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림 마을의 역사를 더듬어보자면
후고구려를 표방한 태봉국의 시조 ‘궁예’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892년(진성여왕6년) 북원의 호족 ‘양길’에게서 군사를 나누어받은 궁예는 치악산 석남사를 근거지로 하여 주천, 내성(영월), 울오(평창), 어진(울진)등을 차례로 정복해나갔다.”는 <삼국사기-궁예10편>기록에 등장하는 석남사가 지금의 성남2리 절골에 있었던 절이기 때문이다.
궁예의 출생년도가 신빙성 있는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다.
다만 신라47대 헌안왕이나 48대 경문왕의 서자출신으로 왕권다툼의 희생자라는 설이, 애꾸눈이 된 사연과 함께 전해지나 그리 신뢰할 것은 못 되는 것 같고,
세달사로 출가한 이후의 기록은 고려사와 삼국사기 등에 비교적 자세하게 전해지는데
중요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을 어머니(또는 유모)와함께 지내다가 10세에 세달사로 출가를 하여 ‘선종’이라 불리웠고,
장성하여서는 절의 계율에 구애를 받지 않았고 늘 의기양양하게 담력을 자랑하였다.
어느 날 까마귀가 그의 바리때(밥그릇)속에 나뭇가지를 물어다 떨어뜨렸는데 그 가지모양이 王 자 형상이었다.
그는 이 일을 혼자 마음에 새겨두고 자부심을 지녔고
비기도참의 글을보면 감추어두고 몰래 읽으며 큰 야망을 키웠다.
신라말기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지자 백성들은 제각기 살길을 찾았다.
왕경(서라벌)을 제외한 각 고을에서 조정을 배반하고 도적의 무리에 가담 하는 자가 늘어났다.
891년 진성여왕시절 국정의 문란함이 극에 달했을 때 궁예는, 난을 틈타 무리를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
하고, 그를 따르던 종간과 은부 허월등과함께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죽주(안성)의 기훤에게 몸을 의탁햇다.
이때부터 그는 '선종'이란 법명을 버리고 무인의 이미지를 짙게 풍기는 ‘弓裔(궁예)’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활 잘 쏘는 사람의 후예’ 라는 뜻인데, 뒷날 나라를 세워 고구려의 정통성계승을 표방한 것을 보면 고구려의 건국
시조 ‘주몽’의 원래 뜻이었던 ‘활 잘 쏘는 사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본다(주멍생각).
기훤에게서 1년이 지나도록 대접을 받지 못하자 기훤의 부하였던 ‘원회’ ‘신훤’등을 추가로 규합해서 북원(원주)을
중심으로 세력 확장을 꾀하던 양길에게로 간 궁예 일행은,
불교와 도참과 병법에 많은 지식을 가진 이들의 쓸모를 알아본 양길에 의해 중책을 맡게 되었고
1년만에 기병100기를 나누어받아(600기라는 설도 있음) 북원 동쪽의 산간지방 공략의 임무를 부여받는다.
북원을 중심으로 남으로 충주 북으로 횡성 서쪽으로 여주등 비교적 산세가 완만하고 넓은 지역을 수성하며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던 양길에게 치악산너머 태백준령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동쪽지방 공략을 위해서는,
오랜 세월 영월 세달사의 승려생활을 통해 연고와 지형을 익힌 궁예가 적격이라고 판단 했던듯 싶다.
<당시의 절은 멀리까지 직영 장원(농장)을 경영하고있어 이를관리 감독하기위한 민간과의 교류와 왕래가많았다>
어쩌면 양길자신이 주력군을 이끌고 들어왔다가 낯설고 험준한 지형에서 위험을 감수하느니 鷄肋(계륵) 같은 이 지역에서 궁예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자하는 의도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궁예가 처음으로 독자적으로 작전이 가능한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그가 어려서부터 품었던 야망을 막 펼치고자하는 시기에 본영을 차린 곳이 바로 지금의 절골 석남사인데,
기병의 기습공격과 매복이 승패의 관건인 산간전투를 치르기 위해서
이름( 石 南 寺)에서보듯 북쪽은 온통 깎아지른듯한 바위벼랑이고 좌 우로는 높은 능선이 골짜기 입구까지 뻗어있어 야간에
배후를 기습당할 염려가 없고, 입구는 계곡과 호랑이산 바위비탈 사이로 간신히 말 한필이 드나들 정도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지금의 절골 출입로인 '사지목재'는 산등성이 였음)수비가 용이한 '천연의 요새'인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달사와같이 신라시대에 세워진 화엄종사찰인 치악산 상원사와 주천 사자산의 법흥사등이 주변에 있으니
오랜 승려생활과, 범상치 않았던 그의 성장기와, 속에품었던 원대한 야망과 연관을 지어볼때
어느시기엔가 눈여겨 보아 두었던 것 같다.
흥미로 언급하자면 박영규의소설 ‘책략’에서는 궁예의책사'종간'이 석남사의 승려출신으로 언급된다.
어쨌든 궁예는 낮에는 군사를 이끌고 주천, 영월, 평창등의 고을을 공격해
항복을 받고 밤이 되면 석남사로 와서 잠을 자곤 휴식을 취하며, 894년 3500명으로 불어난 군사를 이끌고 명주
(강릉)에 입성할 때까지 2년여를 석남사를 본거지로 하여 활동한다.
명주에 무혈 입성해 수하들에의해 장군으로 추대 되어 양길의 그늘에서 벗어났음을 선언하기까지
후삼국통일의 영웅을 탄생시킨 ‘천혜의 요새’ ‘호걸의 산실’ 석남사터는
다락논 둑방에 쌓여진 돌속에,
농가의 구들장아래에,
쓰러져묻힌 부도비 아래에...
비운으로 마감한 영웅을 애통해하듯 초췌한 모습으로
천 백년 전의 역사를 품은채 오늘도 운무에 젖어있다.
* 상기의 내용은 '궁예와호족세력(정청주 저)슬픈 궁예(이재범 저)한국 민속인물백과등을 참고하엿습니다.
윗쪽은 ' 사지목재'에서 단풍든 가을의 절골을 올려다 본 모습
전원주택 지붕윗부분의 어렴풋한 파란 지붕이 석남사터에자리잡은 농가(최월학씨댁)이다.
아랬쪽은 석남사 부도비자리에서 아랬쪽으로 내려다본 절골입구이다.
중앙부분의 붉은지붕이 절골서당(미륵선생이라불리던 한학자 김광수어른이 서당을하던집)자리이고
그곳이 유일한 출입구였다.
첫댓글 석남사터 주변에는 깨진 기와 파편이 무수히 많습니다.아쉽게도 발굴이 되지못하고 논을 합하는 포크레인작업시 많은토기와 불에그을린 아궁이자리가 몇개나오고 주추돌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자가파편이 없는것으로 보아 후삼국시대절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