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북 남원시 산동면 대상2길 246 (우)55708지번/ 산동면 대상리 1042
귀정사는 백제 무녕왕 15년(서기 515년)에 현오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본래는 만행사(萬行寺)라 불렸습니다. 그 후에 백제의 왕이 절에 참배를 와서 高僧의 설법에 탄복하여 3일간 절에 머무르며 국정을 살피고 돌아갔다 하여 귀정사(歸政寺)라 고쳐 불렀습니다. 왕은 '죽고 살기를 스님과 더불어 같이 한다'는 글귀를 남겼다고 합니다.
고려 시대에는 백련결사운동을 펼쳤던 원묘국사 요세(了世)스님(1163~1245)이 거주하면서 대중들과 함께 비록 무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일지라도 쉬는 일이 없이 날마다 53불에게 12번씩 예경하는 수행을 게을리 하는 일이 없어 당시의 사람들은 스님을 서참회(徐懺悔)라 불렀다고 합니다.
1221년 대방(남원의 옛 이름) 태수 복장한(卜章漢)의 요청으로 귀정사에 제2의 백련결사를 개설했습니다. 고려 목종 5년(1002년) 대은스님이 크게 중창하였고, 조선 세조 14년(1468년)에 낙은스님이 각각 두 차례에 걸쳐 크게 중창하였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모두 소실됐습니다.
현종 5년(1664년) 설제대사가 비교적 옛 모습대로 고쳐짓고, 순조 4년(1804년)에 현일대사가 다시 보수하였으나, 우리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 와중에 옛 건물이 모두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유엔군이 공비토벌 목적으로 불태운 것이다.
옛 귀정사에는 법당, 정루, 만월당, 승당, 연화당, 삼광전, 문수전, 명월당, 시왕전, 향로전, 영당의 전각이 있었으며, 부속 암자로는 남암, 상암, 대은암, 낙은암 등이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귀정사에 살던 스님들이 모두 흩어지자 만공스님이 큰 법당에 모셔졌던 삼존불상을 충청도 수덕사 대웅전으로 옮겼고, 지금도 그 곳에 모셔져 있습니다.
1968년 유정동 스님이 보광전, 승당, 요사채를 복원하였습니다.
■ 고려 원묘 요새(圓妙了世)과 귀정사
1200년 지눌과 요세는 상무주암을 떠나 도량정비가 끝난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로 향했다. 그러나 요세에게도 기이한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원 귀정사(歸正寺) 주지 현각(玄恪)의 꿈에 어떤 이가 나타나 “내일이면 삼생(三生)에 ‘법화경’을 지녔던 스님이 오실 것이니 깨끗이 도량을 청소하고 맞아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현각은 꿈에서 시킨 대로 뜨락을 쓸고 음식을 장만해 기다렸다. 그리고 어스름 해가 질 즈음 요세가 도착했다. 그는 요세에게 꿈 얘기를 들려준 뒤 천태 문헌 한 권을 강의해줄 것을 간절히 부탁했다. 천태종 17대 조사로 염불결사를 이끌었던 사명지례(四明知禮, 960~1028)의 ‘묘종초(妙宗鈔)’였다. 천태지의를 친견하는 꿈을 여러 차례 꿨던 요세도 선뜻 이를 받아들였다.
이를 계기로 요세는 수선사로 가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1208년 영암 월출산 약사난야(藥師蘭若)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수행관을 조계선에서 천태교관으로 완전히 전환했다. 지눌이 기존 교단의 권위와 관습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요세는 지눌의 이론과 수행체계에 의지하지 않는 독자적인 길을 선택한 것이다.
첫댓글 원래대로라면 아름다운 사찰이었을텐데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
아름답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