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엥카리(Henri Poincare)를 학문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양이 중심이 된 오늘날 우리가 科學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사실 우리가 과학(science)라고 부르는 것은 그 어원상 '자르다(sci-; 예, scissor 가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환경과 주변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것을 탐구하기 시작했는데 자연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너무도 복잡한 것이어서 이것을 한꺼번에 다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커다란 자연현상을 '쪼개어서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 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서양의 science를 '나눌 科'字(벼(禾)와 콩(斗)을 수확한 후 서로 나눈다는 의미)를 사용해서 '科學'이라고 번역한 것도 다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그렇다면 서양인들이 생각한 과학은 무엇일까요?
서양의 눈부신 과학문명은 오늘날 수많은 문명의 발전을 이룩하였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처음 출발점부터 너무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현상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방식에는 논리(logics), 감정 혹은 감각(sensation), 느낌(feeling), 직관(intuition) 등이 있는데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논리에만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동양의 과학은 직관(intuition)- 논리적 구조와는 차원이 다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의 과학과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지요.
어찌 되었든 서양의 과학은 이 여러가지 인간의 인지적 기능 중 논리에 의존해서 발전한 이른바 철저한 과학적-나누어서 생각하는-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학적 방법론으로써의 논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수학(mathematics)입니다. 서양의 과학을 떠받치고 있는 논리란 바로 수학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에 서양인들이 열광하는 것입니다.
17세기 뉴턴의 과학이란 쉽게 이야기 하자면 F=ma의 수학으로 과학 하는, 나누어 생각하는, 방법론적인 기준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y=ax+c로 표현되는 일차방정식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하려 했던 거죠. 많은 부분 이 일차방정식은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현상을 잘 설명하였습니다. 그 덕에 우리는 화성까지 인공위성을 날려 보내기도 하고 오늘날과 같은 컴퓨터 천국을 만들기도 하였죠.
사실 우리가 과학적 분석방법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통계라는 것도 알고 보면 선형회귀법(linear regression), 즉 어떤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일차(직선)방정식을 찾고 그것으로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20세기의 아인슈타인이 한 일은 무엇일까요? E=mc2. 이해가 빠르신 분이라면 벌써 이해하셨겠지만 우리가 배운 수학의 일반방정식으로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표현하면 y=ax2+bx+c의 이차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인류가 초등학교 수준의 직선 일차방정식을 버리고 최소 포물선을 그리는, 두개의 해를 가지는, 이차방정식을 가지고 과학 하는, 자연현상을 '나누어 생각하는' 단계로 한 단계 진화한 것이지요. 그래서 서양의 과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을 천재라고 떠받드는 것 입니다. 또한 새로운 방정식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구요.
사실 프엥카르리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수학자이기도 하였던 프앵카리는 뉴턴의 일차방정식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또한 뉴턴의 방정식이 철저하게 '두 개의 물체사이의 관계'를 제한적으로 설명할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연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물체도 딱 둘만 존재하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수많은 물체들이 서로 크고 작게 영향을 미치며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 좋은 예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태양, 그리고 달의 관계일 것입니다.
태양의 영향에 비교한다면 달이 지구에 미치는 힘이란 정말 무시해도 될 만큼 미미한 것이지요. 적어도 서구인들에게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동양인들은, 일부 뱀파이어 전설을 믿는 서구인들도 포함해서, 조수 간만의 차이라든지, 농사의 때를 정하는 것은 오히려 달의 영향이 더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태양과 비교하면 그 힘이 미미하지만 결코 무시 할 수 없는 영향을 이해한거죠. 오랜 동안 서구인들에게 달의 영향이란 무시해도 좋은 미미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프엥카리는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적어도 행성의 운동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뉴턴의 일차방정식으로는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프엥카리 조차도, 3개 이상의 물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있는 물리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정식을 찾을 수가 없었던 거죠.
오늘날 컴퓨터(computer; 컴퓨터의 어원인 'computation'은 'calculation(계산)'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이 컴퓨터(computer)를 '전자계산기'라고 번역했고, 이것을 줄여서 '전산기' '전산과'라고 부르는 것 입니다.)가 엄청나게 많은 양의 자료들을 빠르게 계산할 수 있게 되자 프엥카리의 생각을 고등수학을 적용해서 수학적으로 풀어볼 생각-새로운 방정식을 찾는 일을 하게 된 거죠. 이것이 바로 카오스, 복잡계, 혹은 비선형과학이라고 부르는 분야에서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들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비선형(non-linear)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까지의 선형회기방정식-통계방정식-을 통한 과학이 아니라 적어도 3차방정식 이상의, 때로는 이들의 연립방정식을 이용한 과학이 시작된 거죠. 잘 아시다시피 그 유명한 만델브로트 집합(Mandelbrot Set)은 y=x2+c의 [해들의 집합]입니다. 단순한 2차방정식이 보여주는 매우 복잡하고 아름다운 그래픽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기상학자인 로렌츠의 방정식은 유체역학에 관한 '다차연립방정식'을 사용했습니다. 로렌츠의 방정식이 그려내는 기이한 궤적을 물리학 용어로 'strange attractor(괴상한 끌개)'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죠.
과학자들이 초등학교 수준의 뉴턴의 일차방정식에서 중학교 수준의 아인슈타인의 이차방정식으로, 그리고 이제는 고등학교 이상의 수학인 다차연립방정식을 가지고 소위 카오스이론(chaos theory), 비선형 동력학(nonlinear dynamics), 혹은 복잡계이론(complexity theory)라고 불리는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methodology)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하고, 탐구하고, 예측하려는 수준에 도달한 거죠.
그러나 처음 언급했듯이 서양의 과학이란 아무리 완벽한 다차연립방정식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자연의 수많은 인지적 방식 중에 단지 논리의 영역만을 가지고 접근하는 과학이기 때문에 삶에 더 많은 영향을 주는 감각, 느낌, 직관의 영역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잘 보면 아시겠지만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논리보다는 감정, 감각, 느낌, 직관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적어도 사랑에 빠질 때 그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
현대과학의 또다른 화두인 '창발 emergence'의 개념에서 본다면 인간의 인지구조 중 논리(logics)는 구조(structure)와 더 선형관계를 보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논리란 1+1=2와 같은 것이어서 예측이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감정이나 느낌, 직관의 경우는 매우 비선형적이어서 1+1이 0.01일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300 이상 일수도 있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논리학자 괴델은 이러한 수학적 명제를 과학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조건을 달리하면 전혀 엉뚱한 답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수학에서 1+1=2 이지만, 앞의 1이 '지구'라 가정하고 뒤의 1을 '개미 1마리'라고 가정하면 1+1=1 일수도 있는 것 입니다. 수학적으로는 여전히 '2'이지만 과학적으로는 '1'이 되는 셈이지요. 이러한 과학적 현상(비선형 관계)을 수학적으로 구현하자면 고등수학이 필요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창발(emerge)'이라는 용어는 비선형 동력학을 모르고서는 도무지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상대방의 감정을 예측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를 이해하실 겁니다.
이러한 현대과학의 한계 때문에 많은 과학자들이 오늘날 같은 첨단과학의 시대에도 UFO나 풍수, 점 같은 인간의 논리외적 기능에 의존하는 초과학 현상들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 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이 분야를 非科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 동서의학의 질병에 대한 이해방식과 해결방법에 있어서 더욱 극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논리만이 오직 유일한 올바른 과학적 도구일까요? 어떤 환자들은 논리적 설명보다는 따듯하고 정감 있는 손길에 더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과학의 대상으로 가지고 올 수는 없는 걸까요?
직관이나 느낌 같은 다소 무의식적 기능-인간의 뇌의 구조를 넘어서 고차원적으로 창발(emerge)한 무형의 유한한 정신적 실체-은 차제하고라도 감정(sensation 혹은 emotion)이라는 부분은 벌써 서구의 과학자들도 최근 복잡계이론, 비선형 동력학이라는 새로운 도구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과학도 이미 엄격한 논리의 과학의 한계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소위 퍼지이론(애매모호함의 논리에 근거한 과학이론)이나 그 뒤를 잇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생명(artificial life) 등의 오늘날의 첨단 과학적 방법론들이 바로 이러한 추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자랑하는 로봇 강아지-지금까지의 프로그래밍 기법과 다른 인공생명 기술을 응용하여 만든-는 스스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많은 로봇들이 벌써 실용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지난 50년간의 연구들은 에너지가 무엇이며, 그것이 육체와 정신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등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답을 보면 해답이 질문보다 더 황당해 보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전기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세포들은 극도로 미세한 분자기계들, 즉 세포 생물체를 구성하는 모터, 출입문, 펌프, 스위치, 화학공장들에 전력을 보내는 거대한 전기장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속도, 엄청난 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강한 전기 불꽃보다는 세포 내의 평화로운 전기활동 정도를 떠올릴 것입니다. 이 전기 에너지는 수십 억 년 전 우리 몸속으로 침입해 들어온 수조(兆) 마리의 벌레들-미토콘드리아-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그 벌레들은 모든 세포 속에 수천 마리씩 살고 있습니다. 이들 침략자들은 세포의 다른 부분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때로는 적이 되기도 합니다. 최근 연구들에 의하면 그들은 노화과정 그 자체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질환이나 불구 유발에 관여하여 육체와 정신 에너지의 비가역적인 감퇴를 가져오는 은밀한 암살자일 수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정신을 움직이고 동기를 부여하는 에너지에 대해서는 깊은 미궁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첨단 기술의 도움으로 뇌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변화들을 시시각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 그대로 형상화하여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성, 분노, 동기화 등을 관장하는 신경전달물질과 전달경로가 알려졌고, 따라서 흥분이나 우울증이 무엇인지, 약물로 그것들을 조절하는 방법 등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비만이나 체중조절이 지방세포에서 분비되고 뇌에 작용하여 식욕과 에너지 소비를 조절하는 인자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성욕을 지배하는 뇌의 부위도 알려졌습니다. 건강한 상태나 병적 상태에서 육체와 정신이 어떻게 교류하는지에 관하여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이러한 지식이 축적되면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왜 질병을 일으키는지, 질병은 왜 피로감을 유발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줄 것입니다.
원기 왕성한 느낌과 피로감은 하루 중 혹은 일생 동안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교대로 나타납니다. 당신은 아마도 지금 피로감을 느낄 것입니다. 피로감이란 무엇일까요? 하루가 끝날 무렵 당신이 피로를 느끼는 것은 에너지가 다 소진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뇌가 당신을 수면상태로 이끌려 하기 때문일까요? 에너지 상태가 신기하게도 하루를 주기로 반복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이가 들면서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에너지가 고갈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유전자가 당신을 영원한 수면상태로 이끌려 하기 때문일까요?
신체 또는 정신 에너지에 대한 현재의 개념은 학문 분야나 개념구조에 따라 단편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에너지를 이용합니다. 에너지는 하루종일 매순간,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순간마다, 어떤 생각이 우리 뇌리를 스칠 때마다 증가와 감소를 반복합니다. 수면 중 우리 신체는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정신은 비어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신체와 정신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정지에서 운동으로, 비활성상태에서 활성상태로 될 때 '에너지'가 관여합니다. '에너지'는 운동과 활성을 만들어 냅니다. 에너지는 몸 안에 저장되거나, 외부에서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잠을 자다 깨어나 행동하고 생각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는 신체와 정신에 저장되어 있던 에너지 저장고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 저장고는 얼마 만에 한 번씩 외부로부터 보충되어야 합니다. 통상적인 에너지의 개념은 '운동이나 활성을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으로서, 활성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소진되면 보충되어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에너지가 모자란다"라고 하는 것은 육체적 또는 정신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져서 재충전이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고에너지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들은 생명력, 활기, 쾌활함, 힘, 각성, 열정, 추진력, 열렬, 원기, 적극성, 열의 등으로 아주 많습니다. 그 반대 상태를 표현하는 말들도 그 만큼 많은데 무기력, 무관심, 소심함, 연약함, 권태, 지루함, 지침, 피로, 우울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들은 여러 가지 의미들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필요한 기술의 차원을 뛰어넘는 일을 하고자 하는 능력 또는 열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에너지의 개념은 여러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데, 물리적 에너지, 정신적 에너지, 성적 에너지, 감성 에너지, 영혼의 에너지, 창조적 에너지 등입니다.
자연과학에서 '에너지'의 의미는 다른 대부분의 과학용어들처럼 매우 한정적이고 구체적이어서 특정한 경우에만 사용되지만 일반적인 경우에까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일상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에너지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식은 周易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적어도 무의식은 周易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周易은 무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려 깊고 반성적인 사람들, 자기의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 周易입니다.
周易은 우리의 영혼을 꿰뚫어 보며 우리에게 자기 성찰을 요구합니다. 한 개인의 자기 성찰과 주역의 점사가 점을 치는 과정에서 '공명'을 일으킬 때 주역과 무의식 사이의 연결 관계가 확립됩니다.
융(Carl Gustav Jung)이 말하는 첫 번째 논점, 즉 비인과론적이고 확률론적인 원리에 대한 견해는 물리학자나 생물학자라면 곧 납득할 만한 견해입니다. 그는 이것을 '동시성(synchronicity): 비인과론적 연결의 고리'라고 불렀습니다. 동시성이란 "동일한 의미 혹은 그 이상의 사건들에서의 시간적 부합성"입니다. 부합성이란 위의 두 번째 논점에 나오는 '공명'의 결과물입니다.
서로 관련되어 있지 않은 사건은 이상적으로 고립된 계에서나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 세상이나 우주에 그렇게 이상적으로 고립된 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현실의 계, 특히 생물학적 계에 대한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법칙)의 가정을 정확하게 비판했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고립된 계, 즉 주변 환경과 에너지나 물질을 전혀 교환하지 않는 계에서는 엔트로피-무질서도-의 총량이 자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쉬운 말로 하면 고립된 물리계에서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엔트로피가 증가하므로 혼돈으로부터 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생명, 즉 생물계는 바로 혼돈으로부터 질서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때문에 일부 과학자들은 어떠한 최고의 신성이 존재하여 시간의 화살을 되돌렸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생물계는 고립된 계가 절대 아닙니다. 서로 관련되어 있지 않은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고립된 계의 경우입니다. 생물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 결과가 겉으로 표현되더라도 아직 물리적 방법으로는 검출되지 않는 어떤 상관관계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의식적인 반응의 경로는 미로와 같은 신경망 속에 존재합니다.
단백질 합성과정에서 유전부호 단계는 결정론이 끝을 맺고 확률론적 특성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복제나 전사는 형편반응이므로 결정론에 해당합니다. 번역 과정에 이르면 부호화가 다양성을 띠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동일한 아미노산을 부호화하는 동의어 코돈이 존재하게 되고 부호체계는 축중성을 띠게 됩니다. 염기서열의 영역에 따라 염기의 정보도 또한 확률론적 성격을 띱니다. 유전자 도서관의 정보전달 과정에서 인과율에 해당하는 것이 코돈입니다. 왓슨-크릭 염기쌍과 유전부호 체계는 이 도서관의 '색인카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기록으로부터 상호 참조되는 것을 찾아내려면 훨씬 더 정교한 검색도구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검색도구의 최초의 예는 周易일 것입니다.
유전자 도서관이나 두뇌 도서관 모두 그 근저에 자리한 원리는 조화와 협조입니다. 조화와 협조는 의식으로 표현되며 또한 생물분자, 생명체, 생물 종을 유지시키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수 이론이나 확률이론은 기본적인 물리적 단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자연과학은 아닙니다. 이들 이론은 과학에 속하기 보다는 현대 신경과학과 같은 자연과학을 보완하고 뒷받침하는 역할을 합니다. 周易은 수학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화와 협조라는 근본적인 생물학적 원리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포에서 이러한 조화와 협조의 원리는 촉매반응, 제한된 수의 지름길, 즉 반응경로, 동시성, 분업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런 원리를 통해 심리학은 궁극적으로 생물학에 융합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빛과 함께 당시 물리학자들 연구 대상은 물질의 구성과 관련된 원자의 구조였습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가 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원자는 영어로 아톰( Atom)이라하고 이 말은 그리스어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존재’라는 뜻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러나 1911년 러더퍼드(Rutherford Birchard Hayes)는 알파입자를 금 박막에 충돌 시키는 실험을 통해서 원자 중심부에 양전하를 띈 원자핵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실험결과에 따르면 놀랍게도 원자는 99.9999999999%가 비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축구 경기장에 모래 알 크기와 유사합니다. 이러한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러더퍼드는 마치 태양계 행성과 같이 원자가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돌고 있는 모델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이 모델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러더퍼드 원자 모델에서는 전자가 핵 주위를 원운동 하고 있는데, 원운동을 하려면 전자가 지속적으로 운동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데 속도는 크기와 방향을 갖는 벡터(vector)양이므로, 크기는 같더라도 방향을 바꾸면 속도는 변한 것이 됩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속도가 변했다면 가속도 운동을 했다는 뜻이 되는데, 전자가 가속도 운동을 하면 전자기파가 발생해 운동 에너지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결국 운동에너지를 잃어버린 전자는 원자로 끌려들어가 붕괴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자 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보어(Neils Bohr)는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전이론과의 단절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양자 개념이나 에너지 불연속의 개념을 원자 모형에 적용하기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정을 제안했습니다. 우선 원자에서 전자는 특정한 불연속적인 궤도에만 존재할 수 있고 이 궤도에 있는 전자는 전자기파 방출과 같은 에너지 방출은 없습니다. 그리고 전자가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옮겨 갈 때는 궤도사이의 거리에 의존하는 에너지를 방출하거나 흡수합니다. 이 모델로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여러 실험결과들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가정의 근거가 무엇인지 그리고 전자가 원자핵과 충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은 바로 프랑스 귀족출신의 과학자 루이 드브로이(Louis de Broglie)였습니다. 그는 박사논문(1924)에서 전자도 파동의 성질을 갖는다는 혁명적인 물질파이론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지도교수는 당시만 해도 황당했던 그의 박사 논문에 대해 학위를 주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에게 논문 평가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오히려 드브로이의 업적의 중요성을 단번에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에 미국의 실험 물리학자 데이비슨(Clinton Joseph Davisson)은 전자도 광파와 마찬가지로 회절현상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해 드브로이의 이론을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물질파 개념은 보어의 원자모델에서 전자가 원자핵과 충돌하지 않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전자도 파동의 특성을 가지므로 원자핵 주의에서 '정상파'(standing wave)의 조건을 만족하고 있다면, 에너지를 잃어버리지 않고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원자 모형에 대해 안정적인 이론적인 틀이 완성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고전역학에는 일반적인 입자와 파동의 운동을 기술하는 뉴턴의 운동방정식과 맥스웰의 파동방정식이 있었지만, 원자세계의 운동들을 기술하는 일반적인 운동방정식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는 드브로이의 전자에 대한 물질파와 관련된 파동을 설명하기 위한 공식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양자역학의 본격적인 시작을 여는 유명한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입니다. 이 수식으로 원자 주의에 전자가 존재할 수 있는 에너지 준위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거의 동시에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도 원자에서 빛을 흡수하고 방출하는 여러 가지 패턴을 설명할 수 있는 양자 형식주의(formalism)에 대해 작업을 하고 있었고, 그 결과로 추상적인 수학적 형식주의를 통해 슈뢰딩거의 방정식에서와 같은 행렬역학을 발표하였습니다. 이후에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은 수학적으로 동일함이 증명되었습니다.
수학적 형식주의는 수학을 완전히 형식화하자는 태도 즉, 수학에 쓰이는 모든 표현을 의미가 없는 기호에 의해 어떤 규칙에 따라 나열한 묶음으로 보자는 태도입니다. 형식주의는 공리를 세우고 그 공리계가 완전히 모순이 없다는 것을 기호조작을 통해 증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 무모순성에 대한 증명은 1931년 괴델에 의해 깨지고 맙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형식주의를 무척 싫어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