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 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제가 한번 적어 볼께요. 여기서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그 앞에 뭐가 붙지요?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까? “내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 했는데, 예수님의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내'라는 것은 붙음으로 말미암아, ‘현재 당신이 갖고 있는 하나님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어요. 이것 참 어려운 거예요.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뜻이에요. 만약에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그냥 하나님으로 알고 믿는다면 당신은 ‘내 하나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뜻이 됩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다. 신이라는 것은 ‘일자’(一者)죠. 하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인데. 신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 최후에 계시는 분 - 이걸 ‘궁극선’이라고 하는데. ‘궁극선’이라는 무슨 뜻인지 아시죠? - 가장 최고의 마지막 자리에 신이 있기 때문에 그 신을 인정하면 누가 보더라도 그 신을 인정하는 것으로 알잖아요.
쉽게 말해서 신을 믿는다면, 그 신이 예수님의 신이든 누구의 신이든 동일한 신일것이라고 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소개하는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고, 그 외에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되면 하나님이 어떻게 되요? 하나님이 둘로 나눠 지지요?
한쪽은,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죠. 또 한쪽은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죠.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다르죠? 제가 질문하나 해볼께요? 일반인들 가운데서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자력으로 알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자력으로. 모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하나님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외곽에 있어요. 외곽에. 외곽알죠? 변두리. 예수님이 알고 있는 진짜 하나님은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으로서는 도저히 알수 없게 숨어 계신 분이고, 아무리 찾을래야 찾을수가 없는 하나님이에요. 숨어 있는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님께서 자기 하나님에 대한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능력을 주셨을때, 그때에만 예수님의 하나님을 비로소 알수 있습니다.
그때에만 붙이는 이름이 그 뒤에 나오는 바로 20장 17절의 “너희 하나님”입니다. “내 아버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너희 하나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8월초에 대구에 있는 세종수련원에서 ‘종말론’에 대해서 강의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공부하고 있느냐 하면,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이것을 다 다룰 예정이에요.
왜냐하면 그때 그들이 비로소 종말이라는 것을 처음 끄집어내기 때문이죠. 그것을 죽 공부하면서 제가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줄때는 그 말씀을 붙들면 미끄러지도록 되어 있는 말씀을 준다는 거죠. 산에서 빙벽이라고 하는데, 물이 흐르다가 그대로 바위위에 얼어붙어서 얼음벽이 되어버린 바위가 있죠. 만약에 올라가다가 바위를 잡아야 할것을 얼음을 잡아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사정없이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져 버리잖아요.
성경말씀이 얼음같아요. 우리가 잡았다 하면 미끄러져 버려요. 잡았다고 하면 미끄러지고. 사람이 심판과 종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심판과 종말을 면하기 위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지는 말씀을 붙들잖아요. 붙들면 죽 미끄러지게 되어 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당시에 아모스, 호세아등,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잖아요.
예언을 전하면 일단 그들은 믿습니다. 예언대로 믿는데 가만 지켜보면 그 예언대로 될까요? 안될까요? 안돼요. 안되는 거예요. “에이! 이거 거짓말이네 이거. 성경말씀대로 안되잖아! 당신은 선지자도 아니면서 허접쓰레기 같은 인간이 그냥 거짓말을 한것이다” 하고 전부다 떠나고 말죠.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등, 선지자 당시의 민중들이 이런 심판의 예언을 듣고도 왜 그들이 회개를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궁금하죠? 그 당시의 민중들은 선지자들이 전한 말이 그대로 지켜지는가를 봐야 되요. 만일 자기 당대에 안지켜 지면 절대로 그말을 안믿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딱딱 될 때 그때에 믿는다고 나오지, 성경말씀대로 안이루어지면 절대로 안믿는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런거예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 오잖아요. 교회 올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붙잡기 위해서 오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예를 들어서 목사님이 ‘이렇게 이렇게 하면 복받는다’고 듣지요. “십일조 하시고, 새벽기도 열심히 하시면 복받는다”고 했는데, 안되잖아요. 안되니까 주욱 미끄러지는 거예요.
“난 이제 하나님 하고 안놀아.”
“왜?”
“하나님쪽에서 약속을 위반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역사하실 때,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절대로 안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역사합니다. 말씀은 뭐야 같으냐 하면, 꼭 빙벽과 같이, 붙들면 미끄러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 말씀입니다. 성경전체가. 이것을 일반인들이 몰라요. 사람들이 교회 올때는 절망속에 있는 사람이 말씀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려고 오잖아요.
제가 지금 다리가 저리다면, 일어나서 걸어야 합니다. 걸을때 힘이 있기 때문에 일어설수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 올때는 목사님의 말씀을 믿고 일어서려고 교회에 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뭐냐? 그것을 미끄러지도록 한다니까요.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남은자’가 되려면 말씀이 그 사람을 집어야 되요.
그래야 그 사람이 ‘남은자’가 되는 겁니다. 내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이런 저런 일로 골치아프다고 할때, 말씀을 붙잡고 은혜 받아서 한번 일어서 볼까 하고 나오신다면 그 사람은 몇 달 안가서 또 주님과 “바이 바이!” 할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얼음장같은 타일같아서 미끄러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남은자’이냐 하면, 말씀이 그 사람을 집었을 경우에 남은자입니다. 보통 집을때 그 표현은 어느정도가 적당하냐 하면, 여러분이 자기 이빨을 가지고 자기 손가락을 물어 보세요. 그러면 여기 이빨 자국이 남지요? 주님한테서 물린 자국이 있는 사람은 주님을 떠나지 않아요.
이게 뭐냐? 인생 망가져야 됩니다. 누구한테? 이웃사람한테?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온갖 실망을 다 당해야 돼요. 하나님한테 뭉개졌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거지 나사로에요. 거지 나사로는 죽을 때까지 거지였고, 죽을 때까지 몸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브라함이 가는 그 세계에 아브라함이 합류한 그 세계인 아브라함품에 안겼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본인이 믿어서 간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님의 능력으로 나사로를 꽉 물으니까, 마치 사자가 먹이를 잡아 채듯이 꽉 물어서 채니까, 아무리 아프다고 발버둥치고, 거지가 되었다고 발버둥을 치고 몸부림을 쳐도 그 이빨 자국에서 빠집니까? 못빠집니까?
빠져 나올수가 없어요. 이빨자국에서 빠져나올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이 둘로 나눠지죠. 어떤 하나님이라고 했습니까?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독점적으로만 알고 있는 하나님 이렇게 둘로 나뉘어 집니다. 이 세상 사람들 아무도 모릅니다.
심지어 베드로도 몰랐어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렇게 따라 붙으려고 애를 썼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때에 어떻게 모른다고 했느냐 하면, 세 번씩이나 저주를 했잖아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소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노골적으로, 적극적으로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는 닭이 세 번 울지요?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순교하겠다고 목숨을 내어 놓아도 예수님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안다? 모른다? 절대로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내 하나님’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모르는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예수님의 하나님을 알수 없도록 되어 있는 일반인들 가운데서 몇 명을 뽑아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해서 여기에 집어 넣어 주지요?
그러면 집어 넣어주는 이 작업은 누가 해야 되는 겁니까? 예수님이 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작업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일반인들 곧 보통사람들이 평소에 갖고 있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는 저주하겠지요?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저주를 한것처럼, 이제는 입장이 반대가 되어서 예수님의 하나님을 알게 된 일반인들은 그때부터 뭘 저주하느냐 하면,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마귀가 심어준 가짜 하나님이라고 저주할것이라 이말이죠.
저주하게 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던 그 일반인들이 예수님과 한패가 된 그 성도를 가만 두겠습니까? 가만두지 않겠습니까? 가만두지 않지요. 일반 교회에서도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받습니다”라고 했을때, 이것이 예수님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잖아요. 그런데 목사부터 시작해서 장로와 그 교회 교인들이 그런 성도를 가만 두겠습니까? 가만두지 않겠습니까?
가만두지 않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받게 되면, 우리가 신을 찾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뭐가 되느냐 이말이죠. 그때 성도는 뭐라고 합니까? “나도 그랬었던 사람인데 나는 그 신을 저주한다”고 해야 돼요. 우리 교회에 어떤 분이 오느냐 하면, 나이는 26살먹은 총각인데, 지금 대구 모 대학의 사회복지학과에 다니는 청년입니다. 그분의 엄마가 순복음교회의 전도사님입니다.
그 청년이 자기 엄마에게 제가 지은 「지옥의 하나님」을 읽어보라고 준겁니다. 그의 엄마가 일언지하에 그것을 거부했어요. 왜 거부했느냐 하면, 책 제목이 이게 뭐냐는 거죠. ‘지옥의 하나님’이 뭐냐 이말이죠. 지옥의 하나님이! 자기가 순복음 교회에서 배운 하나님은 ‘천국의 하나님’이지 ‘지옥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에 보내주는 하나님이지 우리를 지옥에 보내주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제목부터 거부반응을 보여서 아예 책은 보지도 않았어요. 그 제목을 누가 정했는지 너무 잘 정했다 싶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알게 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밖에 없었던 바리새인들의 하나님이 바로 그것이 지옥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천국이라면 예수님을 학대하고 배척했던 모든 것은 지옥이 되는 겁니다. 지옥에있는 우리를, 예수님은 나의 아버지로서 끄집어 내 준거에요. 따라서 예수님에게서 부름받은 사람은 소위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곧 지옥에서 통하는 가짜 신인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느껴야 되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이 당하게 되는 그 시련과 고난을 우리도 함께 당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지난시간에 여기서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이 당하는 고난을 똑같이 당하게 마련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주어졌던 ‘나의 하나님’이 이제는 예수님에게만 주어진 ‘나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에게 주어진 ‘나의 하나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나의 하나님’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여줄 것을 다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모든 뜻이 다 보여졌다는 겁니다. 19장 30절에 보면 “다 이루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속에 아직도 시간적으로 미진한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모자라는 것이 있을까요? 없지요. 그러면 전목사님을 제가 알잖아요. 우리가 아는 사이거든요. 아는 사이에서 다 이룬거예요. 만일에 전목사님과 제가 한달간 못만났다고 한다면, 우리가 덜 아는 겁니까? 지금 헤어져 있어도 아는 사이잖아요. 우리가 지금 예수님과 육체로 떨어져 있어도 ‘다 이루었다’속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일거수 일투족이 전부 다 뭐냐 하면, ‘다 이루었다’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의 ‘장마비’라고 볼수 있어요. 이걸 사도바울이 알아챘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고 “범사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했는데 예수 있다는 말은 ‘다 이룸’속에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나에게는 더 이상 미진한것은 남이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이가 마지막에도 반드시 이루실줄로 내가 믿습니다.” “나에게 알려준 예수님께서 나머지도 다 이룰줄로 믿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그것이 “너희 하나님”에 담긴 뜻입니다. 여기까지는 지난 시간에 한것을 정리한것이고 이제부터 조금 어려운 것을 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을 봅시다.
(요한복음 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셨는데 예수님의 부활한 몸이 진짜 육체덩어리 맞습니까? 아닙니까? 만일 진짜 육체덩어리라면 문을 닫아 놓았는데 어떻게 통과합니까? 살점덩어리가 어떻게 문으로 오지 않고 그냥 들어오냐 말이죠. 누가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와 함께 있을때는 분명히 육체로 있었죠. 왜냐하면 떡을 떼어서 함께 먹었으니까 소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 오셨을때도 제자들과 함께 떡을 같이 먹었잖아요. 자! 육체인데, 그리고 문이 닫혔는데 어떻게 들어올수가 있습니까? 여기서 못들어온다고 한다면, 그러니까 육체가 아닌 다른 영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때는 그 육체가 아닌 다른 육체로 부활한것이 되고, 진짜 예수님의 육체대로 그대로 부활했다면 문을 통과하지는 못할것이고.
이래도 난감이고 저래도 난감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신령한 몸이 있고, 그냥 죄악된 몸이 있고, 나중에 부활, 승천한 영광 받으실 영광의 몸이 있고. 그러면 몸이 세종류란 말입니까? 제가 왜 이런 문제를 내냐 하면,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나아올때 도마가 손으로 만져 봤어요. 만져 보니까 살집 맞아요.
1. 신령한 몸
2. 죄악된 육체의 몸
3. 부활하신 영광의 몸
여기 20장 17절에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나를 만지지 말라”고 되어 있죠? 이것이 해답이에요. 지금 예수님께서 자기를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부활 뒤의 승천하심을 이야기하죠.
승천하신 예수님의 몸은 구약 때의 여호와의 영광과 같아서 죄악된 우리가 대면하면 우리가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감히 그 앞에서 눈을 뜰수가 없어요. 너무 무서워요. 안돼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다 이루었다’고 하잖아요. ‘다 이루었다’안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이 세가지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을 지금 지나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속에 이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은 지금 제자들이,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비록 병든 몸으로 있더라도, 신령한 몸, 영광스런몸이 이미 다 이루었다 속에 있기 때문에 그대로 우리에게 제공됩니다. 이걸 제가 이야기 하고 싶어요.
예수님께서 이 세가지 형태의 몸을 다 보여주었잖아요. 예수님께서 폼을 잡으려고 보여준 것이 아니고, 지금 예수님께서 보여주는 몸의 절차가, 미래의 우리 몸의 적나라한 요소를 미리 앞당겨서 시범케이스로 다 보여주신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때 삼층천, 하늘나라에 자신이 갔다 와 놓고도 그때 그 사람이 누군지 잘 모르겠다는 겁니다. 다 알면서도. 말로 형용할수 없다는 겁니다. 그때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면 “아이고! 부러워라. 아이고! 부러워라. 지금 내가 만약에 삼층천에 있다고 한다면 전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기분 좋아서 다시는 원망도 안하고, 남편 때문에 짜증내지도 않고, 지금 내가 삼층천에 올라간다면 춤을 추면서 막 올라갈텐데 왜 나에게 그런 몸을 안주고, 지금의 병든 몸, 이런 몸을 주셨는가?” 할 수 있잖아요.
제가 처음부터 강의를 새로 할게요.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자기 신세를 회복할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붙들려고 하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에게 복을 주셔서 지금보다 형편이 더 나은 사람 되게 해 주세요.” 이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믿는 것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마치 빙벽의 얼음을 붙잡는 것 같이 잡으면 미끄러져서 결국에는 “나는 주의 말씀 들어봐야 소용이 없구나. 나 이제 교회 안다닌다” 하면서 “바이바이~” 할 수밖에 없다 이말입니다. 세상 살면서 어렵고 힘든 자기형편을 보충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배워서 도움을 받고 어떤 혜택을 얻고자 나온다면, 그 사람은 일반인들이나 알고 있는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지, 예수님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아버지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어떤 사람만이 예수님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아버지냐? 위에 말한 세가지를 다 보여주면서 “야! 이제 예수님하고 나하고 남이 아니구나.” 왜 남이 아니냐면 성경말씀에 있는것처럼 문을 닫아 놓았는데도 찾아 오잖아요. 우리의 마음 문이 닫혔는데도 주께서 믿게 하시잖아요.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하나님인데, 예수님의 영이 찾아오니까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악마가 만든 저주스러운 하나님이고,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의 하나님인데 진짜 예수님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1번, 2번, 3번이 이미 내안에 보너스로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이 믿어져야 되요.
1번도 믿어지고, 2번도 믿어지고, 3번도 믿어지고. 믿어져야 합니다. 2번같은 경우에는 이것은 현실 아닙니까? 전목사님 사모님은 많이 아프시죠? 좀 나았습니까? 몸이 아프잖아요. 지금. 어떤 분이 저에게 메일로 상담을 해 왔어요. 50대쯤의 남자분 같아요. “목사님! 제 몸이 아픕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감사함으로 기뻐하라고 하는데 감사도 기쁨도 안돼요. 어떡하면 좋습니까?” 하고 노골적으로 상담이 들어 옵니다.
그래서 제가 노골적으로 답변을 해줬습니다. “예! 부서진 기계를 갖고 사시느라고 수고가 참 많으십니다. 부서진 기계. 고장난 기계. 그런데 그 고장난 기계가 언젠가는 와장창 다 망가질 때가 있다는 것. 그 고장난 기계를 더욱더 망가뜨리고 죽여 버리시는 주님의 뜻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고장난 것은 없애야지 그것을 수리한다고 해서 될일이 아니잖아요.
지금 이 몸이 기계 아닙니까? 망가진 기계라고요. 어디 한군데 안아픈데가 없을거예요. 온몸이 피곤하고. 하지만 이 몸이 전부라면 예수님의 부활을 안믿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2번의 망가진 몸만이 아니고, 1번, 3번 전부다 다 어떻게 했다? “다 이루었다” 이것이 믿어진다는 말이죠.
만약에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고, 일반인의 하나님같으면 우리는 기껏 2번, 이 몸이나 고쳐달라든지, 죽어서 좋은데 가는 1번 정도나 구하지 3번의 영광스러운 몸까지는 생각도 못할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일어난 일은 그대로 우리에게 다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부끄럽지요.
여기서 한가지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린 것이, 이것이 큰일입니까? 주님보시기에 사소한 일입니까? 정답은 둘중의 하나입니다. 제자들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한 것이 큰일입니까? 사소한 일입니까? 사소한 일입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의 하나님은 자기의 행동여하에 따라서 복을 받고 안받고, 구원이 되고, 안되고를 결정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십년이나 이십년을 예수 믿다가 어떤 잘못된일이 생겨서 예수님을 저주하면 그것을 큰일로 보는 거예요. 그것이 믿음이 없다는 증거에요.
예수 믿는다는 우리가 하루에 백번 이상 주님을 원망합니다. 백번을 원망하면 마귀는 그것을 크게 부풀립니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어허이! 큰일 났다.” 이런 식으로 부풀려요. “다음 주에 벌 받는다. 다음 주에 벌 받는다.” 이렇게 합니다. 마귀가요. 마귀는 항상 그렇게 해요. 다음주에 징계받는다고. 벌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한마디로 합니다. “다 이루었다!” 원래 그런거예요. 베드로가 세 번씩 주님을 부인한다고 할지라도 다 이룸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베드로가 열 번을 넘어져도 그 베드로를 반드시 구원해야 될 그 숙제가 ‘다 이루었다’ 안에 포함된 거예요. 그래서 열한제자가 예수님을 버리고 난 뒤에 고기잡으러 갔을때, 예수님이 기어이 찾아와서 고기잡는 베드로 보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잖아요.
그때 베드로가 사랑한다고 할때 그 베드로의 답변이 정답이었습니까? 정답이 아니었습니까? 정답 아니었어요. 베드로가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사도요한 보고 “저 사람은 언제까지 살게 됩니까?” 되도 않는 질문을 했다고요. 그것도 정답이 아니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앞으로 백년 살든, 백십년을 살든 뭘 해도 정답이 아니에요.
정답이 아닌데 그것이 큰일이 아니고 어떤 일이다? 전부 다 사소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명심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몸이 좀 아프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벌을 받나?’ 이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어 버려요. 그걸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자아성이 증강돼요. 증강. 증대.
이것 좀 복잡한데 그림으로 한번 그려볼께요. 자아성에 성경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즉 자아가 그대로 살아 있는 상태에서 성경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이 성경말씀이 자아를 부수는 것이 아니고, 이 자아를 성경말씀이 증대시키고 증강시키게 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아까 이야기를 했어요.
암벽에 얼음이 있는데 딱 걸고 일어서고 싶어서 붙잡는데 성경말씀은 미끄러지게 되어 있어요. 성경말씀은 나에게 포착이 안돼요. 왜냐하면 성경말씀을 포착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는 거예요. 여기 ‘베이비’ 라는 과자가 있는데 애들 먹는 과자 맞지요? 제가 이 제과회사 사장인데 만일 용욱이가 과자를 잘 먹는다.
그런데 엄마가 돈이 없어서 과자를 잘 못사줘요. 그래서 용욱아 “아껴 먹어라” 하면서 한 개씩만 꺼내주는데 이 제과회사 사장님은 일초에 한통씩 줘버리는 거예요. 용욱이는 그 과자를 먹고 싶어서 주님을 붙들려고 하는데, 주님은 우리가 붙들기 전에 이미 매일같이 주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사람에게는 무엇이 기억되느냐 하면 주님 주신 은혜는 기억이 안 되고, 내가 요청한 것만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이 성경말씀을 대할 때는 자아를 증대시키고 증강시키는 목적으로 성경말씀을 보거든요. ‘나는 이만큼 성경말씀을 많이 보았고, 나는 이만큼 주의 말씀을 잘 지키는 참 착한 인간이구나.’
거울을 보듯이 매일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자기가 더욱더 훌륭한 ‘나’ 되기를 바라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사소하게 쓸데없는 짓을 하는 그 순간에도 주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을 세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세시면서 우리를 도와주고 있거든요. 마치 참새를 주께서 먹이시듯이 우리를 먹이시는 겁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아느냐? 자아가 증강되고 싶지요. 우리는 위대해지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될때, 가다가 똥 밟을때, 내 맘대로 안될때, 그때 자아증강을 시도하다가 자아의 퇴보를 느끼잖아요. 자기에게 실망을 느끼잖아요. 실망을 느낄때,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주의 은혜가 비로소 그때 그게 보이는 거예요.
이거 참 어려운데 쉬운말로 하겠습니다. 요나 선지자 있죠. 요나 선지자. 요나 선지자가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자살을 기도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가 죽는 것을 말리지 않고 요나선지자 옆에 박넝쿨을 속성 재배했어요. 희한하죠. 하루만에 박넝쿨을 다 키웠어요. 자살할 사람 같으면 자살하는 일에 열중해야 하는데 갑자기 시원해 지거든요. 그때 요나가 ‘주께서 날 죽게 하시기는 하는데 시원하게 죽게 하시는구나’ 기분 좋았다 이말이죠.
기분 좋아졌거든요? 그런데 하루만에 갑자기 그 박넝쿨을 시들게 했다고요. 시들게 하니까 진짜 죽고 싶은 거예요. 왜 요나옆에 박넝쿨을 준겁니까? 잘 들어보세요. 요나가 그냥 자살했다면 뭘 못느꼈겠습니까? 하잘것없는 박넝쿨의 존재의 가치를 본인이 알아겠어요? 몰랐겠어요? 그냥 자살했다면. 죽기는 죽는데 박넝쿨을 키워서 줘 보니까 죽기는 죽으면서도 뭘 압니까?
‘하잘것 없는 박넝쿨의 그늘이 나를 이렇게 시원하게 해주는구나.’ 비로소 기분 좋은 것을 느끼죠. 그래도 그 박넝쿨의 가치를 몰라요. 언제 그 박넝쿨의 가치를 아느냐 하면, 자신을 시원하게 해주던 박넝쿨이 갑자기 시들어 버릴때, 그 하찮은 박넝쿨의 가치를 알겠지요? 그 박넝쿨과 요나를 일치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요나는 자기를 선지자라고 해서 대단한 인물로 봤어요. 대단한 인물로 봤기 때문에 자기가 받은 계시대로 안되니까 삐져가지고 자살하려고 했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를 볼때는 어느 정도밖에 안되나 하면 하찮은 박넝쿨 밖에 안된다 이말이죠. 그런데 하찮은 박넝쿨이지만 하나님이 쓰시니까 요나에게 서늘한 행복감을 주잖아요.
그렇다면 요나는 요나의 자아에 가치를 둬야 됩니까? 아니면 내가 주님에게 쓰임을 받는다는 여기에 가치를 둬야 합니까? 어느쪽입니까? 나 여기 있다는게 중요합니까? 아니면 쓰임받는다게 중요합니까? 바로 쓰임받는게 중요한 것 아닙니까? 스데반집사가 키가 큽니까? 쌍커플 수술을 했습니까? 어디에 가치가 있어요?
스데반 집사가 가치 있다는 것은 박넝쿨과 마찬가지로, 요나처럼 주님에게 쓰임을 받고 주께서 다 쓰셨다고 할때에, 주께서 다 쓰셨으니 데려갈 때 ‘곱게 데려가라’ 하잖아요. 주께서 ‘나의 하나님’속으로 자기 백성을 데려오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현재 예수님을 모르는 일반인들의 하나님은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 하면 나의 존재에 가치를 둬요. 나의 존재.
이 존재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존재가 천당을 가야돼. 이렇게 나의 존재에 가치를 두는 반면에 이것이 예수님에게 와 버리면, 나의 존재의 가치는 날라가 버리고,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 하면,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곧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했다는 그 사실,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그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했다는 그 사실에서 그 사람은 새롭게 쓰임받는 가치죠.
자. 그렇게 생각하시면, 베드로가 말도 안 되는 발언들이나,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는 것이나, 예수님께 사랑한다고 말도 안 되는 답변을 늘어놓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끝까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버리지 않는 이유를 여러분들이 이제 아시겠죠? 베드로가 훌륭해서 쓰시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요.
주님께서는 적극적으로 베드로가 도망치면 잡고, 도망치면 잡아서 기어이 예수님의 가치를 높이는데 도구로써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집념과 고집, 이것이 마귀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겁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나의 가치를 이야기 합니다. “홀로 서라 너는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신이 될 수 있어.” 독자적인 나에게 가치를 둔다면 예수님은 나의 가치를 박살내고 예수님의 가치를 덧입는 쪽으로 계속 찾아오십니다.
자. 이왕 이렇게 했으니까 하나 더 어려운 것 해보겠습니다. ‘데카르트’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철학자입니다. <데카르트>가 무엇을 주장했느냐 하면, “사람은 둘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물질적인 요소가 있고 하나는 영적인 요소,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서 사람이 되는데, 영적인 요소와 물질적인 요소가 각자, 각자 다른 원리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이야기했어요.
“영적인 요소는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고, 물질적인 요소는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노력 여하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이야기 한거예요. ‘데카르트’의 이러한 주장이 있기 전에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교회의 신학이 당시의 진리를 대신했기 때문에 ‘인간들이 움직이는 것도 다 주의 은혜’라고 봤어요.
<데카르트>가 오면서 부터는 “은혜가 영적으로는 은혜지만, 육으로는 자기가 노력해야 하기에 이것은 은혜에 의지할 필요 없다”는 이런 철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 시작점에 해당되는 사람이 ‘데카르트’입니다. 특히 ‘데카르트’의 중심점을 아시겠죠? 그 전까지는 “모든 것이, 먹는 것 입는 것도 다 은혜”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교회의 세상이니까요.
‘데카르트’부터는 교회로부터 떠나는 거예요. “교회는 단지 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실제로 내가 이땅에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부르고 부르짖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에 내가 노력하는 바로 그것이 은혜”라고 보는 겁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볼때는 ‘데카르트’ 이전의 논리가 맞는것 같아요? 아니면 ‘데카르트’가 맞는것 같습니까? ‘데카르트’가 그 이후에는 보편적 상식이 되었지요? 그전에는 그렇게 보지를 않았습니다. 똑같은 인간인데도. 그전에는 교회가 강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그 전에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자기가 푸줏간 주인이라고 해 봅시다. 푸줏간에서 고기 자르는 직업이 천한 직업이거든요.
천한직업,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그냥 감사해야 되요. 그리고 농부가 되어서 영주에게 종노릇 하는 것도 그냥 은혜에요. 그게. 그래서 성경에 보면 노예가 나오잖아요. 요즘의 21세기를 사는 사람으로서 성경책을 보면 이상한 점이 없던가요? “아니 하나님을 믿으면서 노예가 뭐고? 노예같으면 반란을 일으켜 가지고 민주주의 정치운동을 해야지 ‘노예가 되어도 감사를 하라’니 이게 뭐냐?” 그렇게 되지요?
이상하죠? “사도바울이 우리보다 더 생각이 없는 사람이고, 이 사람 바보같네.” 성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안들던가요? 그런 생각이 들어가는 것은 이미 우리가 사는 시대가 21세기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 붙들때 빙벽붙들다가 미끌어 지듯이, 그냥 붙드는 것이 아니고, 어릴때부터 교육받아온 그것을 진리처럼 여기고 있는채, 그것으로 성경을 붙들다 보니까 우리는 ‘영과 육’으로 된것을 당연한 걸로 여기는 겁니다.
자. “영쪽은 은혜이고, 육쪽은 물질적이기에 자기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면 여기서부터 뭐가 나오냐 하면, 자아가 나와요. 자아가. 이걸 ‘주체’라고 합니다. ‘주체의식’이 생겨요. 그전까지는요. 주체의식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 자체가 없습니다. ‘자아’가 있고 ‘주체의식’이 생기면 이것이 ‘개인주의’가 됩니다. ‘개인주의’
“목사님! 그러면 그전까지는 ‘개인주의’라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전까지는 ‘개인주의’라는것이 없어요.”
“‘개인주의’가 없으면 그러면 뭐가 있습니까?”
“가족에 종속된 사람입니다.”
“가족에 종속되었다? 아하! 비로서 구약이 이해가 되네.”
“비로소 구약이 이해되죠. 구약에는 ‘개인주의’가 없어요.”
아버지의 복을 자식이 상속받습니다. 아버지의 대에서 바르게 살면 자식세대가 복을 받아요. 십계명에 “네가 말씀대로 지키면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개인주의’가 있을수가 없지요. 아브라함, 이삭, 조상을 잘 만나서 천대까지 복을 받으니 개인주의가 있을수가 없다고요.
‘데카르트’이전에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농사꾼이다’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본거예요. 그 당시의 교회가. 시험을 쳐서 자신이 출세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그것을 가지고 ‘신분제도’라고 합니다. 사실은 이것은 약간의 어폐가 있지만. ‘신분제도’라는 말은 ‘개인주의’가 없는 거예요.
놀랍게도 대한민국의 조선시대, 고려시대때도 ‘개인주의’가 없어요. 특히 조선시대에는 그것을 가지고 ‘신분사회’라고 하는 겁니다. ‘신분사회’이기 때문에 성경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뭐냐하면 바로 족보입니다. 족보. 전주이씨! 00김씨! 이런 족보가 중요하고, 그 족보의 교주는 조상자체가 교주이기 때문에 조상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것은 요새 교회말로 하면 성만찬을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너는 이미 우리 가문에서 호적을 파냈다. 남의 자식이다”는 뜻입니다. 요새 개인주의 같으면 “잘되었다! 나는 이제 남의 자식 되었다.”하고 좋아하겠지만, 그 당시 신분제사회에서 남의 자식이 되었다는 말은 땅 곧 유산을 한 푼도 못 받습니다.
14세기 서부 프랑스에서는 아들이 세 명이 있다면, 땅을 큰 아들에게만 주고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은 그 큰아들의 머슴이 됩니다. 그러면 둘째 아들, 셋째아들은 장가를 어떻게 갑니까? 장가요? 안갑니다. 장가 안가고 뭐합니까? 형님의 애들을 돌보면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땅은 첫째 아들만 상속하게 되어 있어요. 프랑스에서는.
그런데 유대집안에서는 첫째 아들에게 두 개주고, 둘째 아들에게는 하나를 주죠.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비유가 나오지요? 그때는 자기 몫의 30%를 받고 도망쳐 가지고 그렇게 한 겁니다. 그때 큰 아들은 둘째아들 보면서 삐질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큰 아들은 아버지속에 이미 소속되어 있어요. 속해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 되는 거예요.
둘째 아들에게 금가락지를 안줘도, 둘째아들에게 금가락지 안주고 잔치를 안 베풀어도, 큰 아들은 현재 아버지의 것이 다 자기의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둘째 아들에게 소 잡아주고 잔치 베풀어 주는 그 모든 비용이 사실은 누구의 것이다? 아버지의 것이고 동시에 누구의 것이다? 맏이의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삐질 필요가 없다고요.
이것을 이해를 해 주셔야 돼요. 제가 왜 ‘데카르트’ 이야기를 꺼냈느냐 하면 현재 21세기의 철저한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성경이 잘못 해석되고 그 잘못된 해석을 가지고 마치 암벽의 무엇인가를 잡아서 주의 말씀 잡아 보겠다고 그것을 잡으니까, 주르르 주르르 미끄러지는 거예요.
왜? 왜 미끄러집니까? 본인이 성경을 해석하는 그 사고방식이 성경에 나와 있는 시대상, 사회상 그것하고 관계없이, ‘데카르트’의 제자들이에요. 철저한 ‘개인주의’, 나 중심주의이기 때문에 그런 기준으로 백날 성경을 봐도 성경해석은 일방적인 성경해석입니다. 이 개인주의가 굉장히 무섭지요! 그래서 목사님들이 성경해석을 할 때는 이 ‘개인주의’를 용납해주는 그런 성경해석을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개인주의를 용납해주는 그런 성경해석을 해버리면, 그 교인이 집에 가서 자기성경을 보면서 성경을 해석하는데, 목사님이 주신 해석법에 따라서 해석을 하게 되면, 전부다 그 나머지 성경공부를 자기 개인주의 적으로 해석 해버리니까, 세상에 이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자. 제가 신분제도까지 이야기를 했지요? 조금만 더 해봅시다. “그렇다면 ‘데카르트’ 이후에 그 ‘개인주의’란 어떤 사고방식이 개인주의 입니까? 그 이전에 신분제 하에서 성경을 볼때는 어떤 식으로 보는 겁니까?” 그 두 가지의 차이가 궁금할 거예요. ‘데카르트’의 개인주의가 철저히 ‘자아증강’, ‘자아증대’로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데카르트’ 이후에는 물질적인 것은 자기 노력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사고방식에 의해서 푸줏간 주인이라도 도시에 가서 자기 살 나름으로 그 신분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제는 신분 속에서의 내가 아니라, 내 스스로 나의 신분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영적으로는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했지요? 영적으로는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이 지상에 살면서 받는 축복은 뭐하기 나름이다? 내 하기 나름이죠.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무슨 개념이냐 하면 ‘노동개념’입니다. ‘노동개념.’ ‘노동개념’은 ‘노동시장’에 가야 됩니다. ‘노동시장.’ 지금 21세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키포인트가 뭐냐? ‘시장’입니다. ‘시장.’(Market)
옛날의 시장은 ‘물물교환’입니다. ‘물물교환.’ 고기 잡는 어부가 잡은 고기하고 농사지은 쌀하고 바꾸는 겁니다. 제가 한번 그대로 실시해 볼까요? 이쪽에서 고기 들고 가잖아요. 저쪽에서는 쌀 들고 오는 거예요. “고등어 세 마리 줄테니까 쌀 한말 다오.” “가격이 너무 비싼데?”. “그럼 고등어 열 마리 줄테니 쌀 한말 줘.” 이렇게 바꾸잖아요. 이럴때 “나는 당신이 사고 싶어. 당신!” 이런 법은 없단 말이에요.
누군가가 들고 있는 고기를 사고 싶은 것이지, 그 사람 자체를 산다는 것은 없었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노동시장에 들어가 보면, 이제는 노동을 해야 할 ‘나’ 자체가 상품이 되요. 내가. 대표적인 예가 프로야구에서 흔히 보는 ‘트레이드’라는 겁니다. 누구와 누구, 두 사람하고, 다른 팀의 누구하고 맞바꾸는 거예요.
3번, 4번 타자가 최근 들어 잘 못치고 부진하면, 저쪽 팀의 투수 한사람하고 이쪽의 타자 두 사람하고 맞바꾸는 거예요.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를 한사람, 한 사람당 그 가치는 누구나 동일하다고 생각하죠? 이것은 우리의 바램입니다. “나, 인간이야 인간 무시하지 마.” 이것은 술꾼들이 술한잔 먹고 길거리에 엎어지면서 하는 소리지, 실제는 시장에 나가면 당신은 월급 50만원, 저사람은 100만원, 이렇게 되는 겁니다.
100만원이면 50만원의 몇배입니까? 곱빼기죠. 두 사람 몫이라고요. 지금 사람 무시하는 겁니까? 사람을 왜 무시해요.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요. 사람을 무시하고 안하고가 이 노동시장 안에서는 그런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다니까! “나 믿음 좋으니까 사장님 저 좀 써 주세요.” 믿음 좋다는 것은 시장에서 아무 의미가 없어요.
“당신 컴퓨터 할 줄 알아? 당신 부기 몇급이야? 당신 영어 회화 할 줄 알아? 일본어는 할 줄 알아? 당신 직장 생활 총 몇 년 했어?” 이런 것을 묻는 것이지, 믿음이 좋다든지 혹은 인간성 좋다는 것은 앞의 것들이 다 되고 난 뒤에 같은 값이면 조금 더 나은 것.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이거 참, 중요한 것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노동시장에서 나의 가치는 돈의 가치로 바뀝니다. 이것은 이해가 되지요? 이것이 제일 중요하니까 잘 들어 보세요. 아까 그 자아의 증강이 무엇으로 바뀌었다? 돈의 증강으로 바뀌겠죠. 잘 들어 보세요.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합니다. 돈의 가치가 내속에 들어와요.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를 해석하는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법칙이 없어요.
돈의 가치가 내 속에 들어옵니다. “어릴 때 나는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이러잖아요? 하지만 커서는 우리 사장님에게 사랑받고 싶은 거예요. 이제는 엄마가 귀찮아요. 사장님이 호출하면 엄마를 버리고 사장한테 달려가야 합니다. 왜? 나라는 가치가 옛날에는 엄마의 사랑이 그리웠는데, 지금은 엄마 사랑대신에 시장에서 내가 버티려면 돈의 가치가 내 속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나는 죽어요.
내 속에 돈의 가치가 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에는 나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지요. 돈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그 다음에 우리는 성경을 보게 돼요. 그러니 그것이 뭐냐? 그것이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죠. 돈밖에 모르는 인간이 교회에서 뭘 부른다? “오! 하나님! 주 예수님!”하고 부르니까 그 예수님과 그 하나님은 뭐냐? 완벽한 가짜다 이말 입니다.
와! 그것을 설명하는데 이렇게 노선이 깁니다. 이 버스 노선이 몇 번 노선인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길어요. 왜 사람들이 교회 와서 복을 비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돈의 가치가 내 속에 들어와 버려서 내속에 들어 있는 돈의 가치가 예수를 찾는 거예요. 예수를 좋아서 찾는 것이 아니고 뭘 얻기 위해서? 노동시장에서 나의 가치를 증강시키기 위해서 예수를 찾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성경말씀은 그걸 들어준다? 안들어준다? 안들어주고 주르륵 미끄러지게 만들어요. 그리고 주께서 나에게 그냥 찾아오죠. 그러면 주님께서 나를 찾아와 버리면 우리는 어디 가느냐? 아까 개인주의부터 출발하죠? 주께서 나에게 찾아와 버리면 이 ‘개인주의’가 지근지근, 주님에게 밟힙니다.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한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데카르트 이후의 그 사고방식을 주님께서 인정하겠어요? 안하겠어요? 안하죠. 안한다는 말은 지근지근, 짓밟아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21세기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지근지근, 밟아도 삐져나오는 것은 무엇만 빼져 나오느냐 하면, 노동 가치에서 나 괜찮다는 것만 나옵니다. 특히 여성 같으면 노동 가치에서 인물입니다. 쌍커플 수술, 키, 이런 것을 다 보지요.
집에 돈이 많은지? 아버지가 재벌인지? 이런 것이 다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노동 가치는 뭐냐?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가짜 신에서 나온 거죠? 아까 진짜 성도는 누구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집어 삼켜야 구원받잖아요. 예수님은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이걸 지근지근 깨어 부수면서 우리 속에 들어오죠.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개인주의가 날라가 버려요.
아까 이야기할 때 ‘데카르트’ 이야기 했죠? ‘데카르트’이후가 박살 나면서 어디로 갑니까? ‘데카르트’ 이전으로 돌아가죠. 누가 그렇게 합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합니다. 제가 아까 ‘신분제도’라고 했잖아요.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신분제도’도 인정하지 않아요. ‘신분제도’라는 것은, ‘양반과 상놈’, ‘주인과 노예’, 이것인데 사도바울은 “종이든 자유자든 관계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 형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분제도를 넘어서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가족으로 포함시키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것이 이해하기 힘들어요. 왜 이해하기 힘드냐 하면, 지금 21세기가 ‘개인주의’ 아닙니까? ‘개인주의’거든요. 부부가 결혼을 했어도, 결혼식을 할때 남편의 가치가 80점 이라면, 1년 뒤에 70점이 되면 ‘이걸 헤어질까 말까’ 합니다. 안 헤어지는 경우는 자신이 80점이 못되고 70점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안헤어져요.
10년 뒤에 보니까 남편이 60점 밖에 안돼요. ‘헤어질까 말까’ 또 생각합니다. 안 헤어지는 이유가, 자기도 50점~40점 정도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안헤어지고 살아요. 이걸 좀더 실제적으로 해 봅시다. 자! 어떤 A라는 아내가 남편하고 함께 사는데 실망했다 - 실망했다는 것은 점수가 내려갔다는 거예요. - 자기는 70점인데 남편은 50점밖에 안돼요. 어떻게 70점하고 50점 하고 함께 살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이혼을 하지는 않지만 이혼을 결심한 채, 그대로 살면서 자기의 주변 상황을 내려다 본다고요. 현재 지금 애가 둘이 있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신부 노동시장에 내놓으면 내가 몇점쯤 될까를 따져 보니까 40점이라. 나는 70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40점이냐면, 딸린 애 하나에 15점씩 계산해서 빠지니까 40점 밖에 안 되는 거예요.
40점 밖에 안 되니까, 애 둘을 달고 가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조건이 있어요. 애 둘을 남편에게 넘겨준 상태에서 아주 홀가분하게 자신을 노동시장에 내어 놓든지 해야 하는데 이것이 또 양심상 걸리거든요. 그래서 “애라! 그냥 살자!”해서 그냥 사는 거예요. 다 점수제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21세기의 가족이라는 개념은, 개인주의의 바탕위에, 자기노동력의 바탕위에서 가족입니다. 만약에 남편이 못 벌면 이것은 이혼 사유입니다. 옛날에는 남편이 폭력을 행사한다든지, 혹은 바람을 피우면 이혼사유가 되지만 지금은 남편이 놀고 있으면 이혼사유가 되요. 왜냐하면 자식을 키울수 없잖아요. 이것이 개인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에 생긴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짝지워 준것을 사람이 나눌수 없다.” 이것은 일반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억지로 붙어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말 입니다. “그래! 헤어지고 싶지만 주의 뜻이 그러니 붙어산다.” 이것은 여전히 ‘개인주의’에요. 이것은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말한 가족이라는 것은 바로 천국의 가족을 말합니다. 천국의 가족은 본인들이 원해서 하나님의 자녀된 것이 아니에요. “내 하나님, 내 아버지”는 예수님이 집어서 가족이 된것이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불러 모아서 가족이 된거에요. 그렇다면 그 가족은 본인이 개인주의적인 결단력에 의해서 가족 된것이 아닙니다.
그 깨어질수 없는 가족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경애’씨 이렇게 안산에 계시고 나는 대구에 있기 때문에, 남남이라 생각하지만 저는 남남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기도하거든요. 그런데 ‘경애’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한두명이 아니거든요. ‘경애’에 해당되는 사람을 다 기도합니까? 아니거든요.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주님께서 집어서 구원된 사람은 내가 형제 ‘아니다, 맞다’, 할 자격이 나에게 있다? 없다? 나한테 없는 거예요. 어떤 어려움이 있다?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내가 모른다고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관하신 분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붙여준 가족을 사람의 힘으로 나눌수 없느니라.” 이걸 부부에 해당시키면 안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것이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이것은 부부에 관한 것이 아니고 교회에 관한 것이라고 했어요.
(에베소서 5:22-33)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사람들이 21세기의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이것이 부부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데, 제가 ‘데카르트’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가 그런 해석은 잘못이라 이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생긴 하나의 가족이에요. 우리가 죽으면 베드로 만납니다. 아브라함 만나요. 거지 나사로처럼 아브라함 품에 안깁니다.
예수님을 그때는 봅니다. 지금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봐요. 형제들 다 같이 모입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2장에 나와요.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운동회 달리기 하고 난 뒤에 다 달린 믿음의 선배들이 나와서 박수치고 있고, 우리는 뭐냐 하면 죽어라고 달리는 거예요. 결승전을 향하여. 그때 허다한 증인들이 응원하고 있다는 것이 히브리서 12장입니다.
(히브리서 12:1-3)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그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허다한 증인들이 지금 네가 하는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으니까, 나도 너처럼 고생했으니까 지치지 말고 달려오라 주의 품으로 한다고요. 그게 아무나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자기가 예수믿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주께서 믿게 한 사람은 어차피 한 가족으로 모이게 되어 있어요. 남편이고 아내고 그런 가족이 아니고, 진짜 영적으로 “내 형제고 내 모친”이라고 했어요.
한쪽이 아프면 같이 아파하고, 한쪽이 울면 같이 울고, 웃으면 같이 좋아하고. 한 가족을 그것을 두글자로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형제 아닌 사람을 쫒아 내야 되요.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까? 여러분이 잘나서 구원받았습니까?” 자꾸 이야기 해가지고 자기 잘나서 구원받았다는 사람을 전부 쫒아 내야 되요.
노골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되지만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서, 자기가 제풀에 ‘들을것이 없다’고 하면서 다 나가게 되어 있어요. 주의 은혜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같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남남이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지금 어떠한 기준을 제가 이야기 했거든요. 실제로 이야기 해 봅시다. 요한복음과 다 관계되니까, 조금만 더 이야기해 봅시다.
실제 이야기로, 어떤 사람이 결혼해서 자기 남편하고 재미있게 사는데, 교회 목사님이 심방왔다고 하면 귀찮지요. 주일날 교회에서 봅시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회사에서 만나면 되지 뭐하려고 여기까지 오느냐?” 이말이거든요. 그게 누구나 다 있어요.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개인주의적인 그것이 깨어지게 되면, 점차점차,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보다도 같은 주의 형제가 같이 좋아지기 시작해요.
하지만 죽을때까지 여전히 내 남편, 내 아내가 최고에요. 그것은 우리가 인정하고 들어갑시다. 그것은 인정합시다. 아무리 같은 교회라도 자기 가족보다 더 좋은 것은 아니에요. 교회 어렵다고 해서 헌금하지는 않습니다. 어려워도 자기 가정에 쓰지, 그 돈을 교회에 내지는 않아요. 그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인하여 그 사람에게 어려움을 줘요. 교회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항상 자기 식구 때문에 고민하다가, 언제 교회생각을 하느냐 하면 교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 그때 다시 한번 교회를 생각하게 하는 겁니다. 아까 박넝쿨처럼. 예를 들면 평소에 교회에 와서 “집사님! 김집사님!” 그렇게 인사를 받다가, 낯선 박집사님이 와서, 가만히 있는 나보고 “김집사! 이 교회 오래 있었다면서? 헌금 최고로 많이 한다면서? 기도 도사라면서?” 이런 시비를 막 거는 거예요.
가만히 듣자니 부아가 치밀어서 “목사님! 나, 교회 안갈랍니다!” 실제로 있는 이야기니까. 성은 다르지만 실제로 우리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왜요?” "저 박집사님 때문에 제가 삐져서 교회 못가겠습니다.” 목사님은 “교회라는 것은 그게 아니고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 “그것은 제가 목사님 설교 다 들어서 다 압니다. 알지만 나는 교회 안나갑니다.” “교회 안나가면 어디 가십니까?” “그냥 우리 집에 있을랍니다.”
보세요. 교회는 필수가 아니고, 결국 뭐가 필수에요? 내 가족, 내새끼, 이것이 필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박집사가 “김집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당신 믿음이 너무 좋다 보니 제가 시기를 해서 그렇습니다”하고 울면서 회개하니까 “뭐, 그까짓 거 가지고 삐져서 안나온 내가 더 문제죠”하고 전에 삐졌던 박집사가 전에 몰랐던 새로운 은혜, 형제간에 새로운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경우를 주께서는 그런 경험을 통해서 알게 한다는 겁니다.
우리 사모님이 여기 계시지만, 이런 쉼터를 할 때, 다른 사람이 이것을 인수해도 이 일을 못합니다. 왜 못하느냐 하면, 다른 사람은요. 자기 집이 우선이고 직장은 그냥 직장이고. 하루 일하고 땡 하면 퇴근해서 나와 버리고, 우리 집을 위해서 돈 벌고. 이런 것을 원하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날 일입니다. 쥐나지요.
아마 사모님도 놀랐을 거예요. 내가 남을 생각한다는 것이. 그런데 막상 몇 년간 시달리고 어울리다 보니까 한식구 같지요? 애기도 있고 하지만 다 귀하잖아요. 이게 하루 아침에 되던가요? 안되지요? “내가 전생에 무슨 업보가 많아가지고---.” 자기 새끼가 다 있는데 이것은 내 새끼도 아니고요. 이게 하루 아침에 되겠습니까?
이것은 사모님뿐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예요. 애 하나 낳으면 자기 애 하나만 귀하게 여기고. 그것이 아니고, 남의 애도 귀하게 여겨야 하죠. 하지만 그렇게 안되요. ‘역시 달리기 하면 우리 용욱이가 최고다.’ 이게 되지. 이게 21세기의 ‘개인주의’인데, 이 개인주의를 주께서 역사하시면 어떻게 된다고요?
무엇으로 바뀐다고요? 예수님의 한 가족중심으로 바뀌는 과정이 요한복음 20장, 21장이라는 겁니다. 이제 요한복음 20장, 21장이 이해가 되십니까? 제자들이 전부 다 자기 살궁리만 챙기는 사람들이에요. 요새 말로 하면 개인주의입니다. 요새의 노동시장의 의미로서의 개인주의는 아니지만. 하여튼 자기밖에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 합니다. 뭘 다 이루었습니까? ‘내 아버지’가 누구 아버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이 누구 하나님? ‘너희 하나님.’ 그러면 예수님께서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개인주의에서 벗어나서 11제자가 예수님의 ‘내식구’라는 쪽으로 변화를 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누가 누구를 찾아 가야 되요? 예수님이 찾아 가는 거예요. 그 과정이 20장, 21장입니다. 어떻게 찾아가는가를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 20장 26절을 봅시다.
(요한복음 20:27-29)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이다
예수님께서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니까 도마가 28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이다.” 뭐가 깨졌어요? ‘개인주의’가 깨지는 거예요. 이 작업을 저와 여러분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한다 이말이죠. 그런데 그 방식이 뭐냐? 뭘 보라고 했습니까? 주 되심의 증거가 뭡니까? 바로 십자가사건, 십자가에서 죽었던 죽음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참 중요한 겁니다. 자. 오늘 강의가 이렇습니다.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안에 넣어 줍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것에 대해서 알길이 없어요. 알길이 없고 문을 닫아 놓고 저희끼리 있단 말이죠.
그때 주님께서는 쳐들어옵니다. 먼저 쳐들어 와서 문닫혔는데 그냥 들어오죠. 문이 닫혔는데, 들어오셨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의 육체의 한계는, 인간들끼리는 한계가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에게는 그것이 한계입니까? 한계가 아닙니까? 그것은 한계가 아니다 이말이죠.
그렇다면 문 닫고 저희들끼리 있는 것은 인간의 부족함이지만, 그게 주님보시기에 큰일이에요? 사소한 일이에요? 그게 사소한 일이란 말이죠. 예? “내가 문닫았습니다. 주님을 안믿었습니다.” 다 사소한 일이에요. 예수님이 쳐들어 온다는 것이 큰 일이지 다 사소한 일이에요. 6.25 전쟁때 감자농사가 잘 안되었다는 것은 사소한 일입니다. 인민군이 쳐들어 온다는 것이 큰일이잖아요. 주님이 쳐들어온다는 것이 큰일이에요.
어떻게 오느냐? 주님께서는 안되는 것을 되게 해요. 안되는 것을 되게 하려면 안되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해서 십자가를 보여줘요. 십자가! 십자가 사건을 보여 줍니다. 피흘린 사건, 창자국, 못자국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피와 물이 나왔던 거예요. 그래서 요한 1서에 보면 “피와 물과 성령이라.” 십자가 사건을 세가지로, 피의 사건, 물의 사건, 성령의 사건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렇게 십자가 사건으로 들이댐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내 힘으로 예수 믿었다’고 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다가선 식구입니까? 식구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식구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을 놓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주께서 주신 십자가 사건으로 식구되게 하는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내가 얼마나 노동을 많이 했는지, 주님의 천국까지 차지하는 노동력을 발휘했다’는 ‘개인주의’가 부각될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많은 정도가 아니고 당연히 ‘개인주의’가 부각됩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나라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 없어지고 소멸됩니다. “뭐가 소멸됩니까? 나 여기 있잖아요. 있잖아요.” 그것은 환상입니다. 환상. 누가 지어낸 거예요. 그 환상은 매일 매일 달라요. 그 환상은 소멸되고 이제는 뭐냐? 주님께서 다루시는 도구가 되죠. 주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도구로서만 쓰임 받는데, 문제는 내가 그것을 자주 못느낀다는 거예요.
자주 못 느끼지만, 그때 마다 자주 자주 오시면 될 거 아닙니까? 성경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지켜서 성경 말씀에서 십자가를 뽑아내서 십자가로 우리를 죽이는 식으로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겁니다. 여기 있는 어떤 성경말씀도 못지킵니다. “인내하라”하지만 인내 못합니다. “감사하라”하지만 감사 못합니다. “너는 가족만 사랑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지만 그것을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못할때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내가 못하기 때문에 주를 증거할수 있는 거예요. 내가 내 힘으로 안되기 때문에 더욱 더 주를 증거할수 있는 겁니다. “내 힘으로는 안되고 주님은 됩니다” 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20장입니다. 20장 끝에 31절을 봅시다.
(요한복음 20:30,31)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30절에 보면 많은 표적이 일어나죠. 이게 누구와 더불어 생긴 표적입니까?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있는 표적인데 그 표적은 바로 십자가를 증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제가 적어 볼게요. ‘예수님’이 그 다음에 ( ).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죠. 그러면 일반인들은 ‘예수님’이 하고 나서 그 다음에 들어갈 것이 없지요.
일반인들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 “내가”가 들어가죠.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은---” 이렇게 되죠. 여러분! 그 차이를 알겠습니까? 진짜 어렵다. 이거 진짜 어려운 거예요. “내가 예수 믿습니다.” 이것은 전부 가짜에요. 여기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하고 그 뒤에 뭐가 없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라고 나왔다는 것 자체가 내가 빠지는 겁니다. 내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할때는 내가 없는 거예요. 나에게 일어난 것은 다 사소한 일입니다. “나 이번에 월급 올랐거든요.” 할때는 예수님이 일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나라는 것이 부각되는 거예요. “나, 이번에 박사학위를 받았거든요.” 할때는 자기가 부각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말은 ‘나’는 이미 여기서는 없는 거예요. 이 사실에 합류할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생명에 합류되는 거예요. 그래서 평소에 우리의 버릇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 이렇게 되지만 예수님은 항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믿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으로 믿게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관계가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에게서 생명이 나와서 내가 생명을 얻게 되는 겁니다. 이런 관계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로 믿고”할 때 믿음이라는 것은 ‘너를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를 믿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예수님의 모든 기적과 표적은 예수님이 생명이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는 부활이요” 그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생명이다.”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말은 우리는 생명이 아니고,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이예요.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한 가족이 되었어요. 가족인 이상은 내가 나의 책임자가 아니에요.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내 인생을 내 책임으로 놓지 마세요. 마귀에게 시험듭니다. 자기에 대해서 포기해주세요. 포기해도 괜찮을때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포기하니까 안절부절 하는 사람은 아직도 믿음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냥 맘놓고 번지점프 하듯이 그냥 두 팔 벌리고, 공중에 두 팔 벌리고 공중에 그냥 허공에다가 몸을 던지세요. “♬허공속에~.” 그냥 허공 속에 자신의 몸을 던져 버리세요. 조용필의 노래처럼 그냥 허공 속에 던져 버리세요. 주님께서 크게 생각해서, 그때그때 마다 주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으로, 주님이 자기를 증거케 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21세기의 사람이라서 나의 가치를 증강하고 증대하는데 지금도 혼신의 노력을 다 경주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날 얼마나 높이 알아줄까? 남이 나를 우습게 볼까? 그것이 우리의 신경질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부족한 인간도 주께서 도구로 쓰셔서, 이런 인간을 주께서 영생 주시려고 주께서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그 피를 증거하고 십자가를 증거하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