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하나 열려 있다. 그 '길'은 우리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늘상 다녔던 길이고 또 미래에도 그 누군가가 다닐 길이다. 그것은 아스팔트로 포장된 2차선 길이다. 그 '길'이 굽어지더니 이내 먼산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 길은 인류 역사를 통하여 민족과 민족을 이어주고 문물을 교환케 했던 통로이다. 길은 이렇듯이 인간들을 지리적, 물리적 차원에서 연결시켜 주는 통로가 되는가 하면 인간의 정신적, 영혼적 해방구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따라서 나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길'도 그러한 물질적, 역사적 차원의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보다 오히려 인간의 정신적, 영혼적 차원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작품의 하늘에서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특징이 드러나게 하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은은한 서광의 표현이다. 근경의 길과 원경 하늘의 서광은 상호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기독교의 상징언어일 것이다. 여기서 원경의 하늘은 전반적으로 밝은 톤인데, 근경과 중경의 어두운 톤과 비교한다면 그 의미는 한층 부각될 것이다. 특히 중경의 산능선을 따라 어두운 톤과 하늘의 밝은 톤의 강한 대비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점도 하늘의 서광의 상징성을 부각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근경과 중경의 사물들의 세세한 모습의 표현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작품의 구도도 다양하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너무나도 단조롭다는 느낌이 들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 시리즈를 통하여 내가 시사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이와 더불어 길을 제외한 나머지 사물들의 형태에 있어서도 구체성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다. 내가 표현한 화면은 광선에 아주 민감하다. 나는 붓 터치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고로 붓 터치에 의한 공간분할이나 사물간의 구분, 나아가 사물의 3차원적 환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대신에 나이프의 힘에 눌려 버린 사물의 면들만이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나이프의 문지름에 의한 특이한 표현기법을 통하여 나의 작품들에서는 물감의 물성적 특성이 활달하게 명시되어 있다. 나이프의 칼날을 빈번하게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는 사물 자체의 형태성이나 사물들간의 윤곽도 모호해지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물들의 형태성이 화면에서 공간의 점유로서만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표현에 주의를 게을리한다면 사물들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는 경우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나는 기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나이프로 물감을 문질러 사물들을 표현해냄으로써 작품이 변질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는 점도 나의 작가적 기질에 속한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나의 작품에서 시각적인 환상이 유발되지 않는 점이 단점이라는 견해는 납득하기 힘들것이다. 무디게 눌려버린 사물들의 형태성이 오히려 우리에게 궁금증을 배가시키고 있으며, 전체적인 분위기로 나아가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럴 경우에 나의 풍경화는 특별하거나 특이한 구도를 구태여 요구하지 않는다. 나의 구도는 오히려 평범한 일면이 있다. 그 평범성을 뛰어 넘어 나의 작품이 시사하는 최종 목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나, 자신의 정신세계의 개시(開示)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인식을 예술가가 확보한다는 것은 사실은 예술가 자신에게 투사되어야만 하는 행위 이전의 물음이며 자기 존재의 확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과 확인을 바탕으로 한 예술행위는 비로소 그 사회 속에서 의미로운 것으로 만들며 생명력 있는 존재로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충절의 고장인 남원 출신이다.
사실 시대가 가진 의미에 관하여 남원땅에 태어난 예술가로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행위자로서 당연히 가져도 될 만한 행위의 자유에 관하여서는 굴레일 수 있지만, 예술가에 주어진 행위의 깊이에 대해서는 역설적이기도 오히려 축복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98년도에 완공된 남원의료원에 가면 1층 로비에 <뱀사골, 300호>와 <광한루의 여름, 200호>를 만나게 된다. 뱀사골 그림에서 특징적인 점은 작품의 오른쪽에 그려진 소나무 1쌍이다. 그것들은 마치 남녀 1쌍이 서로 포옹하는 듯한 자태이다.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환자가 1쌍의 소나무의 사랑스러운 자태를 통하여 정신적으로 안정을 되찾고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한다. 또한 남원시청로비에 <광한루, 500호>와 강당입구에 <뱀사골 추, 200호>도 만나게 된다. 특히 전자에서 나는 조선조시대 계급의 벽을 초월한 남녀의 애틋한 사랑의 무대였던 광한루의 상징적인 대상들을 집합시키고자 하였다. 근경에는 오작교와 광한루, 연꽃과 비단잉어, 수양버들 등이 표현되어 있으며, 원경에는 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각 사물의 표현은 사실성에 입각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집합적이다.
CTS방송국(기독교 TV, 서울 본사)에 5m×3m 길(WAY)과 2018년 10월24일에 전주바울교회 로비에 기도와 간구(360cm × 194cm)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 그들이 원방에 나를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다, 생존하여 돌아 온지라”라는 작품들은 자연과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표현하여 열방의 구원선교의 의미를 두고 제작하였다.
나는 보라색을 즐겨 사용한다. 따라서 작품이 전체적으로 청량한 공기를 감지하게 해주는 화사한 색채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특히 색채는 보라색 톤을 지니고 있다. 오작교의 화강암 배면이나 광한루의 축 처진 기와지붕의 색채는 보라색 톤이다. 남원시청 민원실에 소장되어 있는 <뱀사골, 200호>에서 좌측 하단의 많은 바위들의 색채도 보라색 톤이다. 더불어 이번 <길> 시리즈에서의 아스팔트 길도 보라색 톤이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보라색은 어떤 색상적 의미를 갖는 것일까? 아니 그것이 단순한 색상적 상징성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일까? <광한루>나 <뱀사골>의 보라색은 화려하면서도 은근한 멋을 풍겨주기도 하고 세월의 무상함도 시사해준다. 즉 그 색상이 시간성과 역사성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길>에서 보라색 톤의 길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역사성과 더불어 인간 나 자신의 정신성이나 영혼성의 자각도 암시해주는 것이다.
길(WAY)은 열려 있다. 그 길은 이상세계로 열린 길이다. 동시에 그 길은 과거와 현재의 역사성을 발판으로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것은 하늘로 열려진 길이기도 하다. 하늘의 서광이 화답하는 시간 속의 길인 것이다. 나의 풍경화는 그러한 의미에서 단순한 대상의 모방이 아니며, 대상의 묘사를 통한 또 다른 정신세계의 제시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나의 <길> 시리즈에서는 화사한 색채주의적 스타일을 바탕으로 청량한 공기감을 창출해냈으며, 공간분할적 사물표현을 통하여 기독교적인 상징성도 가미시켰다는 점에 그 심미적 특징이 있다 하겠다.