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l Barth의 무덤을 방문한 후에는 스승 Heirich Ott교수님과 사모님이 영면하고 계시는 Riehen Friedhof로 찾아 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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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할아버지가 무역업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벌었고, 아버지는 스위스 연방 국회의장으로 봉직했고, 스승도 스위스 사민당(SPD)의 국회의원도 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교수가 정당에 가입하고 정치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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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지움의 학생 시절 때, 주머니에 Karl Barth의 <로마서 강해>와 Martin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를 넣어 다니며 읽을 만큼 지적으로 성숙했습니다.
Karl Barth가 자유주의자로 의심받던 때, 할머니가 Barth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 손자에게 신학을 권유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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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Barth의 제자가 되어 Barth 신학에 대해 논문을 쓰겠다고 하니 Barth가 웃으면서 내 제자에게 나를 연구시켜 박사학위를 주면 온 세상이 비웃을거라고 하면서, 오히려 Rudolf Bultmann에 관해 쓰라고 권유해서 Bultmann 연구의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스승의 아버지가 어떻게 Bultmann을 알아서, Bultmann의 딸은 스승의 집에 머물고, 스승은 Bultmann의 집에서 Bultmann과 3년 동안 아침식탁에서 서로 대화하면서 Bultmann의 신학에 관해 학위 논문을 썼습니다.
그후에는 Barth의 권유로 부자집 아들이 Graubünden의 시골의 어느 교회에서 7년 동안 목회를 하고, 그후 Bultmann 신학의 배후에 있는 Martin Heidegger 연구로 Habilitation(교수자격 논문)을 쓰고, 나중에는 Heidegger의 스승 Edmund Husserl의 현상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철학적 신학을 하며 Barth와는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나중에 Basel 대학의 신학부에서 Karl Barth의 공식 후계자가 되어 조직신학과, Fritz Buri교수가 은퇴하자, 종교신학(Religiontheologie)까지 맡아 종교간의 대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러나 강의 중에 Barth의 이름이 나오면 항상 "나의 위대한 스승, 칼 바르트"라고 부르며 존경을 다하던 모습이 강한 인상을 나의 뇌리에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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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D. Bonhoeffer를 말하면서 그의 <옥중서간>의 한 귀절, "운명(das Sckicksal)은 중성이라는 것이 의미가 가득하다...가혹한 운명 속에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할 수가 있는가?..."라는 귀절을 암송하면서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스승은 Dietrich Bonhoeffer의 신학에 관한 <Reality and Faith: The Theological Legacy of Dietrich Bonhoeffer (London:Lutterworth Press & Augusberg: Fortress Press, 1972)> 중요한 책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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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유학한답시고 장기간 체류함으로 재정적 어려움이 따를 때, 서울 연세대 동문 부근에 위치한 봉원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받게 되어 학위공부를 못 끝내고 2,000년 귀국하게 되었을 때, 집에 초청하셔서 당신을 Heiner(Heinrich의 애칭)라고 부르라고 하시던 때 감격스러웠습다.(*보통 학위 구두시험이 끝났을 때, 이제는 스승과 제자가 아니고, 학문의 길을 함께 걷는 동료로 맞이한다는 뜻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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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 늘 자유스러운 사고와 관대한 자세를 가르쳐 주시고, 한국인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늘 돌보시던 모습에 다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스승과 사모님의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기도드립니다.
*마지막 사진은 스승의 장례예배가 거행되었던 리엔마을교회 (Riehendorf Kirche)의 모습입니다.
첫댓글 은사 하은규교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