져선 이만 갈고 있었다.
“진짜 미치겠어, 너 때문에.”
손을 들어 내 머리위에 올리고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너 때문에 나도 미쳐버릴것 같아. 정신이 아찔해진다. 이기적이겠지만 니가 미쳐버리는 이유가 나와 같았으면 좋겠어.
단순히 구제불능인 나때문에 뒷처리가 힘들고 이상해서 미쳐버리겠다는 건지 아님 정말...나란 여자 하나때문에 미쳐버리겠다는 건지.
나...마지막이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자꾸만 너에게 기대게되 은성아. 니가 날 좋아했으면 좋겠단 마음이 자꾸만 들어 은성아. 이러면 안되는데 더 간절히 널 원하게 돼 은성아.
“어떻게 유치원생들이 볼법한 영화를 끊어 올수 있냐? 그걸 끊어주긴 해?”
“몰라! 난 그냥 지금 바로 볼 수 있는 영화 두명 달라그랬단 말이야!!”
“못 산다 못 살아. 이건 순진한거야 바보인거야?”
“그냥 욕을해라. 난 다 받을 준비가 되어있다.”
애석하게 콜라를 빨며 은성이에게 팝콘을 넘겼다. 그러자 큭큭거리면서도 팝콘을 한웅큼 쥐어 먹는 은성이다.
이게 뭐야 진짜. 샤렌을 만난뒤로 아니 그때 그날 이후로 모든게 엉망진창이다. 도주극을 펼치면서 스실러도 찍고 학교에 되지도 않는 봉사도 하고 아니 제일 엉망진창인건 바로 저승사자를 만난것이 아닐까.
그나저나 샤렌은 뭘 하고 있을까. 설마 삐친건 아니겠지? 눈살을 찌푸리며 어린아이 모습으로 뒤 돌아 있을 샤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꼬륵-
...아니야. 아니라고 말해줘. 제발. 플리즈!!!
“...뭐 좀 먹을까...?”
“아니 괜...”
꼬르륵-
“......”
“......”
보지마. 보지마 은성아. 듣지마. 듣지마 은성아.아 진짜 울고싶다. 내 인생은 대체 왜 이러지? 예쁘게 보여도 모자랄 판에 난 뭐하는 거냐고!!! 이러다 그냥 ‘이상한 애'로 기억되는거 아냐?!
오, 제발...저에게 시련을 그만좀 주세요 메시아여.
“다시 묻는다. 뭐 먹으러 갈래?”
“그래, 가자!!!!!”
“미쳐.”
그래 난 은성이에게 사랑을 주는 어여쁜 여자가 아니라 개그를 주는 웃긴 여자였다. 인정할건 인정하자 이제.
“딱히 문연데가 없네...팝콘이라도 먹...”
“응?”
“아냐. 다 먹었네.”
난 배고팠어 은성아. 이해해줘. 나도 이런 내가 싫다.
내 손에는 빈 팝콘통과 빈 콜라통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난 지금 먹을데를 찾는것보다 이젠 짐이 되버린 이 쓰레기들을 버릴 쓰레기통이 더 절실하게 필요했다.
“편의점 갈래?”
“응!”
♪-
“어서오세요.”
알바생의 피곤함이 잔뜩 묻은 목소릴 뒤로 하고 난 삼각김밥이 있는 코너로 돌진했다. 분명 은성이는 그 알바생한테도 고개를 꾸벅하며 미소를 지었겠지. 다행인건 알바생이 남자란거다. 설마 게이는 아니겠지?
“은성아 넌 뭐 먹을래?”
“난 아무거나 상관없는데.”
“와사비하나 쥐어주기 전에 골라.”
“...너 그러는거 아니다 진짜.”
구박하는 표정을 지으며 참치마요삼각김밥을 쥐어드는 은성이를 보며 난 그저 헤실거리며 웃었다. 그에게는 그저 먹을게 쥐어져 행복해진 바보같은 여자라고 비춰질까.
“줘. 내가 계산할게.”
“아, 괜...”
“영화값 많이 날렸잖아?”
“야 너 진짜!!”
내 손에 쥔 그와 같른 종류의 삼각김밥을 가져들더니 대신 계산해주려는 은성이. 마지막 저 말만 빼면 참 좋을텐데 말이야. 이렇게 보면 역시 장난끼많은 남자애들 같다니까.
“커플이신가봐요.”
“예?
계산대 앞에서 입맛을 다시며 삼각김밥을 보고있던 나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려던 은성이가 동시에 멈춰서 알바생을 올려다 보며 외쳤다.
벌게진 얼굴을 한채 입을 열을려고 했지만 괜히 궁금해져 멍하니 은성이를 바라봤다. 옆에서 본 은성이 또한 멍해져선 입만 벙긋대고 있었고 괜히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은 은성이를 보며 멍청하게 설렜다.
아 얘도 혹시 나랑 같은 맘인가 하는 쓸데없는 기대를 하며.
“아니에요.”
결국 어색하게 웃으며 먼저 말을 꺼낸건 다름아닌 나 송하나였다. 적막이 걷히자 괜히 더 어색해짐을 느끼며 은성이가 조용히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기척을 느꼈을때 별안간 흰 종이가 내 앞에 모습을 들어냈다. 뭐지?
“그럼 번호좀 주세요.”
“예?!”
잠깐만. 뭐? 나...나 지금 번호따인거야?!
툭-
이번엔 아예 지갑을 땅에 떨어뜨린 은성이가 보이고 고개를 들어보자 여심 저격할정도의 미소를 지으며 핸썸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는 알바생이 보였다. 아, 코피. 고놈 참 잘생겼네.
아, 아니지 이게. 잠깐 너무 당황스럽다. 설마 내 얼굴을 자세히 못봐서 이런 실수를 저지른 걸까? 대체 어떻게 해야되지?
“저...저한테 하신...”
“네. 너한테 한건데.”
눈웃음을 지으며 날 내려다 보는 알바생이 이렇게 잘난 외모를 지니지 않았다면 난 분명 앞에 놓인 볼펜과 종이를 알바생의 얼굴이 아닌 사타구니사이에 던져놓고선 은성이에게 나 이런여자라며 어필을 했겠지만 이사람은...
너무 잘생겼고 목소리도 꿀성대였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데 지금은 그 말에 적극 찬성하는 바 입니다.
홀리듯 그 알바생을 바라보며 입 찢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저기요.”
스슥-
날이 서게 웃는 은성이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찼다.
“남자한테 관심있는 줄은 몰랐네요.”
볼펜을 쥐어 망설임 없이 자기번호를 휘갈기는 은성이를 멍하니 바라보는 나와 알바생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만 갔다.
“아니, 야...!!!”
“힘내세요.”
“야!!!!!!!! 내가 언제 니놈 번호 달래?!!!!”
♪-
내 손을 꼭 쥐고선 삼각김밥이 든 비닐봉지를 다른손에 쥐고 빠른걸음으로 편의점을 나서는 은성이 때문에 나역시 놀란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의 뒤통수만 멍하니 바라봤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생전 따여보지도 못해 쓸모없는 번호를 훈남 알바생한테 따일뻔하고. 그걸 옆에 있던 은성이가 보고선 내 번호 대신 자기 번호를 멋지게 휘갈기고선 편의점을 퇴장하다니...성에 찬 알바생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들리는것 같았다.
“지은성...!!!”
“......”
“야아!!!!”
“나 화났어.”
“뭐?!”
다짜고짜 끌고가는 은성이를 목에 힘 팍 주고선 불렀지만 그는 동문서답을 한채 갑자기 우뚝 멈춰주는 행동을 범해줬다.
“나 화났어. 너 때문에.”
“화날게 뭐가 있다고...”
“몰라. 근데 화나 너 때문에.”
“지은성?”
“아, 씨.”
거칠게 머리를 헝크러트리며 짙은 한숨을 내뱉는 은성이가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왜 화가난다는 거야 은성아? 너 원래 남한테 이렇게 무례한 행동 하는 애 아니였잖아. 갑자기 왜 그런 행동을 보여서 괜히 날 흔들어놔?
이제 정말 얼마 안남았는데...너 잊을 시간을 줘야지 왜 새로운 모습만 보여줘서 널 더 기억하게 만들어 지은성?
“짜증나. 그냥...미치겠어.”
“어디 아파?”
“미치겠어 송하나. 나 너 때문에 미칠것 같아.”
“얘가 너무 많이 맞아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갑자기 왜 그래. 너도 배고파?”
안 돼. 안 돼 은성아. 지금은 타이밍이 너무 안좋잖아. 내가 생각하는게 맞으면 우리 정말...너무 슬픈거잖아.
“아, 배고프다!! 삼각김밥 하면 나지. 잘봐 한번에 까줄테니까.”
은성이가 쥔 편의점 봉지속에서 손을 넣어 삼각김밥 하나를 쥐고 나조차도 놀랄 정도의 빠르기로 비닐을 벗겨내 그대로 은성이 입속으로 밀어넣어버렸다.
“우읍!!”
“누나가 깐거 맛있지?”
바보처럼 웃으면서 이번엔 천천히 비닐을 벗기며 비닐봉지 속으로 넣고 삼각김밥을 한입베어물었다.
“맛 느끼기도 전에 질식사 하겠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잖아?”
결국 우린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끝날 운명이었나 보다. 그저 그렇게 남을 운명이었나 보다. 괜시리 울적해지는 마음에 더 실실 헤프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건 은성이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